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침례교회 설립자 “파올링 선교사”
100년 장자교회, 강경침례교회
파올링(E. C. Pauling)선교사는 1895년 미국 침례교회 계통의 선교단체 “엘라 딩 기념선교단”에서 제1진으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 중 한 분이다. 엘라 딩 선교단(Ella Thing Memorial Mission, ETTM)은 미국 보스턴에 있는 클라렌돈 침례교회 교인(실업가), 딩(S. B. Thing) 씨가 그의 외동딸 엘라 딩을 기념하여 만든 선교단체였다. 이 선교회는 1895년 파올링 부부와 가데린(A. G. Gardeline)양을 한국에 파송했으며, 다음해 두 번째로 스테드맨(F.W.Steadman)과 에클스 및 엘머 선교사 등을 파송했다.
최초 침례교회 강경교회 설립
침례교단 계통에서 제1차로 내한한 파올링 선교사 부부는 처음에 서울에서 전도용 쪽지를 돌리며 노방 전도를 시작하였으나 선교 실적은 부진했다. 그러나 지병석이라는 분을 전도하여 침례하게 되어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교회를 설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파올링 선교사 일행은 서울을 기점으로, 서해 바다를 거쳐 금강 하류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강경과 공주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전도 활동을 계속했다. 그 결과 한국 침례교 최초의 강경침례교회를 창립하고 예배하게 되었다. 전은식 목사는 그의 논문에서 "한국에서 침례교회를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엘라 딩 기념선교회에서 파송한 파올링 선교사 일행이다.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는 1896년 2월 9일 파올링 부부와 지병석씨 등 5명이 예배를 드렸던 논산시 강경읍 북옥동 137번지에 세운 강경침례교회이다"라고 발표했다. 한편 침례교 전국 총회(1998)는 '북옥동 137번지'를 '침례교단 사적지'로 지정했다. 이곳은 '강경산' 또는 '옥녀봉'으로 불리며, 금강과 논산 벌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경치가 좋은 명소로서 특히 여름의 일몰이 아름답다. 그는 1899년 1월 11일 그의 아들이 사망한 이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 최초의 침례교인 지병석 집사
강경침례교회는 깊은 역사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다. 2007년 교단의 연감 발간 이후에야 강경침례교회가 최초의 교회로 인정받은 까닭도 있다. 장자이면서도 장자권을 주장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세월이 100여 년인 것이다.
1895년 그해 겨울 서울에서 지병석을 전도하고 침례를 주었다. 바로 최초의 침례교인이 된 지병석이다. 지병석은 인천에서 강경으로 배를 타고 오가며 포목장사를 했는데 파울링 선교사 부부와 아만다 가데린 선교사, 지병석과 그 부인 천성녀 다섯 명이 강경 북옥동 136번지 지병석의 자택에 모여 주일예배를 드린다.
1896년 2월 9일의 일로 강경침례교회의 시작이다. 파울링 선교사 부부는 1897년 북옥동 137번지에 교회를 신축하고 1899년 개인사정으로 미국으로 영구귀국 하기까지 한국 강경에서 기독교한국침례회를 창립하고 3개의 선교지를 설립했다. 제2대 담임으로는 스테드만(F.W. Steadman) 선교사가 부임했다.
스테드만 선교사는 일본과 공주에서도 활발한 선교사역을 펼쳤다. 1899년 여름 최초의 침례식을 금강변에서 거행했는데 당시 목사 안수를 받지 못했던 스텐드만 선교사는 군산에 있는 남장로교 부위렴(Bull William) 선교사를 초청해 거행했다. 그 당시 침례를 받은 사람이 홍봉춘, 장교환, 김치와, 고래수 등이다. 그리고 스테드만 선교사는 1900년 캐나다로 귀국하게 된다.
강경교회, 제 3대 부임한 펜윅 선교사
제3대 담임으로 부임한 펜윅 선교사는 1901년 신명균 목사와 함께 원주에서 강경으로 내려온다. 펜윅은 1905년 공주교회 내에 성경학원을 개설해 신명균 목사에게 원장직을 맡긴다. 펜윅 선교사는 자신이 훈련하여 키운 문서순회전도자를 각처에 파송해 복음을 전파하며 순회전도를 실시해 31개의 교회를 일구었다.
교단조직의 필요성을 느낀 펜윅은 한국에서의 교단설립을 목적으로 신명균 목사에게 교회교칙 초안을 구상하도록 하고 1년 이상 연구하여 1906년 10월 6일, 충남 강경에 모든 동역자와 교인들을 회집한다.
최초의 침례교단 총회에 해당하는 대화회(Conclave)를 창립한 날이다. 이날 14장 46개조의 회칙을 만들고 교단 명칭을 ‘대한 기독교회(Church of Christ in Corea)’로 짓는다. 이후에 ‘동아기독교’로 불리던 오늘의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전신이었다.
이날 총회에서 펜윅은 초대 총회장격인 감목(Director)으로 선출되어, 신명균을 복사로 홍봉춘 장기영을 감로(장로)로 장석천을 교사로 임명하고 구역을 원산 강경 공주 영동으로 확정했다. 또 한태영과 4명을 간도로 파송, 만주선교를 시작했다. 1907년에는 영동 울진에 손필환, 전치주, 전치규, 남규연을 보내 선교를 시작했고, 김재형과 김경춘을 간도로 파견하는 등 활발한 선교사역을 계속했다.
펜윅은 1909년 장석천 손필환을 목사로 안수해 밀양, 진주, 영광, 법성포, 무안, 제천, 단양으로 전도 활동을 계속하게 했다. 1910년 강경에서 대화회를 소집했을 때는 4개월 동안에만 무려 35교회가 설립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펜윅은 1914년에 제9회 대화회(총회)를 원산에서 개최하고 9년 간 역임하여 오던 감목(총회장)직을 당시 강경침례교회 이종덕 목사에게 위임함으로써 한국인을 제2대 감목으로 선임했다.
제4대 담임인 순교자 이종덕 목사
일제 당시 강경침례교회는 옥녀봉 아래 위치하고 있었다. 1939년 일제의 기독교 말살 정책 하에 교회 건물을 강제적으로 빼앗아 폐교, 철거하고 4천여 평의 토지는 증여 형식으로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가 몰수했다.
광복 후인 1945년 제4대 담임으로 취임한 이종덕 목사는 홍교리 114번지에 있던 일본인들의 사찰을 매입해 교회당으로 사용했다. 1946년 9월, 강경침례교회에서 제36회 대화회를 열어 일인체제인 교단 정치를 회중정치 체제로 전환했다. 이종덕 목사는 강경침례교회 내에 고등성경학원을 설립해 후진을 양성하는 신학교육을 실시했다. 1949년 총회에서는 동아기독교로 부르던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했다.
이종덕 목사는 1950년 6·25동란 발발 후에도 교회와 교단을 지키고자 피난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목사임을 크게 적은 명함을 들고 인민 위원회와 내무서 등을 찾아가 신분을 밝히고 전도했다. 9월 28일, 공산당이 퇴각하던 날 밤 체포되어 금강변 갈대밭에서 총살형 당해 순교했다.
강경교회는 중부지역 선교 발판
최초의 침례교회이면서 중부지역 선교에 발판이 됐다는 점이다. 충청도와 호남을 통틀어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다. 보통 다른 교단들은 서울 정동 지역에 첫 교회를 세우거나 거점으로 삼고 선교를 시작했다.
파울링 선교사가 서울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이미 서울에도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만난 지병석 씨가 침례를 받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의 집이 강경이고 당시 강경은 아주 큰 상업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불모지라 자연스레 강경에 선교거점이 마련된 것이다.
1809년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선교지 분할협정을 맺은 ‘교계예양’ 협정에 따라 한반도의 선교지를 분할하자 다른 교단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개척선교에 목표를 두고 원주, 만주, 간도, 시베리아, 몽고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강경침례교회는 2007년에야 최초 교회로 인정받게 되었다. 강경침례교회 제13대 담임인 박창근 목사님이 1992년도에 강경 교회 역사를 찾았다. 당시 지병석 집사 둘째아들 지복남 씨를 만나 증언을 들었다.
“1896년 2월 9일 주일 , 집에서 미국 북침례교 소속 선교사들인 파울링 부부와 아멘다 갈데린 선교사, 부모님 이렇게 5명이 예배를 드렸다.”고 아버지에게서 들은 바를 전했다. 6·25전까지만 해도 ‘주일’이라는 단어는 쓰여 지지 않았다. 음력으로 따져서 상순, 중순, 하순을 썼다. 일주일 단위는 미국 선교사들의 인식이다.
2월 9일이 주일인지 계산해보니 정확히 주일이었다. 그것을 밝혀낸 것이 2007년 1월 31일이다. 이후 총회와 신학대학교에 확증을 받아 교단 요람에 공식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 국내 최초 침례교회 예배처소는 선교 역사적 관점에서나 근대 역사적 사실로도 매우 소중한 곳이며 우리 민족사적으로 볼 때도 선교사와 성도들이 애국애족 정신과 희생정신으로 믿음을 지키며 박해와 수난 받았고 기꺼이 목숨을 바친 순교의 피가 흐르는 곳이기에 매년 수 만 명씩 순례자들이 방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