[시론] 한국교회 위기의 탈출구: 다른 복음을 몰아내라

by 편집위원 posted Aug 1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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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한국교회 위기의 탈출구: 다른 복음을 몰아내라
영지주의
▲정성욱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기복주의·율법주의·방종주의·신비주의와 더불어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다른 복음은 영지주의(Gnosticism)이다. 영지주의란 주후 1-4세기에 걸쳐 근동과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철학적·종교적 운동으로서, 영적인 지식과 비밀한 지식을 통해 구원과 인간의 자아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영지주의의 철학적·종교적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대체로 영지주의는 철학적으로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의 영육이원론과 마니교의 선악이원론에 깊은 영향을 받아 태동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영지주의의 영육이원론이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은 선하지만 물질과 육신 혹은 몸이 악하다고 보는 관점을 말한다. 영지주의의 선악이원론이란 형이상학적으로 선한 신 혹은 선한 원리와 악한 신 혹은 악한 원리의 항구적인 투쟁과 갈등이 우주 만물과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라고 보는 관점을 말한다.

결국 영지주의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적 선하심과 절대주권적 통치를 거부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의 근원적 선성(goodness)을 거부하는 비성경적·이단적 운동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성경은 결코 영육이원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신 바 영혼과 몸과 물질은 근본적으로 선하다. 물질이나 몸이 본래적으로 악하다는 관점은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심지어 아담과 하와의 타락 후에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도 물질이나 몸은 죄의 저주 아래 있을 뿐 그 본래의 선성은 유지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또 선과 악의 세력이 영원한 투쟁과 갈등 가운데 있다는 형이상학적 혹은 존재론적 이원론(metaphysical, ontological dualism) 역시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타락한 마귀도 궁극적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선의 세력인 하나님과 악의 세력인 마귀가 영원한 투쟁과 갈등 관계 속에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악의 화신인 마귀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계 내에서 움직이고 역사하며,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못에 던져질 운명에 놓여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처해 있는 위기 상황을 부채질하고 있는 또다른 신학적 혼란은, 바로 성과 속의 이원론이다. 이 성과 속의 이원론은 영지주의라는 다른 복음이 만들어낸 부산물이다. 한국교회가 새롭게 갱신되고 성숙하기 위해, 성속이원론은 반드시 극복되고 한국교회 내에서 퇴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속이원론이란 무엇인가? 성속이원론이란 소위 영적·종교적 영역과 물질적·비종교적 영역을 급진적으로 분리시키고, 영적 또는 종교적 영역은 본질적으로 거룩하고 선하지만, 물질적이나 비종교적 영역은 본질적으로 악하고 무가치하다고 규정하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좀 더 확대해서 정의를 내리자면 특정한 직업이나 공간·시간을,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과 속되고 악한 것으로 분리하고, 성스러운 것은 가치 있고 속된 것은 무가치하다고 규정하는 가치체계를 의미한다.

한국교회 내에 팽배되어 있는 성속이원론의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보자. 오늘날 한국교회 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자·목회자가 되거나 풀타임 선교사가 되는 것과 같은 소위 종교적·영적인 사역에 종사하는 것은 거룩하고 선하고 가치로운 일이지만, 소위 ‘세속적’ 직업을 택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악하거나 그렇지 않아도 종교적·영적인 사역에 종사하는 것에 비해 본질적으로 가치가 현저히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또 예배나 성경공부나 단기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거룩하고 선한 일이지만, 가사를 돌보거나 사업에 종사하거나 예술 활동이나 스포츠 활동을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악하거나 그렇지 않을지라도 예배나 성경공부에 비하면 현저히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심한 경우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는 예배당은 본질적으로 성스러운 공간이지만, 집이나 학교나 사업장은 세속적인 공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다른 공간들과 구별하여 높이고 있다. 또 어떤 직업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성직’인 반면 다른 직업들은 ‘세속적인’, 따라서 ‘거룩하지 못하고 가치가 떨어지는’ 직업으로 구별하여 차별하고 있다. 그래서 성속이원론에 심각하게 빠진 어떤 사람들은 성직을 통해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지만, 소위 세속적 직업을 통해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그런 직업을 버릴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성속이원론이 성경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가르친다. 첫째, 성경은 물질이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도리어 물질은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가르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영적인 세계와 물적인 세계를 포함한 모든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바라보시면서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선언하셨다. 그 말씀은 물질이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라는 하나님의 확증이다. 따라서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자의적으로 구별하여 영적인 것은 선하고 거룩한 반면, 물질적인 것은 악하고 속되다고 규정하는 성속이원론은 하나님의 세계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둘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특정한 직업, 활동, 공간, 시간만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죄스러운 몇 가지 직업이나 활동을 제외하고) 모든 직업과 활동, 모든 공간과 모든 시간이 거룩한 것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여기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며, 어떻게 보면 가장 ‘세속적인’ 활동이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주님은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활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선언하시고, 그렇게 살 것을 명령하신다. 이것은 먹고 마시는 것을 포함하는 모든 일과 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활동과 직업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고후 5:17),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 2:9)’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종사하는 모든 직업은 명실공히 성직(聖職)이다. 신학자, 목회자, 선교사만이 성직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가정주부, 그리스도인 소상공인, 그리스도인 회사원, 그리스도인 교사, 그리스도인 공무원, 그리스도인 농어민 등 모든 사람이 성직자가 되었다.

그리고 예배당만이 거룩한 공간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공간이 거룩한 공간이 되었다. 따라서 예배당만을 성전이라고 부르고 높이는 것은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는 성령이 내주하고 계신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성전이 되었고, 교회 공동체가 성전이 되었다. 콘크리트나 목재로 만들어진 어떤 특정한 공간이 성전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이 성전이 되었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종사하는 모든 직업이 성직이 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모든 공간과 시간이 거룩한 것이 되었다.

영지주의라는 다른 복음이 한국교회 내에서 퍼지게 한 또다른 부정적인 산물은, 믿음을 신비한 영적 지식이나 깨달음과 동일시하는 흐름이다. 그래서 이런 영지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소위 성경의 가르침이나 교리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이나 지식을 가진 자가 믿음이 성숙한 자이고, 깨달음이나 지식이 떨어지는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라는 오해에 빠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어떤 특별한 영적 깨달음이나 비밀한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 신뢰(personal trust)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살아 있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의뢰하고, 하나님께 의탁하고 기대는 것이다. 인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응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과 사랑과 능력과 긍휼과 자비와 은혜에 우리의 영혼과 미래와 운명을 맡기고 의탁하는 것이다. 하나님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어떤 특별한 지식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비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믿는 자의 교육 수준이나 지적 수준과 근본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초등학생 정도의 교육만을 받은 사람도 탁월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심지어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지식이나 깨달음의 정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자의 의뢰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능력이 중요한 것이다.

오늘날 영지주의라는 다른 복음이 한국교회에서 세력을 형성하면서 생긴 또다른 심각한 문제는 지식 자체를 소중히 여기면서 지식을 따라 살아가는 실천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다. 지식 자체의 축적과 정보 자체의 획득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성경이 가르치는 바 그대로 실천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위기를 부채질한다.

많은 교회들이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심지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제자훈련을 실시하고 있지만, 정작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성은 심각한 답보 상태에 있다. 도무지 실천하려 하지 않는다. 도무지 배우고 깨달은 영적 지식을 삶에 적용하려 하지 않는다. 앎과 삶의 괴리 현상이 너무 심각하다. 입으로는 안다고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그 고백과 일치하는 실천에는 관심이 없다. 실천이 나오든, 안 나오든 상관 없이 신앙적 지식과 정보를 얻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주님의 경고의 말씀은 철저히 무시된다.

한국교회는 성속이원론, 신앙적 주지주의, 지식과 실천의 불일치, 신앙고백과 윤리의 불일치 등과 같은 영지주의적 산물들로 인하여 엄청난 혼란에 빠져 있다.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세계관과 진리로 무장하여, 성속이원론, 신앙적 주지주의, 지식과 실천의 불일치 등을 퇴출시켜 나갈 때 한국교회의 갱신과 성숙은 점진적으로 이뤄져 갈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끝>

/정성욱 (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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