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알아두면 좋은 성경용어 풀이 31
영 성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 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 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로새서 2:6-8)
성경은 인간에게 구원받는 길을 계시해 놓은 책이다. 창조이야기 역시 구원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하시기 전의 세상은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이었다고 창세기 1:2은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전의 인간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한 인간의 특징 중 하나가 혼돈이다. 이러한 혼돈의 하나가 용어의 혼돈이다.
새로운 용어들의 등장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믿음을 혼돈하게 만든다. 남을 위한 기도라는 정의는 가지고 있되 단어 자체가 가지는 의미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의의 중재자가 되고자 하는 중보기도라는 용어, 단순히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의미의 기도를 내적 기도라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 자행되는 관상 기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의도 분명치 않은 영성이라는 용어가 그것이다.
영성(spirituality)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이다.
성경에는 영(spirit), 영적(spiritual)이라는 용어는 등장하나 영성(spirituality)라는 영어는 사용된 적이 없다. 단지 신학상의 용어로 하나님의 속성을 다룰 때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영어로 spirituality이고 이를 번역하여 영성(靈性)이라고 하였다. 이는“하나님은 영이시다”(요한복음 4:24)라는 데에서 나온 신학적으로 만들어진 용어로 인격적인 영의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을 말할 때 쓰인 용어이다.
영어의 –ity는 형용사나 명사의 뒤에 붙여 상태나 성질 곧 속성을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인간을 나타내는 human에 접미사 –ity를 붙인 humanity는 인간이 가지는 총체적 속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인류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를 인간성이라고 번역하지 않는다. able(할 수 있는)에 –ity를 붙인 ability는 단순히 능력이라고 번역하지 능한 어떤 성질이라고 번역하지 않는다.
authority(권위)라는 용어 역시 이미 권위가 가지는 총체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어 단지 권위라고 번역한다. 그래서 영성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사용된 것이지 인간에게 사용되는 용어는 아니다.
물론 이 영성은 인간에게도 공유되는 성질로서의 속성이기는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물질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영의 존재로서의 속성을 지닌 하나님 성(deity, divinity)이라면, 인간은 물질적 부분에 영향을 받는 영적 존재이다. 인간은 순전한 영적 존재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ity란 접미사를 붙일 수 없다.
영성운동은 성경이 아닌 수도원제도에서 온 운동이다
수도원제도는 성경적 제도와는 거리가 멀다. 성경은 기독교인은 세상 안에 뿌려진 씨앗으로 설명하고 있다(마태복음 13장). 그래서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바로 감당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마태복음 5장). 그러나 세상과 더불어 살면 안된다(in the world but not with the world).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동시에 모든 민족에 대하여 복이 되라는 사명도 함께 받는다(창세기 12:1-3).
그는 바로 우상종교로 가득찬 가나안 땅 안에서 믿음을 키워나갔지 은둔된 장소에서 덕을 쌓아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어디에 은둔해서 인격적 수도나 금욕적 생활을 한 적이 없다. 단지 공생애를 앞두고 40일간 기도했을 뿐이다. 그 기도가 너무나 간절해서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건강과 관련된 금식이 아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하여 당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힐난을 받을 정도였다(마태복음 9:14). 예수님은 오직 교회를 세웠을 분이다.
초대 교회는 교회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교회는 자기 자신들 수도하고자 하는 곳이 아니다.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하며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세상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기독교인은 받은 것이다.
결코 수도원을 세워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해 은둔하라는 말씀은 없었다. 이는 힌두적 사고방식이다. 그들은 도를 깨닫기 위해 수도의 길을 걷는다. 인도의 힌두적 사상을 배경으로 등장한 불교는 은둔적 삶을 통해 수도하는 것을 장려한다. 수도원제도는 성경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수도원 주의가 만들어 낸 영성운동은 수덕(修德)과 신비에 정진하는 관상(觀相)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세 가지 단계를 가진다. 곧 정화의 단계, 조명의 단계 그리고 일치의 단계이다. 특히 마지막 단계의 일치의 단계는 신비주의의 요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비주의가 문제이다. 신비적이라는 말과 신비주의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신비적이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이라는 사실도 신비적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인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도 신비적이다. 그래서 신비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일컬을 때 사용한다. 그러나 신비주의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사상으로 아주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수도원주의가 신비주의적 사상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일이다. 수도원주의의 수덕주의도 문제가 된다. 셩경은 경건에 힘써서 기독교인의 덕 또는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따로 혼자 또는 수덕의 공동체를 만들어 은둔하는 삶을 영위하라는 명령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때로는 힘들더라도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하는 세상 밭을 도망치라는 이야기가 없다. 오히려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훈련을 훈련하라고 명한다.
물론 오늘날 기독교인의 덕에 문제가 있다. 인격의 수양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세상의 방식대로 은둔하면서 때로는 사막에 들어가서까지 훈련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들이 말하는 금식, 관상, 내적 기도, 수덕 훈련 그 어느 것도 성경과는 관계가 없다. 단지 인격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무엇인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수도원주의 운동까지 생각하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인간적 이해를 성경으로부터 우려먹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불가능하게 보이더라도 예수님이 세우신 유일한 교회를 통하여 이 문제를 극복해 가야 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내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영성의 본질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결코 인간의 속성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속성인 영성의 일부를 인간이 공유할 뿐이지 영성 자체는 아니다. 그리고 현재 퍼지고 있는 영성운동의 뿌리는 성경적 가르침과 관계없는 수도원주의 운동에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 주에는 왜 영성이라는 용어가 혼란인가를 다루게 될 것이다.
예승장로교회 김성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