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알아두면 좋은 성경용어 풀이 28
안 식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국어사전에 따르면 안식(安息)이란 평안히 쉬는 것이다. 평안이란 아무 걱정이나 탈이 없음을 말한다. 쉰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상태이다. 물론 이는 게을러서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것이 아니라 피로를 풀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평안히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전적 의미로서의 안식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성경이 구원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면 성경 전체의 흐름상 안식은 단순히 마음을 평안히 가지고 육체적인 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안식의 본질은 해방이다
1. 쉰다는 것의 어원의 기본은 그만 두거나 멈추는 것이다. 안식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곳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되는 날에 안식하셨다이다. 여기에서의 안식은 해야 할 일을 완전히 마치시고 만족을 나타내신 표현이다.
당연히 창조의 일을 멈추셨지만 계속해서 창조된 세상을 돌보시는 일은 하신다. 그런데 성경은 구원의 책이다. 당연히 창조 이야기도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안식도 구원과 연관되어 있다. 이 안식은 인간이 타락하고 난 후 수고하는 삶과 비교된다. 고통과 땀이 동반되는 수고이다.
물론 고통과 땀을 흘린 대가가 기쁨으로 나타난다면 그 수고로움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수고의 대가가 불행과 아무 것도 어는 것이 없다면 그 수고는 인생의 짐일 뿐이다. 대가없는 수고, 그러나 그 수고 없이는 살 수 없는 삶의 여정과 대비하여 안식이 말하여진다면 이 안식은 그 수고로운 삶에서의 해방이다. 그 수고의 마침이 있고 그 수고의 결과가 만족스런 기쁨으로 나타난다.
탈없이 마쳐진 그리고 더 이상 걱정할 필요없이 쉬게되는 안식이 밀려온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무거운 짐을 가는 수고로움의 인생에게 예수님이 약속하시는 쉼은 바로 이런 안식이다. 그것은 수고로움에서의 해방이다. 그래서 창세기 2:3에서는 참된 안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선언한다.
2. 안식일에 관련해서 성경에서 처음 등장한 장소는 출애굽기 16장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만나 양식을 공급받는다. 이때 일곱째 날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신다. 그리고 모세는 십계명을 받고 정식으로 안식일이 법으로 제정된다. 이 안식일은 자유인(주인)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위해 모든 종들도 심지어 가축까지도 쉬게 해야 하도록 하는 강제하는 법이다.
종으로서는 이 날만 만큼은 일에서 해방되는 기쁨의 날이다. 그런데 이 안식의 법은 단순히 일에서의 해방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진행된다. 그것이 희년이다. 7일마다 안식일이, 7년마다 안식년(이때는 땅을 쉬게 해준다), 그리고 7년의 7년 그 다음해 곧 50년째마다 희년을 지키라고 명한다. 희년이란 기쁨의 해란 의미로 이때는 모든 종들이 종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고 땅도 원래 주인에게 돌려지는 해이다. 이렇게 안식은 매어있는 그래서 자유롭지 못한 신분에서의 해방과 관련된다.
3. 예수님은 이를 누가복음 4장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해방의 날 희년을 거론하신다. 예수님의 오심은 포로된 자를, 눌린 자를 해방시키고, 눈먼 자를 보게 하는 일과 연관됨을 이야기하신다. 다시 말해 해방이다. 자신들을 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에서의 해방이다.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이다.
예수님은 이 무거운 죄의 짐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주시기 위해 오셨음을 선포하신다. 인간은 쉼을 얻게 된다. 안식이다. 인간이 죄에 끌려 다니는 삶에서의 해방이다. 수고의 대가가 죽음이 아닌 생명이다. 기쁨이다. 마음이 시원케 된다. 쉼이라는 의미가 고린도전서 16:18에서는 시원케 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안식은 새로움과 연관된다
마태복음 11:28에 사용되고 있는 쉼이란 단어는 단순히 일을 그만둔다는 의미를 넘어 소생시키다 또는 새롭게 하다의 의미로 사용된다.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것을 말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었기에 이제는 새로움 삶의 힘을 얻는 것이다.
왜 쉬는가? 그것은 다음의 일을 위해 충전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 노는 것과 쉬는 것은 다르다. 성경에서 안식을 이야기 할 때는 이렇게 새로움과 마주하게 한다. 안식일에는 자신의 일을 쉼에서 새로움의 일 곧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종에서 해방된 자는 자유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만나게 된다. 죄에서 해방된 인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삶과 만나게 된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땅을 가지고 자유롭게 자신의 일을 갖게 될 기쁨과 만난다.
새로움의 기대가 없다면 그 쉼은 불안하게 된다.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하루를 쉰다. 그 쉼을 통해 내일 또 다시 일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런데 내일 할 일이 없어지면 그 쉼은 좌불안석이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지겨워 그만 두고 잠시 쉬고 새롭게 주어진 다른 직장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 쉼은 얼마나 달콤하겠는가? 그런데 지겨운 일을 그만 두었는데 일자리가 없다면 그 쉼은 바로 불안과 걱정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종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는데 무엇을 하고 살라야 할지 모르게 되면 다시 종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안식은 언제나 새로움과 연관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어 예수님과 함께하는 가볍고 쉬운 새로운 멍에를 진다. 새로움의 충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에서 해방되고 이제는 더 이상 죄의 종으로써 삶이 아닌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세상을 향해 달려가던 마음으로 바빴던 삶이 하나님을 향해 기쁨으로 나아가는 삶의 새로움이 생긴 것이다.
안식일은 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 있다
하나님이 구약에서 하셨던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셨다. 안식일도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되심을 선언하신다. 이제는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되시는 예수님이 직접 기념하라는 명령은 오직 이것 뿐이다.
오직 예수님의 죽음만이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부활 하셨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를 충실히 지켰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에 함께 모였다.
그날을 주님이 부활하신 날 곧 주의 날(주일)에 모였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매 주일날에 기념했다. 안식의 참 의미가 주일로 집약되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은 안식 후 첫 날이었다. 기독교인은 일요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되신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의 날 주일을 지키는 것이다.
날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의 의미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를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이다. 토요일을 지키고 싶다면 그리하라. 그러나 날을 꼭 이야기한다면 안식을 온전히 이룬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님의 날 주일이 가지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는 십계명에서 말씀하고 있는 안식일을 오히려 더 견고하게 그리고 더 온전히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 주에는 주일에 대하여 쓰고자 한다.
예승장로교회 김성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