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알아두면 좋은 성경용어 풀이 23
성 령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한복음 16:13-14)
성경은 인간이 구원받는 길을 알려주는 책이다. 성경의 모든 것, 창조 이야기도,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도 구원에 관련되어 있다. 당연히 성령 하나님도 구원과 관련되어 성경은 이야기 되고 있다. 그렇다면 구원 사역에 있어서 성령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성령은 말씀과 연관된다
너무나도 성령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은 성령 체험 현장은 울부짖고 넘어지고 하는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어떤 이는 성령의 불 받아라하며 성령 하나님을 자신이 나누어주는 것처럼 한다. 어떻게 성령도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하나님을 나누어 주는가. 이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에서부터 이야기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성령 하나님의 가장 큰 특징은 진리의 성령이라고 명하신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곧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자 이렇게 고백한다.“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누가복음 24:32)
오순절 성령이 교회에 임하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몰랐던 제자들이 비로소 에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고 죽으셨으며 부활했는지를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게 되자 그들은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 전도에 열정을 가지고 뛰어 들게 된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체험적으로 알게 하신다.
요한복음 3장에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물과 성령이 관계가 있음을 본다. 물은 씻는 역할이다. 무엇으로 우리의 잘못 알아온 것들을 씻을 수 있는가? 그것은 말씀이다(에베소서 5:26). 그런데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말씀을 바로 알게 하는 분이 있다. 바로 그가 성령 하나님이시다(디도서 3:5).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 곧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알게 하신다. 성령이 임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된다. 그러기에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구주와 주되심을 도저히 개인적으로 체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단지 지식적으로 이론적으로 안다고 말씀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 들려질 때 그 복음을 제대로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은 오직 성령이 그렇게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성령과 말씀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말씀을 바로 듣기를 원한다면 성령 하나님께 요청하라. 말씀이 당신을 뜨겁게 할 것이다. 성령은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움직이게 하신다.
성령의 은사는 구원사역과 관계가 있다
성령은 확실히 은사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 은사가 개인 믿음의 결과와 증명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복음 사역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방언은사가 방언을 해야 내가 믿음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남을 구원시키는 일에 사용되도록 주어진다는 것이다.
의사가 병을 고치는 일은 자신이 의사임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모든 은사는 사람들을 구원에 이끌도록 또는 말씀으로 바로 인도하도록 주어진다.
신유 은사는 말씀이 이미 흥황한 곳에서는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그러나 아직 말씀 그 자체로는 이해가 없는 곳에서는 신유의 은사가 빈번하게 일어남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자신이 아는 지식을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아용하였으나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자신의 지식을 복음을 전하는데 남을 위하는 일에 사용하였다.
성령의 은사는 결코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거나 보이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내가 구원받음은 내가 방언을 함으로 확실해 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시인하고 믿을 때 구원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 성령은 내가 구원받고 말씀을 바로 알도록 나를 인도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내가 남을 구원하고 그들을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도록 나를 사용하신다. 이때 은사가 필요하다면 성령은 그 필요한 은사를 주실 것이다.
성령 충만함은 말씀의 충만함이다
성령이 내게 임했다. 그래서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런데 내게 임했던 성령 하나님이 때론 떠나기도 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 먹은 데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손을 붙잡고 계심을. 한번 임재하신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떠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엄마의 손에 붙잡혀 시장을 함께 가던 아니가 장난감을 보더니 장난감을 사 달라며 엄마가 가는 길을 지체하게 만들 수 있다.
얼마나 늘어나는 고무줄에 돌을 달고 돌리면 고무줄은 늘어나고 돌은 늘어날 수 있는 한계까지 멀리 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아이가 엄마의 손에서 놓여지거나 돌이 고무줄에서 풀려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믿긴 하지만 때론 세상에 한 눈을 팔때가 있다. 이때는 교회 가기도 싫고 말씀을 읽는 것 기도하는 것도 손을 놓을 때가 있다. 그럼 성령 하나님은 떠나 간 것인가? 엄마는 아이의 손을 놓아 버린 것인가? 고무줄은 마침내 끊어진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좌지우지하는 분이 아니다.
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를 때 잠시 실랑이는 벌이겠지만 그래서 가는 길이 지체는 되겠지만 아이가 제 멋대로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세상에 한눈을 잠시 파는 순간에도 한번 임재하신 성령 하나님은 나의 손을 놓지는 않는다. 그래서 성령 임재를 확실히 느끼고자 한다면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분명히 나의 손을 붙잡고 있는데도 정말 그러한가하고 불안해한다면 성령 충만을 기도하라는 것이다.
성령 충만은 다른 특별한 것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를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성령 충만은 말씀이 나의 삶을 송두리째 붙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지식을 얻기 위한 성경공부가 아니다.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시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구원하심의 감격을 얻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대한다. 말씀을 내 삶에서 밀어내는 순간 성령은 내 삶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시장에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엄마를 끌고 다니고 싶은 아이처럼(결코 엄마의 손은 놓지 않으면서), 자신의 원대로 하나님이 끌려오기만을 기대하기에 성령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 이런 자는 언제나 불안하다. 혹시 하나님이 나의 손을 놓아버린 것은 아닌지. 그리고 신앙의 진보가 없다. 그래서 성령 충만이 요구된다. 성령이 말씀으로 인도하는 데로 자신을 맡기는 삶이다. 성령 충만은 말씀으로 충만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