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가 굴러가게 하였다
사람이라면 모두가 감추어진 수치가 있다. 내용에 따라서 다르지만 사람들에게 수치라는 검은 점을 마음에 찍힌 대로 혹은 생각에 박힌 검은 점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한평생 비밀로 감추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 세계에만 있다. 짐승의 세계는 수치라는 것을 모르고 모습 그대로 살아가지만 유독 인간세계만은 윤리도덕이라는 테두리를 가지고 너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철조망을 치고 살아가고 있다.
마음이라는 세계를 다른 표현으로 양심이라고 생각해 본다. 양심이란 단어가 신약성경에 28번 기록되어 나온다. 양심의 세계에 대해서도 종류를 구분하고 있는데 청결한 양심(딤후 1:3), 선한 양심(딤전 1:5, 히 13:18, 밷전 3:21), 착한 양심(딤전 1:19), 화인 맞은 양심(딤전 4:2), 더러운 양심(딛 1:15)등 혹은 남의 양심, 우리 양심으로 표현되고 있다.
양심(Conscience)이란 도덕적인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말한다(행 23:1; 딤전 1:5; 히 13:18). 양심이라는 말은 복음서에서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나(요 8:9), 바울이나 베드로는 여러 번 사용하였다(롬 2:14-15; 고후 1:12; 벧전 3:21).
양심이라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suneidesis)는 ‘같은 지식’이라는 뜻으로 보편적인 선(善)에 대해 함께 아는 것, 즉 사람들이 양심으로 공통의 사실을 인식한다는 말이다. 이는 결국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기능이자 정서라 할 수 있다(롬 2:15). 뿐만 아니라 양심은 죄를 책망하며(요 8:9; 히 10:22),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롬 9:1-2).
베드로는 세례를 받는 것은 선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라고 했으며(벧전 3:21- 공동번역), 바울은 이방인의 경우 하나님께서 그 양심을 근거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다(롬 2:12-16). 또 바울은 공회에서 자신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담대하게 말했다(행 23:1). 그는 음식을 먹을 때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고 권면하기도 했다(고전 10:25).
세상에 양심 따라 사는 모든 사람들 중에 특히 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양심이란 것이 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역사적인 삶의 현장에서 노예라는 수치스러운 과거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있었다. 그런데 그 수치스러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앞으로 떳떳하게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출애굽 전날 밤에 유월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의한 섭리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행하지 못한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유월절을 행하지 못했고 또 다른 하나는 할례를 하지 못한 것이다.
40여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땅에 들어간 것은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기름지고 광활한 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홍해바다를 건넌 것을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내용가운데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라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체로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을 세례를 받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광야생활에서는 할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할례라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표징이다. 할례를 받음으로써 모든 이스라엘 남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는 표징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땅에 들어갔지만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의식주에 대한 부담을 가지지 않고 살았기에 가나안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정신적 자세가 흐트러져 있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새롭게 하기 위해서 여호수아를 앞세워 길갈에서 먼저 할례를 행하고 다음에 유월절을 지키고 그리고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첫째 할례(circumcision)를 받았다 (2-).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표징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받음으로써 모든 이스라엘 남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는 표징을 갖게 되므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육체적으로 이스라엘 남자들이 받았던 할례로 그들을 최소한 3일간 고통이 무엇인가를 체험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할례를 받으므로 지나난 애굽에서 조상들이 당한 역사적인 수치를 굴러가게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9)고 하게 되었다.
여기서 할례의 중요성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귀한 교훈이 있다.
(1)할례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셨다(창 15장).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새 주인이 될 자들이다. 그런 이스라엘이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할례를 행하고 있다(2-3절).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지내는 40년 동안 할례를 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4-7절). 따라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들이 할례를 받도록 명하신 것이다. (2) 할례의 의미(The Meaning of Circumcision)
1) 할례의 일반적 의미필론(Philon)은 할례가 표피에서 발생하는 병을 예방하고 성직자에게 요구되는 신체의 청결을 유지시켜 주며 생식력을 높여 준다고 하였다. 할례는 일반적인 위생과 건강의 목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을 준비하기 위한 초기의 하나의 관습이기도 하였으며 제사 형식의 하나였다.
출 4:24-26에 대한 탈쿰의 해석에 의하면 모세 아들의 할례의 피가 여호와의 진노를 피하는 속죄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끝으로 할례는 부족이나 민족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행위였다. 할례는 어떤 특정한 부족의 상징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2) 언약의 증표로서 할례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나타내는 증표라고 했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그와 그의 모든 자손이 언약 백성이 되었음을 증거 하는 증표로 할례를 받게 하셨다(창 17:9-14). 아브라함에게 할례는 언약의 확증이었다. 할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며 하나님께 속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할례는 언약 공동체에 가입하는 하나의 표였다. 그리고 할례는 일종의 정결 의식으로 악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사야 52:1에서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은 곧 부정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레위기 19:23에 의하면 과목의 처음 3년 동안에는 그 열매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또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변의 열국으로부터 성별한다는 의미도 있다. 또 아담으로부터 오는 죄를 벗어버린다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이전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게 정결하게 살아가겠다는 선언적 의미도 있다. 또한 할례는 메시아 대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모든 악과 부정을 제거하고 인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는 것을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3) 거룩한 삶의 다짐으로서 할례
할례 받은 사람이면 누구든 과거의 죄악 된 삶과 수치스러웠던 부분을 내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다짐하는 것이 바로 할례 의식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할례 받은 곳을 가리켜 ‘길갈’이라 칭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9절). ‘길갈’은 ‘이전의 수치가 굴러가다, 벗겨지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이런 할례의 의미를 지닌 것이 신약의 세례다. 세례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부활한 것을 의미한다(롬 6:1-11).
4) 겸손히 낮아지는 의미로서 할례
할례 받은 사람은 상처가 아물기까지 고통을 겪게 된다(8절). 고통 중에 인간의 연약함을 새삼 절감하고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 할례의 또 다른 의미라고 생각해 본다.
5) 마음에 할례
할례는 신체에 행하는 의식이지만 영적 의미도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새겨 두어야 할 것은 바로 이 영적 의미인 것이다. 신 10:16은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말한다. 신 30:6에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다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라고 기록되었다. 예레미야도 예레미야 4:4에서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을 언급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 2;29)고 하였다. 이제 육체의 할례는 의미가 없어졌다. 마음의 할례를 믿는 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즐겁게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한편 구약 시대 성도들의 언약의 표징인 할례는 이제 믿음과 구원의 표시인 세례로 그 기능이 이전되었다(골 2:11-12).
6) 신약 시대의 할례
세례 요한과 예수님도 할례를 받았다(눅 1:59; 눅 2:21). 할례의 문제는 초대 기독교가 이방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발생하였는데 이방인들도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해결코자 하였다(행 15장). 율법을 지키는 것과 함께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유대계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바울은 할례를 받았다고(빌 3:5)했지만 육체적 할례보다 영적 의미에 대해서 미음의 할례를 주장하기도 하였던 것이다(롬 2:25-29).
둘째 길갈에서 유월절(the Passover)을 지켰다 (10).
(1)유월절을 지킨 장소
여리고 평지라고 했다. 여리고성을 앞에 두고 있는 길갈과 가까운 지역에 여리고 성이 보이는 곳은 평지라고 했다. 그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뜨거운 사막의 길도 걸어 왔고 갈라진 요단강을 건너온 백성들이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의 관문에 해당되는 곳까지 접근해 왔을 때였음을 알려주는 내용으로 여리고성을 바라보게 된 위치까지 이르게 되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해서 첫 열매로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부하신대로 할례도 행하고 유월절도 지키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된 것이다.
(2)희생의 제물이 된 유월절 어린양
유월절(逾越節)에는 어린 양(羊-Paschal lamb)을 잡아서 문설주에 피를 발라서 재앙이 넘어가게 하였다. 일본어로는 스기꼬시사이라고 한다. 즉 재앙이 넘어가다는 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표시로 인해 재앙으로 인한 멸망을 면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은유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를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했다(고전 5:7). 사도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온 세상의 죄'(요일 2;2)를 위하심이라고 했다.
셋째 가나안 땅의 열매 (12)
(1)만나가 그쳤다.
그동안 수 십 년 동안 먹었던 '만나'가 멈추어졌다. 일용할 양식으로 하나님께서 공공급 하시던 신령한 양식을 날마다 거두어 먹었다.(출 16;3-14) 지난날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 도다'(출 16;3)라고 모세와 아론을 원만하던 조상들도 있었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너온 후 가나안 땅에서 씨를 뿌리고 얻은 소산물을 양식으로 먹은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쳤다고 했다. 그동안 먹었던 '만나'를 다시 먹지 못하고 농사를 짓고 땅에서 나는 소산물로 양식을 삼게 되었다는 것은 자립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소산물로 양식을 삼았다.
신앙생활도 부모가 먹여 주는 양식으로 자라던 아이들이 성장해서 노력하고 자립하게 되면 얻어진 수입으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어린아이 때에는 젓을 먹고 자라지만(벧전 2;2) 장성한 사람(히 5;14)이 되어서는 단단한 식물을 먹게 되고 분별하면서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구분해서 식물로 삼게 된다. 신앙생활에도 어린아이의 때와 같이 신령한 젓만 먹을 것이 아니라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고전 13;11) 그리고 장성한 사람답게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자립 자족하도록 복음을 위한 일군으로 바르게 쓰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도 분별하면서 복음을 맡은 일군답게 여리고 평지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담대한 모습을 본받아 영적 전투장에 임해야 할 것이다.
(3)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성경에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만하고 일도 하지 않고 기복신앙을 바라는 개으른 신앙인들이 있다면 자립하는 단계까지 자라야 할 것이다. 성경에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교훈이 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살전 4: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行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10-12)고 권면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담에게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고 하셨다.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2)고 했다.
성도의 부끄러운 수치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고 잘못된 조상들의 불신앙의 사상과 삶을 본받지 말고 오직 근신하여 깨어 기도(벧전 4;7)하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마 6;33)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1)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율법에 따라서 육체의 할례를 받았지만 오늘 우리 는 더 중요한 마음의 할례를 받아 주님의 겸손을 배워야 할 것이다(마 11;29).
(2)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히 9;26)에 온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을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3)땅에서 얻은 소산의 열매를 먹으며 자립해야 할 것이다. 나태한 마음 버리고 '부지런하여 개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는 자'(롬 12;11)로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하라'(고전 10;31)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마귀에게 틈을 타지 못하게 하고'(엡 4;27-31) 언행에 부끄러운 수치를 남기지 않도록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면서 후세인들에게 좋은 신앙의 본을 남기기를 힘쓰며 세상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15년도에는 부끄러운 지난날 모든 수치를 굴러보내고 담대하게 떳떳하게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토해내며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아가야 할 것인다
이응주 목사(재일한국선교사협의회(CCKJ) 회장 역임, 일본 도가네교회)
E-mail : ungjoor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