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3세계에 대한 Vision
제3의 세계란 말은 예수께서 지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언급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부친 표현이다. 인류가 시작 되면서 국가(정부)와 종교란 두 권역(圈域) 아래서 인간은 존재 하게 되어 왔다. 그래서 사람은 종교와 국가라는 두 개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싫든 좋든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늘 그 영향권 안에서 살아 와야만 했다. 두 권역의 존재 목적은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려는데 있지만, 두 권역은 오히려 인간의 희생을 요구해온 역사가 되어 왔었고 밝은 빛은 보이지 않고 어두움만 더 짖어지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본래 두 개념은 하나였었는데, 인간세계에 죄가 들어오면서(에덴의 상실) 두 영역으로 나눠지게 된 것이다. 인간이 육체와 영혼이 결합이 되어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되지만 우리 몸 안에서 육체의 욕구와 영혼의 욕구가 때론 충돌하듯, 종교와 국가의 두 영역사이에서도 긴장과 갈등이 늘 있어왔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백성으로 하여금 두 영역을 하나 되게 하시려는 것이 가나안의 계획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계획이기도 했다.
앞에서 소개한 말씀 중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를 위한 제사장 나라로 선택 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소유하려 했을 뿐 이방인들을 향한 제사장 나라의 직무를 수행하려 하지 안 했다.
이들은 선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야웨의 하나님은 히브리인의 하나님’으로 제한하려는 소위 선민사상(hebrews ism)에 빠진 모순을 범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직무유기였다. 이스라엘은 선택의 의미를 스스로 상실함 셈이 되었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메시아 언약에 의한 것으로 새로운 제3세계를 꿈꾸신 것이 그분의 Vision이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정치와 종교라는 두 권역만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시고 어쩌면 제3세계 계획을 구상하신 듯싶다. 이것은 구속이라는 방법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선택백성을 구성하심으로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셨던 뜻(제사장)을 다시 실현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택된 신약백성들에게도 똑같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 하셨고, 그 신분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명명하신 듯싶다. 이것은 당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지상에서 이루시고자 하신 그 세계의 기초를 닦으신 사역이었다.
제3세계의 Vision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선언하셨다. 그것은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6)고 하신 말씀에 담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인류를 지배해온 두 권역(정치와 종교) 말고 제3의 세계에 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3세계의 Vision에 대해 미처 이해를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알았다 할지라도 당시 형편으로는 그 일을 추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속량(贖良)의 사건으로만 취급된 채, 2천년 동안 종교형태에서만 머물러온 세월이 된 것이다. 21세기가 되면서 비로소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에 대해 눈을 뜨게 하시고, 여기에 관심을 갖게 하신 것은 21세기 교회개혁의 대안으로 마지막 Millenium에서 제3세계의 Vision성취를 위한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 여기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제3의 Vision)의 형태는 무엇일까?
긴 구속사의 결론이 여기에 있는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이 계시록에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계시록은 구속사의 결론이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형성된 교회의 일원이 된 모든 사람의 운명도 계시록에서 결정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복음이 증거 되기 시작한지 2천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보이신 하나님의 계시조명이란 생각에 머리를 숙이게 된다.
*이 성전을 헐라 3일 만에 일으키리라(요2:19-21),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이해를 바르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가 찼다.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일으킨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육체를 가르치신 말씀으로 사실 유대교란 전통적 종교를 헐어버리란 뜻을 담으신 말씀이다. 전통적 유대교를 헐어버리지 않고는 예수의 몸으로 이루어 질 신약 교회가 (백성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유대교를 두고 하신 말씀이지만 사실은 인류에게 있는 모든 종교를 헐어버리란 뜻이 포함된 말씀일 수도 있다. 인류의 진정한 행복은 종교의 사슬에서 해방되는 날일 것이다. 종교는 어느 부분 순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죄 아래 있는 인류를 신의 이름으로 사실상 속박해온 것도 종교가 가진 또 하나의 다른 얼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당신의 몸으로 인류를 죄와 전통적인 유대 종교의 속박에서 해방을 선언한 사건이란 걸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말한 종교의 부정적인 언급은 종교라는 보편적 특성이 그렇다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종교에는 순기능도 물론 있다. 하지만 부패한 성직자의 등장은 인간을 한없이 종교의 노예로 삼아 신의 이름으로 약탈을 일삼아 온 것도 종교역사가 남긴 부정적 얼굴이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리라’ 하시고 실제로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달리신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성전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갈라짐으로 사실상 유대종교를 헐어버리신 것이요, 모든 종교를 헐어버리고, 3일 만에 당신의 부활로 제3의 세계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라 여겨진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든지 차별 없이 들어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새로운 길이요 형태를 이루어 놓으신 것을 교회당교회라는 또 다른 종교를 만들어 사람들을 또 다시 종교의 노예로 삼는 일을 반복해 오고 있는 것이다. 중세교회가 그렇게 했고, 이것을 거부하고 뛰쳐나와 개혁교회를 시작 했지만, 지금은 개혁교회가 한술 더 뜬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참으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게 한 것은 과연 누구일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죄(종교)에서의 해방(롬 8:1-2)을 선언한 사건이요,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난 사건이다. 이런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라는 이름의 종교 형태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유전과 율법의 틀에 묶어 속박을 하고 있어 21세기 교회개혁을 다시 말해야 하는 지경이 되게 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는 4백년, 혹은 5백년을 전, 후를 주기로 형태가 바뀌어 왔는데, 개혁교회 출발이 5백년이 된 지금 교회는 또 다시 새로운 형태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6-37) 여기서 성전을 헐어버려라 하신 말씀에 이어 두 번째 말씀도 나라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 인간은 종교와 국가라는 두 권역(圈域) 아래 있는 사람이란 걸 말해 왔다. 지금까지 두 권역은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대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 왔다. 도리어 두 권역은 인류를 상대로 긍정적인 것 보다는 부정적인 모습이 훨씬 많은 역사의 흔적을 남기면서 진행 되어 왔다. 여기에 예수께서 등장 하셔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를 선언하시므로, 제3의 세계를 제시 하신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그 나라’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려는 여유도 없이 ‘나라’라는 말에 지레 짐작, 지금까지 갖고 있는 국가라는 경험적 지식으로 판단, 예수를 로마 가이사(황제)의 반역자로 몰아 십자가에 달게 했는데, 그 이후 예수의 사람들이라 하는 자들마저도 예수께서 제시한 제3세계 Vision에 대해서는 관심도 갖지 안 했고, 이해도 없이 일반적이고 정통과 전통적 사고로만 판단을 해 왔다.
그래서 기독교란 이름의 종교로만 인식을 했고, 중세교회는 Christendom(기독교제국주의) 이란 국가종교 혹은 종교국가 형태만을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엄청난 오류의 역사를 만들어 십자군 전쟁 등을 일으키면서 21세기가 된 지금도 일반적인 종교와 국가에 대한 여전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라를 말할 때는 항상 세속 국가를 생각했고, 교회를 말할 때는 항상 종교형태만을 생각해온 것이 지금까지의 사람들의 사고였고, 기독교역사였다.
21세기에 들어와 오늘의 교회개혁의 대안으로 예수께서 제시한 제3세계 Vision으로 ‘그 나라’에 대한 언급을 하지만 사람들은 2천 년 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사고나 지금까지의 전통과 정통적 사고로만 인식하고 판단할 뿐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특히 진보적 성향을 가진 신학자라 자칭하는 분들까지도 미래교회를 놓고 고민하는 분들까지도 2천 년 전에 예수께서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의식 속에도 두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항상 생각하는 것은 중세 개혁자들이 천명했던 ‘정종 분리’라는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정통과 전통적으로 내려온 세속국가와 기독교라는 종교인식에만 머물러 있는 현실이 마음을 더 답답하게 한다. 여기서 생각하고 판단해 보라, 예수께서 죽음의 직전에서도 정치적 권력자인 빌라도에게 굽히지 않고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6)고 하신 말씀 아니고는 또 다른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번(2015년)에 벌어진 프랑스 샤를리 테러 사태가 발생한 배후가 무엇인가?
이런 끔찍한 일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을 벗지 못하면 지구촌의 평화는 영원히 있을 수 없다. 서방세계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지만 아람권의 무슬림 사람들을 몽땅 학살을 시키던가 아니면 기독교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몽땅 멸망을 하던가 하지 않고는 지구촌의 평화는 결코 오지 않는다. 자살 폭탄테러라는 신종 전쟁 형태는 전선(戰線) 없는 전쟁이다. 핵폭탄을 만들고, 미사일을 만들고, 최첨단 무기를 만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것이 지살 폭탄테러를 방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구촌을 이런 대결구도를 만든 것이 바로 종교다, 예수가 지상에 오셔서 이런 대결 구도를 만들라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기독교란 종교를 만들기 위한 것인가? 그래서 기독교란 종교를 만든 것인가? 그리고 타 종교는 악의 무리고 사탄의 집단이란 인식을 가지고, 비판하고 조롱하고 힘으로라도 대적해서 굴복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예수고, 복음이고, 교회인가? 그래서 종교란 끝없는 반목과 대결이고 투쟁이 있을 뿐이다.
예수십자가는 종교를 만들어 지구촌을 참혹한 세상이 되게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우리의 사고 의식을 바꿔야 한다. 2천 년 전 도보로 걷거나 낙타 등을 타고 다니던 원시적인 문화시절과 자동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는 시대는 다르다. 손으로 쓴 편지를 사람들이 들고 다니면서 소식을 전하던 시절과 전자매체나 인터넷, 스마트 폰을 통한 소통의 시대는 엄청나게 다른 모습들이다.
2천 년 전 예수의 제안을 이해 못했던 사람들의 사고와 21세기 하나님의 사람들의 사고는 달라야 한다. 이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제3의 세계에 대한 실체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 교회가 해야하는 중요한 과제다. 종교형태는 헐어야 하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를 구현하는 것은 21세기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내야하는 몫이요, 의무다.
교회개혁의 대안이요, 절망의 늪에서 고통 받는 인류에게 생명 벨트를 던져 주는 일이며, 이것은 구속사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패러다임이며,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는 길이다. 당신은 이 글을 읽으면서도 옛 사고에 끈적끈적 매달려 옛 습관인 구습(엡 4:22)을 못 버리고 교회 개혁 운운 하고 있는가? 옛 것을 못 버리는 이유는 지금까지 쌓아온 기반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마15:23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3-24). 그리고 바울은 빌리립보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 2:21)라고 하면서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리라”(빌 2:22).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예수, 복음. 교회, 선교, 구제 이런 이름만 붙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고,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씀 해 놓은 성경이 마태복음 7장21-23절의 말씀이다. 자기 욕망과 자기의지와 자기 철학을 가지고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들은 결코 예수의 사람(제자)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사람) 될 사람은 제1먼저 ‘자기부인’에서 시작 되는 사람들이다. 부자 청년이 예수제자 될 수 없고, 자기 아비 장례식을 먼저 챙기는 자가 될 수 없고,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한 후에 예수 따르는 자가 제자 될 수 없고, 밭부터 갈고,(돈부터 챙기고) 소 길들이는 일에 관심 있고, 장가가는 것이 우선이고,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될 수는 없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생각한 아브라함과 모세와 신앙의 선배들은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믿음’이라는 세계에 마음의 푯대를 삼았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당신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군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3-4) 교회개혁을 위한 병사가 되고자 하는 자는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좋은 병사가 될 수 없다.
기존 세력으로부터 받는 모욕(왕 따를 당하는 일 등)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개혁을 위한 고난을 영광으로 생각 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는 그저 만들어지지 않는 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전통 유대교를 벗어나 신약시대를 열었던 예수나 그분의 제자들은 보고, 중세개혁으로 희생당한 개혁자들의 화형을 당함으로 이루어 진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지 않고는 개혁자의 길을 갈 수가 없다.
우리의 근대사에서 땅의 나라 독립을 위해서도 희생의 길을 선택했던 독립투사들의 용기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역사는 영광과 평안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위험스럽고, 죽음과 같은 희생에서만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길게는 2천년, 짧게는 5백년 이 뿌리 깊은 전통 앞에서 영광과 평안을 누리면서 개혁의 새 역사를 얻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개혁이라는 벽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개혁을 공감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믿고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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