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회란 말의 출발
예수께서는 단 한 번도 교회를 건축해라, 세워라, 설립해라 하신 적이 없다. 교회란 말은 신약에 와서 쓰여진 말인데,(구약에서는 성립될 수 없는 말), 이 말씀은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예수께서 최초로 쓰신 말이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교회 설립에 대한 것을 사람(베드로)에게 요구하신 말씀인가, 아니면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하신 말씀인가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사람이 세우는 것인가, 예수께서 세우신다고 하신 것인가를 분명히 이해를 해야 답을 찾을 수 있다. 본문을 주의 깊게 살피고 답을 말해야 한다. 교회란 말은 4복음서 전체에서 여기서와 다음 18장에서 언급하신 것 밖에는 없다.(다른 복음서에는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음) 그런데 이 말씀을 가지고 가톨릭과 개신교가 각각 다른 해석을 해서(베드로란 인격체) 카토릭구조가 만들어졌고, 개신교는 이 말씀의 해석을 16절의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듣고 하신 말씀이라고 해서 ‘고백위에 세운 교회’로 해석, 오늘의 개신교 형태가 만들어 졌다. 그럼 여기서 가톨릭의 해석이 옳은가, 개신교해석이 옳은가, 아니면 둘 다 잘못된 해석을 한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이 문제는 앞의 말씀(마16:18)을 놓고 독자가 직접 검토하고 판단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교회 설립 권’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이다. 베드로(사람)에게 위임된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인가를 지금 판단해야 한다. 분명히 본문은 예수께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말씀이다. 그런 것을 지금까지 사람들이 교회를 만들어 왔다. 얼마나 왜곡된 일인가? 그럼 예수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무엇일까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 예수님의 주권에서 이루어진 교회, 무엇을 말씀하신 것일까? 예수께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운다.’ 하신 말씀은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교회당교회가 아니고 이 말씀은 ‘내주의 언약’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해석해야 하느냐 하면 예수께서 지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내주(內住)의 언약’에 있기 때문이다. 내주의 언약이란 말은 ‘나는 네 안에 너는 내 안에’(요 15;7)란 말씀이란 것이다. 이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죄 사함을 위해서) 이 언약에 따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이루어 진 것이다. 다시 설명을 하면, 우리가 죄 아래 있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가 오셔서 십자가로 죄를 청산(청소)하시고 그리고 난 후에 오순절 성령(영의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의 몸에 임하신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성령으로 거듭났다, 혹은 ‘나는 네 안에 너는 내 안에’란 말씀이 성취 되어 우리 몸을 성령이 거하는 전(고전3:.16-17, 6;19)이라 말한 것이고, 이것을 교회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몸(엡 1;23)이 되고,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건이 우리의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주님(하나님)의 주권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란 점에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신 말씀이란 것이다. 이쯤이면 지금의 교회당교회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럼 지금의 교회당교회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져서 지금에 이른 것인가? 이 문제는 따로 설명을 해야 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로마교회가 될 때 사원(寺院)과 사제(지금의 신부) 제도 등을 도입하면서 만들어 진 것이 전통이 되어 온 것이다. 이것을 만든 사람들은 소피스트 출신 교부들이 중심되어 만든 것이다. 2) 예수님의 요구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동안 교회란 이름에 함몰되어서 그곳에서만 유영(遊泳)을 하면서 살아 왔었다. 그래서 우리는 진짜 예수께서 요구하신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고, 중세에서는 예수님이 요구하신 말씀을 왜곡시켜서 엉뚱한 짓들을 저질러 왔을 뿐, 2천년 기독교역사 속에서 무시되고, 유기되고, 감춰진 채 지나온 세월이었다. 그럼 예수가 요구하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의 나라’였다. 교회를 부탁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나라에 대해서는 복음서에서만 무려 100여 번에 가까이 언급하셨다. 심지어 죽음 문턱에서도(요18:36)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직전에서도(행1:3) 언급하신 것이 ‘그 나라였다. 중요대목 몇 군데만 추려보자. *너희는 ‘나라가 임하기 위해 기도해라’(소위, 주기도문)(마6:10)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마6:33) *그 나라는 너희에게 맡겨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한다.(눅22:29-30)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6) *그 분이 왕 되는 것을 싫어한 원수들의 음모(눅19:14)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않던 원수들의 형벌(눅19:27)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왕과 나라란 명칭은 당시에는 동일개념으로 써졌다는 걸 참고 해야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요한 계시록은 긴 구속사의 결론이고, 우리 믿는 자들의 믿음의 결론이 여기에 담겨 있다. 그 결론의 책의 결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계시록 20장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신앙의 결론이 왕국에 있는 것은 이 왕국을 거쳐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진입이 되기 때문이다. 자, 그럼 여기서 다시생각 해 보자, 교회는 예수님의 주권적 사역이고, 나라는 우리(사람)에게 부탁된 사역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수님의 뜻과는 정 반대되는 삶을 살아왔고, 도리어 예수님의 뜻에는 거부감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신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이 무엇인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궁극적 목적 아닌가? 그런데 아버지의 뜻과는 정 반대되는 삶을 살면서도 천국에는 간다? 이런 기막힌 넌 센스가 어디겠는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무조건 주여 주여만 찾는다고 천국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왜 있는 것인가? 제멋대로 믿는 거라면 성경이 있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지금은 21세기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21세기란 말은 7천년 째라는 말이다. 일곱째 날이 안식일이고, 이 날을 하나님의 날이라 했다. 그리고 7년째를 ‘안식년’이라 했는데, 그러면 7천년 째는 무슨 천년이 되는 셈인가? 안식 천년에 해당된 것이 지금 21세기이다. 계시록에 기록된 라오디게아 교회가 일곱 번째 교회로, 교회시대는 여기서 마감을 하면서 주께서 권면하신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계3:14-22) 결론을 내리자. 먼저 구할 것이 교회인가, 나라인가? 분명한 답을 해야 한다. |
우리는 앞에서 교회에 대해서도, 나라에 대해서도 개괄적인 검토를 했다. 예수님의 요구는 교회가 아니라 나라란 말도 해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나라란 말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것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며칠 전 후배목사를 만났는데, 그의 말이 크리스천의 80%이상이 ‘나라’란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대체 이해가 안 되었다. 왜 불신자들도 아니고, 크리스천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란 말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까?
왜 그럴까? 크리스천들이 모일 때 마다 주기도문이라 하면서 ‘나라에 임하 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 지이다’고 수없이 암송하고, 고백의 기도를 하면서 왜 나라란 말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고 계시는가?
왜 그런가의 답은 먼저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전통적 유전에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가, 부터 검토를 해야 한다. 지금 나(개인)의 신앙이 유전에 근거된 신앙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된 신앙인가 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당신 자신도 어쩌면 쉽게 대답을 못할 것이다. 더구나 ‘나라’에 대한 말씀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면 더 그럴 것이다.
복음을 담는 그릇(형태)이 교회가 아니고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거부감을 갖는 80%이상 된 크리스천들이라면, 이분들은 성경에 근거된 신앙이 아니고 전통적 유전에 근거된 신앙인이라고 판단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유전에 근거된 신앙으로서는 구원이 보장되지 않는다는데 심각함이 있다.
지금 크리스천들이 나라란 말에 거부감을 갖는 것은 몇 가지 요인들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중세시대의 Christendom(기독교제국주의) 사고(思考)가 물려준 영향 때문이다. Christendom사고에서 세계를 정복하려했고,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웅장한 사원 건립에 몰입했고, 순수한 성서운동을 허용하지 안 했으며, 종교재판, 추방, 투옥, 재산 몰수, 화형 등 교권이 폭력적으로 남용 되었었다.
여기에 신물이 나서 일어난 운동이 종교개혁 운동이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정종 분리 원칙’이란 슬로건을 내 걸고 개혁운동을 벌려 대성을 이뤄, 개혁교회를 탄생시켰다. 이런 배경을 갖고 만들어진 개혁교회이다 보니 중세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世代)사람들까지도 ‘나라’란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 나라’를 말한 것은 성경이고,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전통적 유전이 물려준 사고의 탓이다. 그 나라를 요구한 것은 예수님이고, 정종 분리를 주장한 것은 중세 종교개혁 자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이고, 개혁자들의 말은 사람들의 유전이다.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 것인가? 예수인가, 개혁자들인가? 당신은 예수의 제자인가, 개혁자들의 제자인가? 지금은 분명히 입장을 밝혀야 한다.
예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지만(요18:36) 유대인들은 예수가 말한 나라의 성격 같은 것은 처음부터 따져보지도 않고, 나라란 말만 앞세워 세속나라로 취급 로마 가이사(황제)의 반역자로 몰아 빌라도에게 고발, 예수를 십자가에 달게 했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달게 했던 유대인들의 혼령이 지금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전승 되어 ‘나라’란 말에 이를 갈면서 거부를 한다.
하지만 이들을 두고 계시록에 와서는 예수께서는 ‘사탄의 회’라고 규정을 했다.(계2:9) 지금도 여전히 ‘그 나라’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라면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한다. 본인은 의식을 못할지라도 ‘사탄의 회’에 속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거부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앞에서 인용한 누가가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원치 않는 자들이라면 분명히 예수의 원수가 된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