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계약관계를 인용해,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갑(甲)이라 하고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자를 을(乙)이라고 하는데, 요즈음 갑들의 '갑질'이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땅콩 회항' 사건이나 아파트 경비원의 자살 사건 그리고 부천의 한 백화점에서 발생한 모녀의 갑질 등등을 대하면서 정말 씁쓸하다. 왜 우리 사회는 갑질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내가 미국에 있을 때였다. 우리 교회가 거래하던 은행의 지점장이 내게 전화를 걸어온 적이 있었다. 그 전화는 우리 교회의 멤버 가운데 한 사람이 은행에 와서 행패를 부린 것에 대한 항의 전화였다. 그 지점장은 만일 이 일에 대하여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와의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내게 이야기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자초지종을 알아보았다.
알고 보니 헌금을 은행에 입금하는 일을 담당했던 우리 교인이 은행에 가서 입금하면서 돈을 묶는 띠를 좀 달라고 요청하였던 모양이다. 지폐를 묶어서 입금하면 좋겠다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그 은행 직원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것은 문방구에 가시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교인은 미국에서 거의 평생을 사셨던 분이었는데도 그러한 대답에 조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우리가 은행을 거래하는 손님인데 이럴 수 있느냐면서 따졌더니, 겨우 5개의 띠를 건네더라나. 화가 폭발한 교인은 그것을 은행 점원에게 던져 버리면서 나왔다고 한다. 은행 직원은 이 사실을 상관에게 보고하였고, 그 상관은 우리의 태도를 문제 삼고서 우리와의 거래를 끊겠다고 했다. 나는 정중하게 그분께 사과를 했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사건을 경험하면서 나는 놀랐다. 사실 우리 교회가 거래하는 금액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행은 무례하게 갑질을 하려는 우리를 더 이상 고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객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그 은행 직원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 직원을 두둔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이 따뜻해졌었다. 비록 돈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은행이었지만 돈보다도 한 사람의 인격이 더 중요하며 아무리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말단 직원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무례하게 대우받으면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일로 인하여 중요한 고객 하나를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말이다.
미국에 16년 정도를 살면서 나는 이런 비슷한 예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고객이 진상을 부리고 있을 때, 가게의 주인은 종업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오히려 무례한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가진 자들의 갑질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는 것은 너무나도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아파트 경비원이 무례하게 대하는 주민들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왜 우리의 회사에서는 그 아파트 경비원의 인격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없었을까? 왜 우리의 백화점은 VIP 고객이라며 종업원들에게 갑질을 해 대는 진상고객으로부터 종업원들의 인격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없었을까? 왜 우리는 조그마한 권력을 가지면 한 없이 무례해질까?
우리는 아직도 돈에 목말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한때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전쟁의 난리 통에 근근이 먹고 살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그저 먹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희생이라도 괜찮다 생각하며 살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잘살게 되었다고 하는데, 여전히 그때 그 시절의 사고방식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으로서 인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먹고사는 게 중요하다는 노예의 멘탈리티 말이다. OECD 국가가 되었다고 하고 일인당 몇 만 불의 GNP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들에겐 먹고사는 게 급하다.
▲ 찬송가 '웬일인가 내 형제여' 악보. 성도는 이 세상 법칙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나라 법칙은, 물질과 돈의 힘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인정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갑질에 저항해야 한다. (새찬송가 512장 스캔) |
성도는 이 세상의 법칙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세상의 법칙은 돈의 힘을 믿으라는 것이고 돈으로 서열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든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중해 주지 않고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야고보서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약 3:9).
크리스천은 갑질 사회에 편승하여 갑질하면 안 된다. 오로지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마 14:11).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을 항상 기억하여야 한다(약 4:6).
돈의 힘은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세상이 없어질 때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예전 통일 찬송가 269장 '웬 일인가 내 형제여'라는 곡의 3절 가사는 이렇게 노래한다. "웬일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세상 물건 불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 우리가 신뢰해야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돈의 힘이 아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오직 영원히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뿐이시다.
갑질 사회를 우리 성도들이 용인하여서는 안 된다. 만일 나의 주변에서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갑질을 해대면서 이 세상을 호령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앞에서 머리 숙이지 않아야 한다. 이 세상의 권력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살던 하만 앞에서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았던 모르드개처럼 말이다(에 3:2). 우리에게는 돈보다도 이 세상의 힘보다도 더 큰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우리가 죽은 이후에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 세상에서부터 벌써 하나님의 통치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현 주소는 이 세상이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법칙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칙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이며, 지금 바로 이 세상에서(here and now)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의 특권을 누려야 하고 의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를 반역자로 여겨서 체포하기도 하고 온갖 고문과 불이익을 주겠지만 우리에겐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기억하자.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하여 소대원들을 보냈던 미 국방성의 결정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이국진 / 대구 남부교회 목사. 저서로 <예수는 있다>, <사랑>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