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나의 따뜻한 밥상] 라 과디아 공항 이야기

by kim posted Oct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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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나의 따뜻한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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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과디아 공항 이야기

 

1930년 어느 날. 상점에서 빵 한 덩어리를 훔치고 절도혐의로 기소된 노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판사가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라 과디아 판사가 묻습니다. "전에도 빵을 훔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처음입니다" 노인이 대답합니다


"왜 훔쳤습니까?" 

", 저는 선량한 시민으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돈도 없어서 사흘을 굶었습니다. 배는 고픈데 빵을 살 돈은 없고 참을 수 없어 그만 빵 한 덩어리를 훔치게 되었습니다." 


라 과디아 '판사는 노인의 대답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며 말을 못하다가,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빵을 훔친 것은 잘못입니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고 누구에게도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절도죄로 벌금 10불을 선고합니다." 라고 벌금형을 선고했습니다. 


노인의 사정이 딱해 용서해 줄 것으로 알았던 방청객들은 인간적으로 너무하다고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라 과디아 판사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이 피고인이 빵 한 덩이를 훔친 것은 오로지 이 노인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 노인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빵을 훔쳐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도록 방치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도 10불의 벌금형을 내리고 방청석의 여러분들도 50센트씩 벌금형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입회 서기인 '베일리프'씨에게 모자를 벗고 벌금을 걷도록 합니다


라 과디아 판사는 자신의 지갑에서 10불을 꺼내 서기의 모자에 집어넣으며, "이처럼 배고픈 사람이 뉴욕거리를 헤메고 있을 때에 나는 너무나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던 것을 이 노인 앞에 회개하고 그 벌금을 내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판결 앞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모두 자신의 능력껏 벌금을 냈고 이 노인을 고발한 빵집 주인도 동참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모은 돈이 모두 5750센트였고 라과디아 판사는 벌금 10불을 제외한 4750센트를 노인에게 건네주고 열심히 살라고 격려해 줍니다. 노인은 돈을 받아서 10달러를 벌금으로 내고,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쥐고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리며 법정을 떠났다


이 명 판결로 유명해진 피오렐로 라 과디아(Fiorello La Guardia) 판사는 그 후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 동안 뉴욕 시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했던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 당시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경제사회적으로 몹시 어려운 시절에 그의 아름다운 판결로 더욱 따뜻한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늘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주어서 '작은 꽃'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맨해튼에서 13km쯤 떨어진 잭슨 하이츠에 있는 공항을 그의 이름을 따서 라 과디아(La Guardia Airport)라고 명명하는 공항으로 만들어 기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용서는 극한상황에서 더 극적이다!

용서라는 문제는 극한 상황에서 더 극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를 닮고 따라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상대방으로부터 피해를 입을 때,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편에 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용서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용서를 하였다면, 여기에 엄격한 보상에 따른 합당한 요구를 할 권리마저 억눌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능동적인 고통을 통해 악인까지도 받아줄 수 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용서만으로는 화해와 평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즉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계속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만 우리는 포용할 수 있어진다


현시대의 다양한 문화 속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개인주의와 허물어져가는 가족 공동체의 흐름 속에서 진정한 용서와 포용을 고수하며 살기를 배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세계의 역사 속에서도 포용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숱한 좌절을 맛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결코 다급해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용서와 포용의 힘은 우리 안에 머무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있기 때문이다. 포용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사람을 껴안는 것이다.


포용은 나의유익 그리고 남의 유익

살다보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특히 기독교인인 내 생각에 전혀 맞지 않는 의견을 내는 사람도 있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 같은 사람도 만날 수 있다. 이럴 때 터무니없는 의견이라며 무시하지 말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돌아보아야 한다


다 알다시피 한국어 사전적인 의미의 포용이란 타인을 너그럽게 감싸주거나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감싸주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대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경의 포용적 의미는 하나님이 만드신, 호흡하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즉 문화, 언어, 종족이 다르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에, 여전히 생명은 귀한 것이며 존엄한 것이다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포용력이다. 그러나 실수와 잘못에 대하여 언제나 원망이나 질책만을 가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때로는 질책보다 넓은 아량과 수용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설령 바보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을 인정하여 주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잘못은 있다. 그 사람이 바보 같은 짓을 고집한다 해도, 그것이 잘못됐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배척할 수는 없다.


사도바울의 견해 (고린도후서 28)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많은 문제와 근심을 일으킨 사람들에게는 이미 받은 벌이 족하다 한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들을 정죄하거나 내몰지 말고 그들을 용서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받아들이라 한다


바로 주님이 이러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까닭이 사랑이고 죄의 벌 뒤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포용하는 주님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가끔 나의 마음에는 어떠한 사람들에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나를 상처 입히고 힘들게 한자들을 쉽게 용서하고 받아들이기란 쉽지가 않다. 그들조차도 사람인지라 그들 나름대로의 힘든 일이 있고 근심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보면 안쓰럽다가도 나에게 한일들이 생각날 때면 그들을 내 마음에서 마음대로 정죄하며 또다시 벌을 주는 것이다. 분명 사랑은 이러한 모습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악에 대한 2가지 반응

하나는, 남을 탓하는 문화를 만들어 악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항상 다른 사람의 잘못이고, 사회의 잘못이고, 정부의 잘못이며, 자신은 무고한 희생자라고 여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악을 자신에게 투사하여 모든 일에 대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다른 모든 사람을 탓하는 문화와 자신을 탓하는 문화는 둘 다 악의 문제에 대해 미숙하고 부적절한 반응이며 이것이 현재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악의 문제이다


천국은 죄와 악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하수종말 처리장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있는 분리수거를 잘하는 일에서부터 천국을 경험해야한다.“ (톰 라이트)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요한복음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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