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계시 활동

by wgma posted Jan 16, 2015 Views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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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으로 하나만 더 말씀을 드리고 마치려 한다. 앞에서부터 여러 가지들을 이야기 해왔다. 이 글을 읽으면서 황당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의 교회당교회의 틀에서 한평생을 별 탈 없이 살아왔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고 휴지처럼 버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일 수 있다.

①점진적 계시(진행하는 계시)

신학교에 가면 ‘점진적 계시’란 말을 배운다. 점진적 계시란 말은 하나님의 계시는 진행된다는 뜻이다. 한번 계시하시고 멈추신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발전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는 진행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는 모세 시대의 계시와 그 이후 선지자들의 계시로 이어지면서 성경이 만들어져 온 것이다.

포로이전의 계시와 포로 이후의 계시가 발전하면서 진행되어져왔고, 유대교 계시조명과 신약시대의 계시조명은 발전적으로 바뀌어져 왔다. 사도들의 계시조명과 로마교회가 될 때 교부들이 이해한 계시도 변화하면서 진행되었다. 중세교회에서 개혁교회가 탄생될 때도 개혁자들에게 새로운 계시 조명이 있어서 개혁교회가 탄생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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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이면 종교개혁 5백 주년이 되는 해 이다. 지금의 개신교는 5백 년 전 계시조명으로 5백년을 살아왔다. 이제 21세기에 이르면서 하나님은 다시 계시활동을 하신 것이라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활동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점진적 계시란 말을 해온 것이다.

②다음은 계시 성격

하나님의 계시 조명에는 크게 두 가지 성격이 있다. 하나는 모(母) 계시라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자(子) 계시라는 것이 있다. 대체적으로 개신교에서는 66권을 정경이라 해서 모계시라 말하고, 모계시를 통해서 새롭게 조명 받는 계시를 자계시라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조명’이라고도 한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출발했을 때 로마서 1;17절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란 말씀을 조명 받아 개혁운동을 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를 자계시라 한다. 사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은 하박국 선지(하박국 2;4)에게 보이신 계시의 빛이었다. 이것을 바울이 조명 받아 로마서에 기록했고, 다시 루터가 조명 받아 개혁교회를 출범 시킨 기초가 되었다.

창세기 3장 15절부터 시작된 구속사가 진행되어온 과정 속에서는 대략 4백년, 혹은 5백년 때론 좀 더 길게 짧게 주기적인 형태변화를 거치면서 진행되어 왔는데, 이렇게 변화가 올 때는 반듯이 하나님의 계시활동이 있었고, 그 계시조명에 의해서 형태를 바꾸면서 구속사가 진행 되어져 왔었다.

이런 과정이 있을 때, 계시조명을 받은 자와 기존 조직(기득권 세력) 사이에는 항상 갈등과 마찰이 이러났었다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기록했던 말씀들이 바로 성경이 된 것이다. 가장 가깝게는 예수님과 유대교 사이가 대표적인 사례였고, 중세교회와 개혁자들이 바로 이런 과정을 겪어 개혁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미 앞글들을 통해서 지금의 기존교회와는 전혀 다른 시각이란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문제는 기본이 성경이기 때문에 과연 성서적으로 비추어봤을 때 옳은가 틀린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회당교회 형편은 99%가 성경이 아니고 유전(遺傳)으로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거의가 유전이 지배하는 것이 교회당교회이다. 유전을 위해 성경이 인용(보조자료)이 된 것 뿐이다. 이러한 유전이 긴 세월을 거치면서 전통이 되어왔기 때문에(역사성 때문에) 좀 체로 성경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는다.

이 같은 경우를 예수께서 벌써 경험 하셨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막7:6-9)

어느 때든지 유전이 없을 수는 없다. 문제는 유전이 성경을 능가해서는(제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교회당교회가 유전이 되어 안방의 주인이 되어있고 성경은 유전을 위한 시녀(侍女)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이것을 운용한 사람들이 본인도 의식을 못한 중에 거짓선지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이다.

③계시의 순기능과 역기능

많은 이들이 의문을 품는 것 중의 하나가 계시기능에 대해서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개혁교회가 출발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고, 그동안 개혁교회를 통해 구원 받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교회가 잘못된 것이라고?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한다고 가소롭게 여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다. 사실 개혁교회가 출발해서 인류사에 엄청난 일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인데, 지금의 개혁교회는 점점 사람들에게 혐오스런 집단으로 전락되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개혁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구속사가 진행되어오면서 늘 그렇게 변해왔다. 이렇게 된 것은 계시조명이 역기능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개혁교회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바빌론 70년 포로생활에서 유대인들이 고토(故土)로 돌아 왔을 때, 황폐된 조국의 국토 앞에서 좌절과 하나님의 선민이란 자긍심마저도 회의에 빠져 있을 때 느혜미야와 에스라가 에스라 법전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창건 유대인들의 신앙심을 회복 시켰었다(느헤미야 8장 참고).

그런 글들이 4백년이 지나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이 집단은 사탄의 집단이 되어 버렸었다. 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가?, 처음 시작의 때는 순기능을 했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역기능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은 로마교회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오늘의 교회가 부정적인 모습으로 노출된 것은 바로 역기능으로 바뀌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주방에서 쓰는 그릇도 오래 사용하면 낡고 금이 가고 쭈그러지고, 그래서 흉물스런 모습이 된다. 그러면 주부는 그것을 버리고 새 그릇을 산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그릇으로 선택된 교회일지라도 흉물스런 모습이 될 때는 이걸 버리고 새 포대를 준비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개혁이라 말할 수 있다.

④계시 수명이 
앞에서 언급해온 바와 같이 시작의 때에는 순기능을 했지만 시한(時限)에 이르면 역기능으로 바뀌어 지는데, 이것은 계시에는 수명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수명이 있다는 말은 생명이 있다는 말이다. 생명이 없는 것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화가 없는 것이지만 생명이 있는 것은 수명이란 것이 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개혁교회를 구속의 도구로 사용해 오셨다는 뜻이 된다. 다만 수명이 다 되었기 때문에 다음으로 그 기능을 옮겨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는 말이다.

⑤하나님의 허용의 속성

그리고 하나 더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허용의 속성이란 것이다. 처음 시작했을 때(사람을 도구로 사용, 시작하게 하심)부터 하나님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허용하신다는 것이다. 사실 로마교회가 시작 될 때 이것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를 못한 중에 만들어 진 것인데 가장 큰 약점이 종교시스템으로 시작 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벗어나지를 못한 것이다. 모순으로 시작했지만 하나님은 허용 무려 천년이 넘게 사용해 오신 것이다. 이 같은 사례는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했을 때도 하나님은 싫으셨지만 그것을 허용해서 5백 70년 동안 사용하셨다. 이런 사건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 있다. 개혁교회가 출발하면서도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 보니 ‘신앙고백위에 세운 교회’로 본 기초이론은 지금과 같은 난장판 교회를 만든 원인이 되었다.

이런 현상을 이해한 것은 계시진행에 따라 인간들의 수준에 맞춰 계시조명을 하신 것이라 판단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9-11)

초등학교 수준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로, 중고등학교에 이르면 거기에 맞는 교과서로 대학에 이르면 대학교 교재가 제시된 것처럼, 사람들의 성장 수준에 맞춰 하나님의 계시조명도 비추어 주신다는 것이다. 특히 중세 개혁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확연히 느끼게 된다.

세 가지만 예를 들면 하나는 교회개혁을 church reformation라 하지 않고 religious reformation(종교개혁) 이라 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이 되고, 다음은 교회론의 기초가 되는 성경해석(신앙고백위에 세운 교회)의 오류가 지금은 수많은 종파와 수많은 분열현상을 가져오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개혁자들 자신들부터 모순으로 출발했다.(루터 파 교회, 쯔빙글리 파 교회, 캘빈 파 교회 등)

세 번째가 신앙행위의 기본이 되는 Contents(복음의 내용)와 Form(교회의 형태)과 그리고 Aspect(신앙을 표현 시키는 양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제시 못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름도 없는 녀석이 감히 루터나 캘빈 선생을 비판(?) 한다고 가소롭게 생각 하겠지만 이것은 인간의 학문이나 명성을 통해 전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활동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고 감히 말하고자 한다.

 

이응주 목사(재일한국선교사협의회(CCKJ) 회장 역임, 일본 도가네교회)

  E-mail : ungjoor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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