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유감”
류호준 교수
어느 날 나는 “설교”라는 용어가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반복되는 잔소리를 하면 “이제 그만 설교 하세요!”라고 핀잔을 줍니다. 일반 신자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때는 그냥 지나치곤 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 자신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런 말을 내 뱉을 땐 이만 저만한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설교가 잔소리로 전락하였단 말입니까? 게다가 현대는 설교 홍수시대가 되었습니다. 각종 방송 매체를 통해 24시간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시간과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고도 수많은 설교를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설교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반신자들은 물론 설교자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매우 유감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의 목회자들은 일주일에도 수없는 설교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주일뿐 아니라 수요일, 금요일, 새벽기도회, 각종 예배시의 설교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들은 엄청난 설교 부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설교에 대한 두려움과 신선함, 진지함과 경건한 부담감은 진부함, 매너리즘, 영혼 없는 되 내임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교인들 역시 설교란 언제나 쉴 세 없이 목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정화된 종교적 훈계 정도로 제처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가는 중요한 이유는 절실한 생명의 양식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은 더 이상 거룩한 거지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교회에 가는 것은 무료한 습관이거나 아니면 교회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설교를 통한 삶의 변화는 기대할 수 없을 만큼 교회의 영적 분위기는 건조해지고 각박해져 갑니다. 영적 사막화 현상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가 다시 회생하고 새로운 영적 동력을 얻기 위해선 강단의 회복운동이 있어야만하고, 그것을 위해 목회자들은 그들의 평생 사명인 설교하는 일에 대한 안목과 헌신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신학을 가르쳐온 선생으로서, 또한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온 목사로서 나는 모든 신학훈련의 절정은 궁극적으로 설교하는 일에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설교는 모든 신학분과의 면류관입니다. 성경은 언제 어디서고 설교되어야할 본문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과 설교는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위대한 설교자는 성경에 통달해야하고, 성경을 통달하기 위해선 올바른 성경해석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위대한 설교자는 설교가 전해지는 청중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일명 청중이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높이를 맞추어 복음을 알기 쉽고 적응 가능하도록 만들어야할 책임이 설교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설교자는 누구보다 성령의 이끌림을 확신하고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설교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의 개입을 사모해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사람의 심장 속으로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고, 사람의 심장과 마음을 아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듣는 사람들 역시 성령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면서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전달하는 택배기사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의 마음의 주소지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배달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분을 통하여 청중들은 구원자를 소개받게 되고, 그것이 그들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설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를 잘하려는 강박감에서 벗어나 삼위일체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도와 드리는 종의 심정으로 강단에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 유감(有感)이었습니다.
[미국 테네시주의 스모키 마운틴의 가을 단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