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알아두면 좋은 성경용어 풀이 21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 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16)
복음전파를 위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 보내질 것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다. 이는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 것과 같다고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며 뱀같이 지혜로울 것을 말씀하신다. 지혜하면 떠오른 자가 솔로몬이다. 아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지혜로운 재판은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다. 솔로몬은 왕이 되자 하나님에게 오직 지혜만을 구함으로 하나님이 흡족하여 지혜에 더하여 부귀와 영광을 받았다. 디모데후서 3:15에서는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고 하였다.
차가 문제가 생기면 차 정비공에게 간다. 몸이 문제가 생기면 의사에게 간다. 그들은 그들 분야의 전문 기술자이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삶의 기술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이를 지혜라고 부른다. 의사는 환자가 오면 먼저 자신의 의학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환자의 무엇이 문제인지 진단(판단)하고 그 진단을 바탕으로 환자의 건강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고 그 일을 수행한다. 마찬가지로 지혜자는 살아가는 삶의 문제에 있어서 바로 판단하고 바로 행하는 자이다. 지혜는 처세술과 다르다. 처세술은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지혜는 그렇게 행동하도록 하는 판단하는 생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 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 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잠언 1:2-4)
지혜는 세 가지 결합의 산물이다. 지식과 명철 그리고 근신이다. 여기에서 명철이란 상황에 대한 판단을 말한다. 결혼식장에서는 기쁨을 표현해야 하고 장례식장에서는 슬픔을 나타내야 한다. 근신은 신중히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한번 행하기 위해 두 번 생각하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한다. 당연히 지식은 지혜의 바탕이 된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지혜의 근본과 지식의 근본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이 있다. 아는 것이 있어야 바른 판단을 한다. 재판장은 바른 재판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판단의 잣대를 제공하는 법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헌법을 시작으로 형법 민법 등 모든 법에 대한 지식이 있는지에 대한 사법 시험이 있는 이유다. 그러나 이러한 조문으로 나타난 법의 지식을 우선하여 법이 가지는 정신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법이 가지는 정신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따라 판단을 위해 찾는 법조문이 달라질 것이다. 왕은 마지막 판단의 결정권자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지혜없는 자가 많은 것을 가지게 되면 위험해지는 이유다.
마찬가지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지혜로운 자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이 지식이 진리의 지식이어야 한다고 말한다.(디모데후서 3:7) 진리로서의 참된 지식은 사람을 살린다. 당장의 이익을 줄지라도 결국은 망하게 하는 지식은 진리가 아니다. 필요악도 필요하다는 지식은 악을 용인하는 것이기에 참된 진리의 지식이 아니다. 성경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한다. 기독교인은 성경이 곧 진리의 지식이다고 믿는다.
또한 지식의 방향성은 매우 중요하다. 악한 자가 많이 알면 위험하다. 그러나 선한 자가 많이 알면 많은 사람을 살린다. 그래서 모든 지식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고 성경은 되풀이해서 말씀한다.(잠언 1:7) 오늘날의 윤리 문제는 무서운 것이 없기에 일어난다. 대가족 시절의 옛날에는 무서워하는 어른이 있었다. 그 어른 앞에서는 언행이 조심스러웠다. 옛날 가정은 아버지라는 존재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무서운 존재였다. 가정의 질서가 살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정에서 무서움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가정 윤리가 문제에 직면해 있다. 한국에서는 죄를 짓게 되면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고 호통을 친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무서운 것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무서운 것이 없을 때 제멋대로의 세상이 된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자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의 삶에 우리의 삶에 절제의 지혜가 있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말과 같은 말로 이해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의 앞에 계시는데 어떻게 내가 함부로 살아가겠는가? 지혜자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나온다.
지혜의 바탕이 되는 지식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바른 지식(앎)이 요구된다. 하나님을 바로 알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면 구원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구원은 회복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했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그 세계가 나의 삶에 펼쳐진다. 그 태초에 창조된 세계에는 행복의 동산(에덴동산)이 있었다. 행복한 삶으로의 회복이 시작된다. 인간의 삶에서 파괴되어 버린 창조세계의 회복(구원)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어른이 되신다. 하나님은 내 삶의 주관자가 되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점검하며 살아가게 된다. 지혜로운 판단이 우리들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라고 말씀한다. 곧 예수님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이시다. 예수님의 삶을 보라. 예수님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삶의 결론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행복과 승리하는 삶의 부활(회복)을 가져오는 지혜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이다.
기독교인은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자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이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복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여기에 삶의 지혜가 나온다. 바로 생각하고 바로 판단하라. 이를 위해 예수님을 바라보라. 예수님이 하나님께 다가가게 하는 지혜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