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나의 따뜻한 밥상]
“열매를 팔지 않는 상점”
새로 생긴 상점을 발견한 여인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상점 주인은 따뜻한 얼굴로 여인을 맞았습니다. 여인도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여기선 무얼 팔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엉뚱하게도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팝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당황한 여인은 잠시 생각 끝에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의 평화와 사랑, 행복, 지혜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주세요"
이번에는 주인이 입을 꾹 다물고 손을 턱으로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찾으시는 걸 드릴 수 없겠군요. 부인, 이 가게에서는 열매는 팔지 않습니다.
"오직 씨앗만을 팔지요"
씨앗의 비밀?
상점 주인과 여인의 대화에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참으로 크다 할 수 있겠다. 순간 여인의 욕심이 발동한, 끝없는 욕망의 난제 앞에 명쾌하게 답을 내리는 “씨앗”의 비밀은 각자 개인의 주어진 상태에 따라 풀어 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흔히들 욕심은 본능적이며 감각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한다. 그 끝이 없는 욕심으로 인해 인간은 행복해지기도 하지만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불행한 결말을 자초하는 경우도 많다. 물질에 대한 욕심, 명예와 허영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 그 절제되지 않는 무한대의 욕심은 우리를 무너지게 할 뿐 아니라 주변의 가족과 이웃들에게 근심거리를 제공할 뿐 아무 유익이 없다.
욕심은 행복한 삶에 큰 멍에!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놀부와 흥부이야기, 금도끼와 은도끼 모두 인간의 지나친 욕심에 기인한 상징적인 교훈들이다. 한글사전에 욕심의 한자를 보면 ‘慾(욕)’자는 바랄 욕(欲)자 아래에 마음 심(心)자가 있는 형태이다. 따라서 욕심이란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 얻고자 하는 마음을 뜻한다. 그런데 욕심은 단순한 바람과 뜻이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욕심은 소유의 개념이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바람은 꼭 그렇지는 않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말은 자연스럽지만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하는 욕심’이라는 말은 어색하다. 반면 ‘더 많은 돈을 모으려는 욕심’이라는 표현은 의미상 어색함이 없다. 또한 욕심에는 갖기 힘든 것을 갖고자 하는 마음, 혹은 약간은 과한 바람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욕심을 부리다’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욕심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다. 여기서 욕심이란 일시적인, 즉 물질적인 욕망을 채움으로써 얻어지는 쾌락을 바라는 마음이다. 기독교에서는 욕심(욕망)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죄가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인간의 욕심은 모든 죄악의 원천이며 평화롭고 행복한 삶에 큰 멍에라고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길을 열어 주지 않으실까?
그러면 왜? 하나님은 처음부터 길을 열어 주시지 않을까?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어떠한 형편과 사정에서도 그 분을 끝까지 신뢰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다.
간혹 우리는 극심한 재정난으로 소생할 길이 없이 낙망 할 때나 다른 여러 가지 직장, 가족, 부부간의 불화, 자녀의 비행, 무너진 대인관계, 우울증, 언어폭력, 교회안의 문제들 이러한 절박한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다릴 때가 있는데, 그때 그분은 아무런 변화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다만 침묵하신다. 그리고 근심과 불안에 쌓여있는 우리의 답답한 현실에게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약속을 붙잡고 끝까지 인내하라고 하신다.
즉 우리 삶의 절실하고 절박한 상황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분을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즉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온다는 믿음이 변치 않는 것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 없이는 진정한 평안이 불가능하다.
매일 마음의 평화와 사랑, 행복, 지혜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로운 평안함, 이 의미는 모든 좋은 날들과 모든 나쁜 날들을 의미한다. 즉 고통과 불안과 시험과 의심의 날들인데 우리의 삶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약속을 인내하며 따라가면 항상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평안을 위장한 마음의 무아지경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는 현재 동양사상, 요가, 마음수련 등으로 다이어트와 웰빙 시대의 한 가운데로 태풍의 눈에 빨려가는 것처럼 정신없이 질주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60세에 환갑을 축하하는데 지금은 70세~80세가 넘어도 넘치는 기운을 주체 할 수 없어서 큰 고민거리가 되는 100세 시대가 되었다.
또한 인간의 두뇌발전에 걸맞게 모든 기계들은 채 몇 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엎그레이드 되었다는 명목아래 더 빠르고, 더 편리한 모델로 출시한다. 그리고 거리마다 흔하게 보이던 미국 전통음식점은 줄어들고 그곳에 월남국수집, 타이 음식점 그리고 200~300가짓수를 자랑하는 중국식 뷔페가 요란하게 자리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로 포장한 이방종교인 카톨릭(마리아숭배 사상)의 인기몰이.... 그들 모두가 몸과 마음의 평안을 준다고 자랑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평안과 행복이며 더 나은 삶의 연속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평안이 아니며 현실의 참담한 고통과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비켜가는 무아지경으로 자신을 내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번도 그렇게 위장된 평안을 주신 적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매일... 마음의 평화와 사랑, 행복, 지혜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로운 평안함을 주시는데, 매일, 매일의 모든 좋은 날들과 모든 나쁜 날들을 의미한다.
즉 고통과 불안과 시험과 의심의 날들인데 우리의 삶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약속을 인내하며 따라가면 항상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 속사람으로 부터 흘러넘치는 충만한 기쁨과 행복, 평안(샬롬)을 주신다. 그 평안은 언제나 흐르고 신선하며 끊임없이 소생시키는 강 같은 평강을 주신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우리가 마음에 평안이 사라지는 이유는 내가 주체가 되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내일 일에 오늘 염려하지 말고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왔으나, 성경은 염려할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내일이라는 시간이 염려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일이라는 시간적 개념에 우리의 촛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염려는 오늘까지, 내일 염려는 내일되면 염려해야하는 것처럼, 또 우리는 염려를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날그날의 염려만 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하면서 살라고 하지 않으신다. 아니 믿음을 가진 신앙인으로 염려하며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우리가 어찌 염려하면서 살 수 있겠는가? 그것도 염려를 하되 그날그날의 염려만하라는 말씀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일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역이다. 내일은 내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겨 버리자! 우리의 내일은 내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염려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오늘을 기뻐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며, 신나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멋지게, 아름답게, 하나님의 기쁨으로 사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만약 내일을 염려하면 오늘을 도둑맞는다. 내일을 염려하면 우리의 오늘을 빼앗긴다. 내일의 염려는 오늘을 빼앗아가는 도적이다. 자! 이것은 지금 당장 시험을 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인데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불행 즉 내 몸에 암이? 교통사고? 도둑? 사업? 배우자의 탈선? 부부싸움? 자녀의 탈선? 등등 잠시 시험적으로 내일을 염려해 보라. 그리고 나서 마음을 들여다보라! 잠시 전까지만 해도 마음 가득 머물던 평안과 행복이 사라진 것을 발견할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감사와 평안…. 그 많던 행복이 다 사라지고 그 자리를 근심과 걱정이 대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빨갛고 노랗게 대지를 물들이며 단풍드는 이 가을, 내 욕심 때문에 남을 힘들게 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요한복음 14장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