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길이 위대함을 만든다 [사무엘상 23장4장]
꿈의교회 김학중 목사
인생은 항상 선택 앞에 서 있다
매일 점심때가 되면 식사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매일 가던 식당으로 갈 것인가? 새로운 음식을 찾아 도전할 것인가? 학생들은 대학과 전공은 무엇을 할 것인가? 직업은? 이 직장이 나에게 맞는가? 바꿔야 하는가? 결혼에 있어서 이 사람인가 저 사람인가? 안정을 택할 것인가? 지금 마음이 더 가는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항상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종종 잘한 선택도 있지만 잘못했던 선택 때문에 후회하기도 합니다. 만일 내가 대학 입시 때 전공을 바꿨다면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내가 지금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선택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선택들 앞에서 우리는 항상 고민하고 힘들어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한 다윗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의 일을 하다
다윗은 광야의 아둘람 굴에서 낮아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세력을 만들 수 없었고 돈을 벌 수 있는 도시나 요새도 갈 수 없었습니다. 남은 곳은 아무도 가지 않는 버려진 광야의 굴 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따뜻하게 쉴 집도 안식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에게 남자만 4백 명 가족까지 합치면 천명이 능히 넘어갈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아둘람 굴은 엉망이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울고, 일상용품이 부족해서 구한다고 난리였을 것입니다.
집이 없어서 나뭇가지 잘라다 지붕만 만들고 그 아래 떨면서 밤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원래 곳간이 차야 인심이 나는 법인데 곳간은커녕 음식도 부족하니 얼마나 서로 각박했겠습니까? 다툼이 끊이질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소리들을 들으면서 다윗은 얼마나 머리가 아팠겠습니까? 그는 조용히 숨어있다, 사울의 분노가 사라지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뭐 있다고 몰려와서 이렇게 소란스럽게 만드냔 말입니다. 잘못하면 사울이 여기를 눈치 채고 찾아와 죽일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거기다가 부담스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일라”라는 곳이 큰 환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힘들게 농사지은 것들을 노략민족인 블레셋이 침탈하였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이것을 막고 보호해야 하는 임무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왕에게 있습니다. 왕은 적을 막고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라고 왕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이런 비극이 자기 땅에서 일어났는데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전쟁 나가면 자신이 패배하고 질 것이 두려워서 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일라 사람들만 억울하고 분노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고난의 이야기를 다윗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 소문을 듣자마자 마음에 큰 부담이 생겼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백성이 약탈당하고 고난 받는다니, 고난 받는 백성이 도움 받지 못하고 버려졌다니...” 그는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마음뿐입니다.
지금 다윗은 자기의 앞가림만 해도 바쁘고 힘든 사람입니다. 지금 내 코가 석자인데 어떻게 남을 도웁니까? 왕이나 군인이 할 일이지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환경이 안 되고 도울 수 없는 이유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다윗에 대한 큰 시험과 축복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선택에 따라 그의 일생이 달라졌습니다.
만일 그가 자기 형편을 생각해서 그일라 사람들 돕지 않았다면 그는 그냥 광야의 굴 하나를 차지한 사람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잘되었다면 사울과 화해하고 다시 신하가 되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다른 선택을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선택을 합니다. 자신도 어렵고 형편도 안 되지만 그일라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조금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왕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아니었지만, 이미 왕이 된 것처럼 왕의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했지만 이미 왕이었습니다. 그는 왕궁이 없었지만 왕관도 없었지만 진짜 왕보다 더 왕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후일 진짜 왕이 됩니다. 그가 믿음으로 행한 힘든 선택이 왕이 되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다
다윗이 자신의 인생의 큰 결정을 앞에 두고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나의 선택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알기 원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소리를 지시를 받는 것이 기도입니다.
다윗은 가난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했지만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익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는 비전과 거룩함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비록 다윗에게는 지금 남을 도울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었습니다. 병력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자기 한 몸 다스리기에도 바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준으로 행동합니다.
그 근거가 기도입니다. 다윗과 같은 기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는 나의 소원을 아뢰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나의 성공 나의 이익을 바라지만 하나님께 큰 뜻을 여쭈는 것입니다. 만일 나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과 다르다면 나의 계획을 꺾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은 적고 하나님의 이익이 더 크다면 내가 손해 봐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극대화하십니다.
죽이는 자 살리는 자
해방된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과 함께 축제를 벌이는데 두려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서, 군인들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아니 자기 백성 그일라 사람들이 고통 받을 때는 오지도 않더니 자기의 권력을 위해서는 군인들을 이끌고 와서 자기 백성을 괴롭힙니다.
자기 백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두려움으로 괴롭힙니다. 사울의 잔인함과 폭력 때문에 결국 그일라 사람들 가운데 이런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을 잡아서 바치자 그러면 우리를 살려줄 것이다.” 다윗이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일라 사람들은 원수로 갚습니다. 사실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하지 않았던 일을 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많은 자기 군인들이 상하고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그일라에서 도망해야 했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또 다른 배신이 닥쳤습니다.
“십”이라는 지방의 사람들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9-20절을 보면,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사무엘상 23:19-20)
민족을 사랑하는 다윗의 마음을 모르고 자기들의 이익에 눈이 먼 십 사람들은 다윗을 팔아먹습니다. 이 일들을 보며 다윗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요? 둘러보니 모두 적입니다. 모두 다윗을 죽이려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원수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환경과 조건을 보고 행동합니다. 도울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을 때 돕습니다. 내가 잘 살아야 그때서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조건이 안 되고 상황이 안 되지만 행동함으로써 왕으로서의 조건을 달성합니다. 진짜 왕도 하지 않던 일을 함으로서 차기 왕으로서의 자격을 보여줍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이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기도를 통해 항상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묻습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얼 원하시는가? 그것을 묻고 따라갈 때, 우리는 조건과 환경을 넘어서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 죽이려는 세상 속에서 살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다윗과 같이 환경과 조건을 넘어서는 성도가 되십시오. 다윗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다윗과 같이 비난보다 격려로 살리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