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자비량 선교사 [메리 리 로간]

by kim posted Jan 1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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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자비량 선교사 메리 리 로간

충북과 청주를 사랑한 여성 근대화의 어머니!


 로간부인기념비,청주제일교회(2).jpg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에 위치한 청주제일교회는 민노아 선교사와 김흥경씨가 1900년 말부터 청주지역을 돌며 전도하여 모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복음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041115일에 민노아 목사가 처음 마련한 남문 밖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시작하였다 교회설립 1년 만에 교인이 50여명을 넘게 되자 초가집 예배당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새롭게 교회 부지를 물색하여 지은 곳이 현재의 교회터로, 이것은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교하던 역사적인 순교터이다


교회 안에는 최초의 한글 비석으로 1921년에 세워진 메리 리 로간기념비, 창립 100주년 기념비, 망선루 옛터 기념비, 기독청년·민주화운동 기념비 등 역사적 기념비가 줄 지어 있다.


충북지역 여성교육의 초석 로간 선교사

서울 마포구 합정동 145-3번지(양화진)에는 1909년 미국에서 한국 최초의 자비량 선교사로 내한하여 충청북도 청주지역에서 1919년까지 활동한 로간(Logan, Mrs./1856~1919) 선교사 묘가 있다. 그리고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1154번지(청주제일교회)에는 로간 선교사의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는 한글로 쓰여진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 자료 제공에 도움을 주신 충북기독교역사연구회(최동준회장), 충북대학교(전순동교수)께 감사드린다. 메리 리 로간(Logan, Mary Lee)1856917일 미국 켄터키 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성장하여 J. V. 로간(Logan, Mrs. J. V.)의 부인이 되었으며, 남편은 켄터키 센트럴대학 학장으로 재직한바 있다. 이 때 그는 같은 대학에서 기독청년회(YMCA)와 여자기독청년회(YWCA)를 육성하였고 사회봉사 활동에도 힘을 썼다


1908년 남편과 사별한 뒤 한국에 협력선교사로 자원하여 19093553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 무렵 선교사들은 대부분 정규선교사(Regular Members)로 임명되어 재정 지원을 받고 활동하였다.


북장로회 최초의 자비량 선교사

1884920일 내한한 알렌(Allen)부터 1962912일 내한한 포(Poe) 선교사에 이르기까지 386명의 선교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로간 선교사의 경우 해외선교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모든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며 활동한 한국 최초의 자비량(Affiliated Members)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에서 별세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주일학교, 성경학교, 주일학교 교사반, 여성 전도반, 여성지도자반 등을 육성하면서 충북지역의 선교와 여성교육에 커다란 공을 세운 여성 선교사였다


자기 집에서도 매주 15시간 씩 여러 성경 공부 반을 인도했으며, 여기에 참여한 여성들은 5-60여명에 이른다. 이 무렵 그가 살던 청주시 상당구 탑동 185-1번지에 있는 집(1911년 건립)은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3-5호로 지정되어 로위(Lowe)기념관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청주제일교회.jpg


한국말을 하며 충북과 청주를 사랑한 로간

그는 한국말도 잘 구사하고 충북과 청주를 사랑했으며, 언제나 찾아가 만날 수 있는 준비된 자애로운 어머니로 밀러(Miller)의 부인 도티(Doty)여사와 함께 청주지역 여성교육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며, 여성의 근대화 의식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신병으로 1919127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마포구 합정동 145-3번지 양화진 제2묘역(-6)에 안장되었다. 한편 19216월 청주에서는 그를 추모하여 청주시 남문로 1154번지(청주제일교회)에 화강석으로 가로 0.4m, 세로 0.4m, 높이 1m 규격의 기념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에 대하여 <충북기독교100년사>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첫째, 충북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비석이라는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


둘째, 한문을 많이 사용하던 시절에 봉승(奉承) 진출갈력(盡忠竭力) 등 한문 용어까지도 한글로 기록하여, 일제 강점기에도 교회가 앞장서 우리글과 말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기독교와 한글운동-민족운동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귀중한 사료이다


셋째, 이 비석은 여전도회 중심으로 건립되고 여성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에 노력한 흔적을 보여준다. 1920년 청주제일교회에서 남·여석을 구분했던 휘장을 제거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띄어쓰기 잘못, 천주교 신부로 오인하다

그러나 이 한글 기념비에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 기독교 역사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장로교 선교사를 천주교 신부(神父)로 잘못 소개한 사례도 있었다. 비문 첫 줄의 아메리가나신부인부분을 천주교 순교지와 유적지를 소개하기 위하여 간행된 <한국의 성지, 순교자의 발자취> 책에서 아메리카 나 신부로 해석하여 미국의 나씨 성을 가진 신부의 선교비로 전해진 사실이 있다


결국 한글에 띄어쓰기를 하지 아니하여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를 사실과 다르게 천주교 신부로 오인한 사연의 한 토막이다. 역사는 반드시 기록되어야하지만 정확하게 전해져야 한다. 문장의 작성에 띄어쓰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이다


조선 여성의 근대화 의식 형성에 기여한 그녀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한국 최초의 자비량 선교사이다. "탑동에 있던 로간 부인의 방문 앞에는 적게는 열 켤레, 많을 때는 마흔 켤레 이상의 짚신이 항상 놓여 있었다." 


로간 선교사는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며 충북지역 여성교육에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순직하여 양화진에 외롭게 묻혔다. 앞으로 그의 위대한 선교정신과 삶을 뒤돌아보며 기억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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