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교회 분쟁문제 해결의 열쇠(2)

by wgma posted Jan 30, 2015 Views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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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교회 분쟁문제 해결의 열쇠(2)

(고전 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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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쟁의 원인

고린도 교회의 내적 분쟁에는 세상적인 좁은 지식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분쟁은 어느 모임에서도 있게 마련이다. 비록 종교단체만 아니다. 분쟁의 원인중에 편파적인 인간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 씻음을 받고 새로 거듭난 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분쟁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바울은 지적하기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1:12)고 했다.

먼저 바울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방인들 중심이었다. 그리고 아볼로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순수한 신앙적인 면에서 벗어나 헬라적 지식과 철학적 경향을 추구하는 종교로 바꾸려는 자들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게바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유대의 율법을 존중하여 주님의 십자가 은총을 가볍게 여기는 율법주의가 강한 자들이다.

2. 분쟁은 인간 중심이다.

분쟁의 비극은 언제나 합리적이지 못한 좁은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생각을 통하여 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바울은 사랑을 강조하는 13장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했다. 누구에게 속하였든지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들이라는 것이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젓을 사모하면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된다(벧전 2:2). 그리고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4)고 한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아직도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지각을 사용하지 못하고 연단속에 있는 모습으로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악을 분변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위치에 있는 교회로 생각되어 진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고 했는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 까지는 희미한 부분들이 너무나 많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3. 세례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가이오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라"(14절)고 했다. 고린도 교회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를 따지며 분파를 형성했다고 보여 진다. 이것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인 것이다. 즉 인본주의적인 신앙이다. 자신의 이름을 주님의 이름보다 더 내세우는 사역자 혹은 인간의 유명세를 따르려는 지도자, 모두가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인의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볼 수 없다.

세례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어리석은 유혹을 피하여 자신의 이름을 오히려 잊어지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기억하기 위해 세례를 베푸는 일에 지나치게 골몰하지 않았던 바울의 정신을 오늘날 사역자들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

4.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

사명자의 바르고 참된 의식을 분명히 가져야 할 것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고린도 교회의 분쟁 상태를 올바르게 지적하여 치료할 수 있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바울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사명을 올바르게 인식하였던 것이라고 보여 진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17)라고 하였다. 즉 자신의 사명은 형식적인 세례를 베푸는 성례전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 곧 ‘오직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세례라는 것은 사역의 한 과정이다. ‘세례주기 전에 먼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라고 하셨다. 세례가 먼저 아니고 제자를 삼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사실 혹은 그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누가 세례를 주었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바을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나니"(고전 3:6)라고 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인 것을 깨달아 세례를 받고자 할 때는 누가 세례를 베풀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신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을 모든 사역자들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복음 전파의 중요한 사역은 뒷전에 두고 자기가 성삼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듯이 자신의 이름을 내려는 인간 중심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기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충성해야 할 것이다.

5. 십자가로 인한 분쟁의 결론

(1)바울 사도의 평생 자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1:18, 2:2)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그것은 복음(십자가)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롬1:16).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고 한 말씀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한 말씀과 같이 바울은 순수한 마음과 용어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자신은 철저히 부인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구원의 능력만을 전파하고자 하는 분명한 사역자였다. 바울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된 신앙을 가졌다. 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했다.

(2)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고전 1:18-21).

바울은 사도로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바울 당시 문화나 경제와 학문이 왕성했던 고린도 교인들이 인간의 거짓된 지혜에 미혹되지 않도록 바르게 신앙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그렇다면 참된 지혜는 어디 있느뇨? 라고 질문하면서 가르치고 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1:20절). 여기서 인간들 가운데 지혜가 있다고 생각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을 언급했다.

첫째 ‘지혜(知慧)있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다. 고전 1:22절의 내용에서 헬라인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바울 당시 헬라의 지식은 고도로 발달되었기 때문에 헬라인들은 명철하고 지식이 많았던 것이다.

둘째 ‘선비’에 대해서다. 원래 이 말은 서기를 가리키지만 바울이 살던 시대는 유대 율법에 능통한 율법 교사들을 지칭했다.

셋째 ‘변사(辯士)’가 어떤 자냐? 이는 학자나 변론가 등을 의미한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의 특성은 어떠한 문제이든지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바울이 언급한 이 사람들은 유대 사회나 헬라 사회를 막론하고 지식과 지혜가 있다고 일컬어지는 부류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학식이나 지식도 하나님의 지혜에 비하면 ‘미련한 것’이라고 혹평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년~1274년 3월 7일)는 중세 기독교의 대표적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이다. 또한 그는 자연 신학의 으뜸가는 선구자이며 로마 가톨릭에서 오랫동안 주요 철학적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는 토마스 학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교회학자 33명 중 하나이며, 로마 가톨릭에서는 그를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로 여기고 있다. 이렇게 중세의 스콜라 철학의 왕이라고 인정받았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라는 견해를 주창한 바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난다고 해도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함에 비할 때는 지극히 불완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 이성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에 관한 문제나 창조에 관한 영역은 전혀 손대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법칙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이지 결코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다. 또한 그러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더 어리석은 자 일 수밖에 없다.

6. 그렇다면 미련한 자가 누구인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18절).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미련하게 생각한다(고전 2:14)고 설명하였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하나님의 지혜를 결코 깨달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을 거부하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다.

어느 날 그리스도께서 이방인 지역인 가다라(마가, 누가복음에는 '거사라')지방에서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를 치료하셨을 때 그곳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고 놀라거나,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보다 돼지의 죽음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만을 생각하고 주님께 떠나시기를 간청한 일이 있었다(마 8:28-, 막 5:1-20).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자들은 예수를 거부한다. 또한 계속적으로 멸망의 삶을 고집하게 된다.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일수록 겸손하고 자기보다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을 인정해주고 존경하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를 부인하고 고집을 피우는 일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한다(시 14:1, 53:1). 그래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롬 1:21)고 했다.

그러나 겸손한 태도로 구원받은 백부장이 있었고(마 8:5- 눅 7:2-) 겸손한 삭개오(눅 19:2-8)가 구원을 얻었으며 겸손으로 인하여 구스의 내시(행 26-36)와 나아만 장군(왕하 5:1-)이 구원을 얻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할 때 큰 은혜(벧전 5:5)를 받는 줄 알아야 한다.

7. 지혜로 인한 구원

그렇다면 참된 지혜가 무엇인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고 했다. 그렇다면 지혜가 주는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구원"이라는 신령한 복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 하셨도다’(1:21).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답지 않은 구원의 조건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숱한 천군천사를 동원하실 수도 있고 당장 불벼락을 내리는 일도 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이상하게도 믿음에 대한 테스트를 통과하기를 바라고 있다.

전도는 피곤할 수도 있고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하는 비능률적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거지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었다. 문제는 부자가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 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19~31)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지구촌에서 모세와 선지자와 같은 주의 종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많은 사역자들이 동서남북에서 계속해서 예언했던 중심인물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소개하였고 지금도 소개하고 있다. 바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고 지금도 증거하고 있다. 주의 종들이 전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 아닌가?

날마다 해마다 드려졌던 짐승의 피 제사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단번"의 사건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셨다(히 9:26). 하나님께서는 지혜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잠3:19)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신다. 그래서 여러 성경 기자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였던 것이다(시104:24, 단2:20,21).

구원의 은혜도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요 1:14)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도 많은 능력을 나타 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려 대속적 죽음을 당하신 것은 결코 인간의 한정된 지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만 이러한 비밀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곧 구원과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늘 감사하며 그 지혜를 전파하는 일에 진력해야 한다.

삶 가운데서 지혜가 부족한 부분이 있는가?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어야 할 것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고 했다. 이 시간도 변함없이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간절히 구하기를 바란다.

이응주 목사(재일한국선교사협의회(CCKJ) 회장 역임, 일본 도가네교회)

  E-mail : ungjoor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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