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가르치지 말고
수일 전 글을 써서 함께 공유하고자 지인들에게 홍보하였다. 그 중에 어떤 분이 댓글로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 그리고 앞으로 글을 보내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가르치는 자가 범하기 쉬운 것은 가르친 대로 자기는 살지 못하기 때문에 던진 말이라고 대꾸하는 표현으로 들려졌다. 요즈음 종교지도자들이 사회적으로 덕스럽지 못한 일들로 마음과 생각에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교회당 문화 속에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본이 되는 생활을 해야 할 지도자가 범하기 쉬운 것은 말과 삶이 다르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 수많은 직업들이 있다. 그 중에 가르치는 자를 가르켜 선생이라고 한다. 선생들은 가르치는 직업 중에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일평생 잊지 못할 분들 중에 선생님들이다. 특히 국민 학교 때 선생님은 나에게 굉장한 존재였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서 수많은 선생님들이 교실에서 가르쳐주신 학문적인 세상지식 덕분에 오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생존경쟁사회에서 직장이라는 직업전선에서 충실히 임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배움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학문을 터득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어떤 모습으로 삶을 유지해 나갈 것인가? 가르치는 직업 중에 종교적인 면에서도 존경을 받는 성직자들도 있다. 일반학교 선생님들은 거의 같은 년령을 대상으로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년령에는 관계가 없다. 어린아이로부터 나이 많으신 어른들을 상대로 가르치는 입장에 있다. 물론 교과서라고 할 때는 일반학교 선생들에게는 전공과목을 배운대로 전수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세상 지식보다 마음과 영적면에 비중이 강한 책을 가지고 가르쳐야 하는데 년령에 따라서 전달하는 방법과 설명의 내용들이 다양하다.
문제는 무엇인가? 선생의 입장에서 가르치는 목적이 무엇인가? 세상지식의 과정을 거쳐서 사회인으로 나아가할 프로세스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치는 목적은 바른 생활과 마음가짐의 상태와 내세에 대한 영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런데 가르치는 선생보다 배우는 학생들 중에 지능이 높고 똑똑한 학생들도 있다. 아무리 똑똑하고 지능이 높고 아이큐가 높아도 역시 학생이라는 위치는 바꾸어 놓을 수 없다.
가장 유능한 선생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닌가. 그 다음에 글을 가르쳐주는 선생들이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로서 선생은 지식만 아니기 때문에 다른 면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유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의 생각과 삶의 목적에 대해서만 아니라 영원의 세계를 위한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더 강하게 가르친다.
그래서 일반선생님들보다 영적 면으로 가르치는 종교지도자들을 더 존중하고 존경하게 된다. 정치가들도 경제인들도 세상 모든 지식인들도 종교지도자들에게만은 겸손하게 대하기도 한다. 물론 지식의 세계를 통해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가지는 직업 중에 종교지도자에 대한 꿈을 가지고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師) 사(士) 사(思)라는 한자의 뜻이 다르다. 스승사자냐? 선비사자냐? 생각사자냐? 에 따라서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다르다.
스승을 다른 표현으로 선생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도 선생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다른 용어로 접장이라고도 하였다. 어학사전에서'접장‘(接長)이란 뜻은 ‘교원’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1)스승님들을 선생(先生)이라고 표현한다. 위키백과 사전에서 "선생은 학문적으로나 덕망이 높은 사람, 혹은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위치의 사람, 학예가 뛰어난 사람, 각 관청과 관아(官衙)의 전임자를 가리키던 일종의 존칭 또는 경칭으로 고대사회부터 근대사회의 호칭이었다. 선생이라는 단어는 보통 연장자에게 쓰였으나 중국은 당나라 이후, 한국은 성리학이 전파된 고려시대 이후 나이가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더라도 학덕이 높은 사람에게는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 불렀다. 또한 중국과 한국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 하여 호(號)와 시호를 사용하였다.
교육자에 대해서도 선생이라는 호칭이 있었으나 그밖에 강사, 훈장 등으로도 불렀으며 근대 이후로는 교사로 부른다. 현대에 와서는 정치인에게도 쓰였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교사, 대학교의 교수, 학원의 강사 등에게도 폭넓게 쓰인다. 근현대에 와서는 전임자에게는 선생이라 하지 않고 선임 또는 전임자라 부르고 있다.
(2)선비는 한자어의 사(士)와 같은 뜻을 갖는다. 어원적으로 보면 우리말에서 선비는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선’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그리고 선비의 인격적 조건은 생명에 대한 욕망도 초월할 만큼 궁극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공자는 “뜻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 하였다.
선비는 한평생 학업이 중단되는 일이 없겠지만, 특히 가정에서 받는 교육과 함께 밖으로 스승을 찾아가서 오랜 기간 동안 교육을 받는 사실은 선비가 타고난 신분으로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수련으로 형성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선비는 독서인(讀書人)이요 학자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선비가 배우는 학문의 범위는 정해진 것이 아니지만, 그 근본은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일의 마땅한 도리를 확인하고 실천하였다. 유교의 학문은 일상의 비근한 데에서 출발하지만 지극한 데에 이르면 인간 심성의 이치와 하늘의 명령에 관한 고매한 것을 포함하였다. 선비는 학문을 통해 지식의 양적·축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를 확신하고 실천하는 인격적 성취에 목표를 두었다. 선비가 공부하는 대상으로서의 경전은 선비가 지향할 대상인 성인과 현인의 말씀을 간직하였다는 것이라고 백과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다.
(3)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사상가 파스칼이 인간을 '비유하여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에게 생각이 많고 생각의 내용들이 다르다. 왜 그렇게도 생각이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대개는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이것을 불교에서 망념(妄念) 즉 잘못된 '생각' 미혹한 생존을 일으키는 근본작용. 마음이 허망한 것을 모르고 일어나는 '생각'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어떤 글에서 '생각'이 무엇인가? 라는 글을 읽었다. '생각'은 결론을 얻으려는 관념의 과정이라고 했다. '생각'을 사상(思想) 또는 사유(思惟)라고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각(知覺)이나 기억의 활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 어떻게 이해하고 또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헤아리는 활동을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는 작용으로서의 ‘사고(思考)’에 대해 생각된 내용을 ‘사상’이라고 표현 한다. '생각'을 의미하는 한자 ‘사(思)’자는 ‘밭 田과 마음 心’의 합성어다. 밭을 의미하는 ‘田’은 본래 인간의 숨골, 즉 ‘이성(理性)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마음(心)의 기초 위에 이성(田)이 작동되는 것이 사(思)인 것이고. '생각' 사(思)자를 보면 마음이 밑에 있고 그 위에 밭이 있다. '생각'도 '마음'을 기반으로 작동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머리로 판단하기 전에 가슴으로 먼저 느껴야 한다. 마음이 움직여야 감동(感動)이 다가오고. 감동해야 행동(行動)이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은 머리보다 마음을 뒤흔드는 사람이 아닐까?
행동은 '생각'의 꽃이며 기쁨과 고통은 그 열매라고 본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마음 밭(心田)에 뿌리고 가꾼 '생각'의 씨앗에 따라 달콤한 열매와 쓰디쓴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생각'이 빚어 놓은 산물들이 아닌가?. '생각'이 선(善)하면 모든 선이 따라 일어나고, '생각'이 악(惡)하면 모든 악이 이에 따라 일어날 것이다.
'가르치지 말고'라는 표현에 수일동안 생각하다가 이렇게 글로서 나 자신이 지금까지 가르치는 자로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던 것인가? 를 점검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게는 가르친다고 하는 내용과 함께 삶의 열매가 있었던가? 를 뒤돌아보며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결국 언행심사에 부끄러운 모습이 많았다. 나 뿐 만이 아니라 수많은 지도자들이 범하기 쉬운 것은 글과 말로 전달하는 도구만이 아니고 삶의 현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아름다운 향기 나는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고 살아 갈 것인가? 하는 큰 과제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다짐해 보게 되었다. 즉 세 가지 면에서 조심해야 할 내용이 있다면 이성문제요 그리고 물질문제요, 다른 하나는 명예문제라는 것이다. 이 세가지중에 걸려든 종교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신약성경 야고보서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는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