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대한 소고

by wgma posted Jan 10, 2015 Views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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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자 학교에서는 우등생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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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의 정의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요 15:7)라고 했다. 여기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는 말씀 앞에 조건적인 내용이 있다. ‘무작정’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기도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에서 응답은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 안에’ 있는 자체가 응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응답을 얻기 위한 방법도 아니다. 기도는 어떤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의 결과라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기도란 아직도 이루지 못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나 방법이 결코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일들에 대한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응답을 받았기 때문에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로 이미 감격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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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지난날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세상에 들어오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 안에 거하심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주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감사의 마음으로 시간을 내면서까지 기도를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내기 위해서 기도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기도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 구약시대는 대제사장이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인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비롯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향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로 완성되는 것이 기도다.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나님과의 교제임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물론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러나 그 응답 또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 기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면하면 죄로 말미암아 그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할 수 있는 자로 회복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기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들이 서로 동거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롬 8:14-15)하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 아버지여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된 것(갈 3:26)을 기도로 연결된 것이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자녀(요 1:12)가 된 것이다. 그래서 죄인 된 인간들과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는 예수 안에서 그 회복의 증거가 바로 기도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에서 ‘하나님은 농부’가 되시고 ‘예수님은 포도나무’로 그리고 자기의 사람들을 ‘가지’로 접목시켜주셔서 기도의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나님만이 누리시던 모든 것들을 예수 안에서 똑 같이 누리게 해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새 언약이다. 이렇게 크고 복된 약속을 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내가 원하는 소원 하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때를 쓰거나 억지를 부리는 식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들을 예수님으로 보아주시며, 자기들을 양자(롬 8:15)로 삼아주신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구할까? 원래 가지들은 전부 다 아궁이에 던져져서 불태워져야 할 가지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보기에 좋은 포도나무가 되신 예수님께 접붙여짐으로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이 농부에게 무엇을 구할 것인가? 위치를 바꾸어 달라 좀 더 굵고 예쁘게 혹은 더 높은 가지에 붙여달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를 더 높게 잘 보이도록 해 주세요. 세상적이고 명예적이고 정치적이고 욕심적인 내용을 가지고 부르짖는 것이 결코 기도가 아니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주인을 위해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세요’라는 내용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그래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하신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기도는 어떤가? 불태워져서 버릴 가지들이 어떻게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게 되었는지, 그 은혜를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이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신자들)이 기도의 세계에 대한 내용을 바르게 파악을 못하고 있지 않는가?. 가지인 주제에 포도나무보다 더 주목을 받으려고, 혹은 포도나무보다 더 인기를 모으려고, 또한 포도나무보다 더 높은 자가 되어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자는 조심스럽게 가지의 위치에 있는가에 대한 신앙의 현주소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가지의 위치는 나무(예수 안에)에 붙어 있어서 뿌리로부터 공급되어진 영양분을 먹고 열매를 맺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가지된 신자들이 기도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부르짖고 기도하는 그 자체를 가지고 큰일을 하는 것 같이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제파악을 분명하게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면 한 가지 밖에 기도할 것이 없다. 자기가 주인을 위해서 해야 할(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직 열매 맺는 일임을 깨닫고, ‘주인님, 주인님을 위해 저라는 가지에게서 많은 열매가 맺게 해주세요’라는 그 기도밖에 드릴 것이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가지들이 주인을 위해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인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인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모든 종교인들 기도라는 무기를 사용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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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16절까지의 내용에서 (1)아버지는 농부, (2)포도나무는 예수님 자신, (3)가지는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이라는 것을 앞에서 말씀을 드렸이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인들이 기도라는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종교인들이 모두 기도생활을 통해서 더 분명한 응답을 받아 신자의 생활을 힘 있게 하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신자들이 있겠는가? 기도의 내용과 태도와 방법들이 다양하지만 자기의 성격과 신앙의 년 수와 성경에 대한 지식에 따라서 다양하게 기도자로서 쓰임 받고 봉사하고 섬기고 있다. 기도로 신앙생활의 우등생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들이 아닐까? 기도로 우등생이 되었다고 해도 하나님과 관계는 어떤지 모른다. 하나님 아버지가 보시는 기도 우등생이 따로 있을까? 그렇지 않을 지도 모른다. 무기는 좋아도 실제적으로 기도라는 무기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는 개인에 따라서 다르다.

 

3. 다양한 기도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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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세계는 모습들이 다양하다. 개인기도, 공중기도, 대표기도, 중보기도, 골방기도, 산기도, 금식기도, 묵상기도, 요즈음에는 관상기도라는 이름으로 모임과 신자로서의 기도생활을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 금식기도 중에도 1일, 3일, 7일, 21일, 40일을 작정하고 금식하면서 특별기도 제목을 가지고 부르짖고 묵상하고 기도응답을 체험하고자 하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기독교 신자만 아니고 모든 종교인들도 기도라는 용어를 쓰면서 소원을 아뢰고 부르짖는다. 기도에 대해서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목소리를 높였다고 해서 기도인가? 아니면 조용하게 묵상하는 것도 기도인가? 물론 기도라는 자세와 테도와 모습들이 다르다.

 

4. 기도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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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기도한 내용대로 삶의 현장에서 사랑을 베풀고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의 교훈을 실천하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는 몰라도 ‘주여’로 삼창하고 부 르 짓는 소리, 목이 메이도록 부르짖는 기도, 힘쓰고 애쓰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지만 기도 후에 찾아오는 마음의 소리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의심하는 경우도 있다. 이유는 응답에 대한 이해부족이라고 본다. 머리를 무릎사이에 넣고 온 몸에 힘을 주면서 목이 터지라고 부르짖으면서 기도 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어떤가?

 

5. 기도의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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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기도한대로 모두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떡 반죽 그릇이나 기름병에 다함이 없는 복을 받아 누리는 신자들이 몇 퍼센트 있을까? 그래도 기도는 숨 쉬는 것과 같은 것이라서 자기가 믿는 신에게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 각종 종교인들의 모습이다.

특히 성경을 배우고 성경적인 기도생활을 하는 기독신자들이 누구에게 기도를 하고 있는가? 분명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있다. 문제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신으로 생각하고 부르짖는가? 아니면 나의 왕 나의 주로 생각하고 부르짖는가? 만일 신으로 생각하고 부르짖는다면 신앙관이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6. 모든 종교인들도 기도한다.

지구촌에 수많은 종교들이 있다. 나라마다 종교의 모습들이 다르다. 엘리야 시대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850명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엘리야와 영적전쟁이라는 현장이 갈멜산에서 있었다. 죽은 신을 섬기는가? 아니면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가? 850대 1이라는 숫자에서 보면 많은 편이 이길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기도는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은 신을 섬기며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살아계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기독신자들이 믿는 대상은 신이 아니고 나의 삶의 통치자로 나의 주, 나의 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내가 믿는 주님이 나의 삶의 통치자로 믿는다면 그분의 명령과 통치에 전적 순종해야 할 것이다. 순종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경말씀에는 기도에 대한 명령과 약속(마 7:7-9, 눅 11:9-13), 축복과 저주(참고, 신 28장), 응답과 응답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기도는 소리 내어 부르짖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도 생활과 연결되지 않는 모습으로 산다면 그것은 바른 신자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7. 기도의 사람들

성경에 기도의 사람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아벨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엘리야와 엘리사, 사무엘과 예레미야, 다윗과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요나를 비롯하여 기도의 사람들이 그 시대를 어떻게 개인적이고 국가적인 문제들을 풀어갔던가?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바울을 비롯하여 초대교회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여명이 열흘 동안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부르짖던 마지막 날 오순절에 임했다(행 1:8,15, 2:1-4). 드디어 성령 충만(행 2:4)의 분위기와 같은 것이 오늘날 교회당 문화에 속한 기도모임들 가운데 없다고 보여지는 것은 잘못된 분석인가?.

8. 기도응답과 삶의 모습

이제라도 개인적으로 기도응답에만 메이지 말고 오직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복종, 빌 2:7-8))하는 삶의 모습을 통해서 행함의 본이 되는 열매들이 맺으면 어떨까? 이웃에 배고파하고 병들어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고 사는 수많은 귀한 생명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멀리 가서 이방사람 구원하지 못하되 내 집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 찬송가의 가사를 기억하면서 찬미를 부른 내용대로 이웃과 함께하는 삶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9. 기도자 학교 학생된 것을 자랑하지 말자

기도자 학교를 통해서 ‘기도자 7000’에 대한 강의 10번에 걸쳐서 배우고 들었다 해도 자랑할 것이 없다. 또한 아무리 좋은 신학교를 나오고 세상지식이 풍부해도 외적인 모습이 훌륭하고 기도 많이 하는 학자나 사역자나 신자라도 개인적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기도는 개인적이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속삭이듯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기도가 아닌가?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며’(고전 14:15)라고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내용을 통해서 마음으로 영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내 말만 하고 내 요구에 만족하게 체워주기를 바라는 것이 기도가 아니다. 무조건 주십시오. 하는 것도 기도가 아니다. 주님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지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라고 했다.

10. 기도의 응답이 무엇인가?

기도해서 축복받아 자녀들이 잘되고 사업이 잘 풀리고 교회가 부흥되고 육체적으로 건강해지고 범사가 형통하고 모든 일들이 사고 없이 잘되는 것만 아니다. 오래도록 장수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기도응답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즐거워하게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11. 모든 종교인들의 특권인 기도

모든 신자들에게 주신 특권이 기도다. 기도에 대해서 마음에 부담을 가지기도 한다. 이유는 빚진 것 같은 부담감으로 생각되어진다. 기도는 마지못해 하는 의무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에게 주신 놀라운 특권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놀라운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작자 미상의 글 가운데 ‘기도의 특권을 활용하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드릴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며 거기다가 아무 때나 들어와도 좋다는 초청을 받았다(계 3:20). 초청을 받았을 뿐 아니라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의 자녀들과 대화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다. 기도는 대화라고 말한다. 마음껏 대화하는데 듣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한다. 내 말만하는 것은 켤코 기도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다. 밤이 맞도록 혼자 기도하고 대화를 나누었지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응답이 없다면 진정한 기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기도는 1대1로 나누는 대화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권이지만 기도를 했다고만 자랑하지 말자. 무슨 말씀으로 응답을 받았는가? 길게 오래 동안 울고 부르짖어도 그런 모습을 통해서 과연 기도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기도는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고 아무 때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너무 사랑하시고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 때나 하나님 보좌 앞(히 4:16)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기도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고 실제적으로 골방에 들어가고 산에 올라가고 예배당에서 소리 내어 크게 부르짖어도 기도한 대로 살지 못한다면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 같이 종교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도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와 같은 모습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 안에 있는 그 자체가 기도라는 것을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신앙인의 현주소가 어디이며 이미 예수 안에 있으면 열매(응답)는 부르짖었다고 맺어지는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과제가 아닐까?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조건이 있다. 아무리 신앙의 현주소가 예수 안이라도 주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말씀이 내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알지 못하고 기도만 했다고 자랑만 한다면 오히려 성령님은 탄식(롬 8:26)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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