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나의 따뜻한 밥상]
한 젊은이가 경찰서에 강도상해 피의자로 잡혀 들어와 조서를 받고 있다. 나이는 17세다. 경찰은 늘 있어왔던 강도 사건을 처리하듯이 그를 다루었다.
그의 친척들조차 경찰서에 잡혀간 그를 외면한 상태다. 다니던 학교의 담임선생님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3개월 전에 이미 퇴학을 하여 학교를 그만둔 터라 관심 없다는 답변만을 들을 수 있었다.
비난의 칼을 휘두르는 매스컴과 경찰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범죄인으로 출생한 것처럼 그 청소년을 취급할 뿐이다. 술집에 갈 돈이 당장 궁해서 그런 짓을 했느냐 혹은 편의점 주인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했느냐 등등, 형사는 그에게 강도짓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캐물을 뿐이다.
가슴 아픈 인생사
주변 사람들은 그 젊은이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운했던 성장 배경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다. 이런 상황을 과연 청소년 한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우리가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문제가 된 행위 이전에 오늘의 그의 성격을 만들게 된 여러 가지 요인들, 부모와의 심각했던 갈등,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왔던 과거의 정신적 아픔들, 유아 시절의 불충분했던 건강상태 등 전반적인 그의 삶의 역사를 되짚어봐야 한다.
현재 그의 왜곡된 성격과 과잉된 행동양식을 이해하려면 그가 자라온 인생사를 되 짚어보아 그 안에서 실제적인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언어학대와 낮은 자존감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B 헐록은 ‘청소년발달에서의 가족관계 변화’라는 책에서 부모의 ‘무시’ 등 거부적 양육태도가 자녀를 반항적이고 공격적으로 만든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거부적 양육태도에서도 특히 언어학대가 청소년의 자아존중감을 약화시킨다고 한다.
언어학대를 받을수록 사회적 위축감이 높았고 자아존중감은 저하됐다. 경멸적 거부적 언어학대가 사회적 고립감을 심화시키며 원망적 언어학대가 자아존중감을 떨어뜨린다고 밝히고 있다. 언어학대가 청소년의 성장과 발달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건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를 새삼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언어학대속에 자란 아이들이 부모가 되어 자녀를 양육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가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사회적 고립감과 낮은 자존감이 대물림되는 악순환은 눈앞의 불을 보듯 뻔하다.
문제 학생 뒤에는 반드시 문제 가정이 있다
청소년들이 사랑이 넘치는 화목한 가정에서 성장하고 생활하는 경우 비행을 저지르는 발생 빈도는 극히 드물고, 우발적으로 비행을 저질렀다 해도 이런 학생들은 쉽게 교정이 된다. 하지만, 부모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고, 가정이 안정돼 있지 않은 경우 청소년은 가정을 벗어나 밖으로 떠돌게 된다. 또한 부모의 자녀에 대한 애정이 부족하고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부모의 관심이 덜한 경우에 있어서도 청소년은 가정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청소년 비행의 출발점은 가출이다. 상처만 받아온 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도 자신이 익숙한 “상처주기”방법을 사용한다. “내가 이렇게 상처를 주어도 떠나지 말라”는 바램이 담겨있는데도 아이들은 쉽게 그 방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 어른들 역시도 예외는 아니질 않는가? 그래서 응어리지고 깨져가는 아이들(멘티) 앞에서, 멘토가 되는 우리 어른들은 더 행복해 져야한다. 멘토가 불행해 지면 멘티들은 갈 방향과 목표를 잃고 좌충우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성장하는 존재이지 아이들(멘티)만 바뀌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 입장에서 이해하라
우선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아이들을 선도해서 바른 길로 인도하겠다라는 마음은 일단 접어 두는 것이 좋다. 철저하게 그 아이들의 입장에서 상황을 이해하고 접근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그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좋은 것을 누구나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좋지 못 한 것도 너그럽게 수용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다.
한 순간에 청소년을 올바로 인도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내 자녀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고만 있을 것인가? 우리 앞서가는 어른들이 먼저 뜻을 모아 연약한 청소년들의 마음을 싸매주며, 영혼을 치료하려 애쓸 때 주님께서도 은혜를 부어주시고, 남은 부분을 치유하실 줄 믿는다.
열 남매를 둔 가난한 부모
열 남매를 둔 가난한 부모가 있었다. 자식 없는 부자가 아이 한 명을 입양해 잘 기르겠다고 간청했다.
잘 먹이고 입히고 공부도 가르치겠다고 약속했다.
가난한 부모는 잠든 열 남매의 얼굴을 보았다.
장남은 맏이라 안 된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차남은 아버지와 똑같이 닮아서 남편이 반대했다.
셋째는 어머니를 닮은 딸이라고 아내가 반대했다.
넷째는 공부를 잘하는 지혜로운 아이여서,
다섯째는 공부를 못해 남의 집에 보내면 멸시 받을까봐,
여섯째는 제일 잘생긴 아들이란 이유로,
일곱째는 못난이란 이유로 양부모에게 미움을 받을까봐 안 된다고 했다
건강한 여덟째는 가사를 잘 돕는 아이라 줄 수 없었고,
아홉째는 장애인이라 부모의 절대적인 손길이 필요했다.
그러면 막내는 어떠한가. 부부는 귀여운 막내라 절대 줄 수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자식의 바다다. 예수님은 우리의 바다다. 그들의 사랑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장 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