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나의 따뜻한 밥상]
“측은지심”
맹자가 제나라에 머무를 때 제나라는 새로 종을 만들었는데, 종에 소의 피를 뿌리는 흔종 제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나라 선왕은 관리들이 희생양 소를 이끌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양으로 바꾸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은 소가 부르르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가여워 양으로 바꿨지만, 백성들은 왕이 소 한 마리를 아까워해서 구차하게 양으로 바꾼 것이라고 흉을 봤습니다. 제선왕은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답답한 지경이었습니다. 맹자가 한마디 질문을 던지며 왕의 마음을 풀어 주었습니다.
[맹자] “왕은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여긴 것을 이상하다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었으니, 저들이 어찌 그 마음을 알겠습니까? 왕께서 만약 그 소가 죄 없이 도살장으로 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와 양을 어째서 가리셨습니까?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이나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이나 불쌍하기는 매한가지인데, 제선왕은 소가 끌려가는 것만 보았을 뿐 양이 끌려가는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소를 양으로 바꾸는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측은지심
맹자의(공손추편)에 나오는 (측은지심)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 연민을 갖는 인간의 네 가지 본성 중의 하나인 (인)의 핵심이 된다고 한다. 만약 불행을 당한 이웃을 보고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측은지심)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원초적 도리요 고유한 본연성이라고 한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의 까닭은 이러하다.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다 놀라고 불쌍한 마음을 가진다.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 함도 아니며, 마을 사람들과 벗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하여 그러는 까닭도 아니며, 그 원성을 듣기 싫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맹자는 사람들은 다 차마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앞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다. 즉, 어린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두려워 근심하고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 반드시 달려가 구하려고 하는데, 이는 사람에게 차마 돌아서자 못하고 손을 내미는 근본 마음이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측은지심”이 곧바로 사랑, 자비, 어짐은 아니다. “측은지심”은 어려움에 처하거나 고통 받고 있는 생명체에 대한 계산 없는 순수한 마음이다. 불쌍한 마음이 발동하여 고통이나 슬픔을 경감시켜주려는 어떤 행위이며 도덕적 칭찬이나, 현재나 미래의 보상과는 전혀 관계없는 순수행위일 뿐이다.
선한사마리아인
신약성경(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있다. 어떤 사람이 강도의 기습을 당해 쓰러져 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각각 그 길을 지나다 쓰러진 사람을 피해 급히 달아났다. 그러나 어느 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10:33) 자기 나귀에 태워 마을로 데려가 정성껏 치료하고 돌봐 주며 자신이 다시 돌아 올 때까지 드는 경비까지 지불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구한 동기인데 성경은 단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는 표현뿐이다. 성경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의도적으로 사용된 단어가 있는데 바로 “본다”라는 동사이며 헬라 어로는 (호라우=눈으로 본다)를 세 번 반복하고 있다. (눅10장 31-33)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본 그 순간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며 자기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대로 강도 만난 자를 보는 즉각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났고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즉 그는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에도 붙잡히지 않고 오직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에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당한 것으로 보아 쓰러진 사람은 유대인이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과는 민족적, 종교적인 원수지간이지 않는가? 따라서 선한 사마리아인이야말로 측은지심의 본성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긴 장본인이다. 예수님은 그 비유를 마무리하시며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눅 10:37)고 하셨다.
성경의 증언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의 성격은 “긍휼히 여기심”이라고 한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측은히 여기는 사람의 본성인 마음”과 하나님의 신적 중심에 “긍휼이 여기시는 마음”이 존재한다.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5장1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믿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향하여 자비의 마음이 솟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을수록 우리 안에서는 자비의 열매가 더 풍성하게 될 것인데 이런 자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자비심은 고통 받는 자를 목격할 때 자연스럽게 솟아난다. 그래서 눈을 들어 이웃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강도 만나 반쯤 죽게 된 이를 ”보고 피하여 지나간“ 제사장, 레위인과 대조적으로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다가가 구한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로 들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완성하는 것은 종교적 형식이나 정결이 아닌 자비로운 마음으로 고통에 참여하는 인간애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주변에 고통을 당하는 불신자들을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 주장하며 “자비로운 하나님”을 “잔혹한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는 이름뿐인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인간의 유한한 지성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고통의 원인을 자기들은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그들의 오만이 기독교를 하락 시킬 때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 이라면 이웃들이 겪는 고통의 원인을 따져가며 분석하기 보다는, 모르는 그대로 자기 것으로 아파하며 흘릴 때, 그 눈물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보는 눈”을 더욱 맑게 할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철학이나 사상으로 후대에 감명을 주는 교훈일지라도 ‘만약 어느 한쪽의 눈물은 알면서 반대쪽의 눈물은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는 소가 슬퍼하는 것은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다를 것이 없다.
[누가복음 10장25절]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복음 10장 33~37절]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