追悼 国際ジャーナリスト・後藤健二さん
国際ジャーナリストの後藤健二さんがイスラム国に殺害されたとみられる動画が、日本時間の2月1日早朝に公開されました。日本政府はこの動画が本物である可能性が高いとしています。これが事実であるならば、深い悲しみを覚えます。ここに、後藤さんのご家族に謹んで哀悼の意を表したいと思います。悲しみに沈むご家族の内に、主なるイエス・キリストが共にいて慰めと平安を下さいますように。
昨年10月末にシリアに渡航したとされる後藤さんからは、ちょうどその時期、毎月1回の掲載を予定していた連載コラムの最初の寄稿「戦争に行くという意味」を頂きました。これが最初で最後のコラムになってしまうとは、想像すらしていませんでした。
後藤さんの霊は、今、神様の御許(みもと)にあります。数カ月にわたる恐怖、不安から解放され、安らぎを得ていることでしょう。
「そのとき、わたしは玉座から語りかける大きな声を聞いた。『見よ、神の幕屋が人の間にあって、神が人と共に住み、人は神の民となる。神は自ら人と共にいて、その神となり、彼らの目の涙をことごとくぬぐい取ってくださる。もはや死はなく、もはや悲しみも嘆きも労苦もない。最初のものは過ぎ去ったからである』」(黙示録21:3〜4)
聖書は、天国についてこ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後藤さんは、たくさん流した涙がぬぐい去られ、悲しみも嘆きもない場所にいるのだと思います。
しかし、この世に残された私たちには、それを知りつつも、後藤さんを失った悲しみが残ります。もう後藤さんにこの地上で会うことができないのか、彼の口から話を聞くことはできないのか、もう二度と別れの握手を交わすこともできないのか・・・。
後藤さん、どんなに苦しかったでしょう、どんなに寂しかったでしょう、どんなにつらかったでしょう、どんなに無念だったでしょう・・・。
昨年5月のインタビュー記事を何度も読み返しました。あの時もシリアに向かう前日でした。「今回は、今までで一番危険かもしれない」。そう言って、少し緊張した横顔を見せた彼を今も忘れません。それでも、数週間後に帰国した後藤さんは、いつものように時折SNSやメールを通して連絡をくれました。テレビでの出演も多く、元気で活躍している姿に安堵したものです。
別れ際はいつも「気をつけてくださいね。またお会いしましょうね」と声を掛けました。後藤さんは決まって「大丈夫。無理はしないから。またお会いしましょう」と笑顔を見せてくれました。そう、あのシリア入国前に見せた「必ず生きて帰りますけどね」と語ったあの笑顔です。誰にでも安心感を与えるような温かなあの笑顔に、もう会うこともできないと思うと、寂しさで胸が張り裂ける思いです。
インタビュー記事の中で、「もし、取材先で命を落とすようなことがあったとき、誰にも看取られないで死ぬのは寂しいかなとも思いました。天国で父なる主イエス様が迎えてくださるのであれば、寂しくないかな・・・なんて、少々後ろ向きな考えで受洗を決意したのは事実です」と語っていた後藤さんを思い出します。この言葉を話し終えた後、少しだけ寂しそうな顔をして、クスッと笑ったように見えました。昔のことを思い出して恥ずかしかったのか、それとも「そんなこと、起こるわけないだろう」と自答したのか・・・。
荒い岩砂漠の土の上にひざまずき、ナイフをかざされ、死を前に何を祈り、何を思ったのか・・・。今は、推測しかできませんが、少なくとも彼が最期に遺した「この内戦が早く終わってシリアに平和を・・・」という言葉に嘘はないと思います。
「関心を持ち続けてほしい。シリアで起こっていることは、『遠い国で起きていることで、われわれ日本人に関係ないこと』ではないということを忘れないでほしい。なぜ僕がカメラを向けたときに、シリアの人々は話をしてくれるのか? それは、彼らがその映像を通して、日本にいる人たちに訴えたいことがたくさんあるからなのです」と、多くの講演会で後藤さんは語っていました。
彼が命を懸けて伝えたかったのは、イスラム国の恐ろしさでも、政府への不満でもなく、「なぜ、こんなことが世界で起きてしまっているのかを真剣に考えてほしい」ということではないかと思うのです。「分かち合い・奉仕・愛」の気持ちが世界中の人にあれば、あんな残忍な事件は起きないはずです。われわれ一人ひとりにできること、それはあらゆる状況下で暮らす人々のことに「関心」を持ち続けること。そして、隣人を思い、祈ることだと思います。
「後藤さんはキリスト者ですか?」と、初めて聞いた時のことを思い出します。
「そうです。不敬虔極まりないキリスト者ですが・・・」と、照れたように笑った顔。
後藤さん、あなたは不敬虔なキリスト者なんかじゃありません。立派なジャーナリストであり、立派なキリスト者でした。私たちは、あなたを誇りに思います。
「友のために自分の命を捨てること、これ以上に大きな愛はない」(ヨハネ15:13)
後藤さんと天国で再会する日を期待して。新聖歌508番「神共に在(いま)して」を心静かに賛美します。
また会う日まで また会う日まで
神の守り 汝身(ながみ)を離れざれ
(昨年5月に後藤健二さんをインタビューした本紙記者より)
강연 중인 고토 겐지 씨. 그는 강연 때마다 다양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계속 가져 달라"고 항상 호소했다. 이 사진은 지난해 5월경 촬영됐다. ©日本 Christian Today
'국제 저널리스트' 고토 겐지 씨가 이슬람국가(IS)에 살해된 것으로 보이는 동영상이 일본시간 2월 1일 아침에 공개됐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 동영상이 실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깊은 통애를 느낄 것입니다. 지금 고토 씨의 가족에게 애도의 뜻을 표한다. 슬픔에 빠진 가족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셔서 위로와 평안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작년 10월말에 시리아에 간 것으로 보이는 고토 씨에게, 매월 1회씩 연재 예정으로 칼럼을 처음 받았습니다. 칼럼의 제목은 '전쟁(지역)에 나가는 의미(戦争に行くという意味)'였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칼럼이 될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고토 씨의 영혼은 지금 하나님 곁에 있습니다. 수개월에 걸친 공포,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어 평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장 3~4절)
성경은 천국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토 씨의 흘린 눈물을 씻기시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는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남은 우리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고토 씨를 잃어버린 슬픔이 남아있습니다. 고토 씨를 더 이상 이 땅에서는 만날 수 없고, 당신이 하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없고, 이별의 악수조차 나눌 수 없습니다.
고토 씨,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얼마나 슬펐을까요? 얼마나 원통했을까요...
지난해 5월 인터뷰 기사를 몇 번이나 읽었습니다. 그 때에도 시리아로 향하기 전이었습니다.
"이번은 제일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며 긴장한 당신의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래도 몇 주 뒤에 귀국한 고토 씨는 언제나처럼 SNS나 메일을 통해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TV프로그램 출연도 많고, 건강하고 활발한 모습에 안도했었습니다.
이별할 때는 언제나 "조심하세요. 다시 만납시다"라고 말했던 고토 씨는 언제나 "괜찮습니다. 무리하진 않을 테니깐요. 다시 만나죠"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 때 시리아 입국 전에 보인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겠다"라고 말한 그때의 웃음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안도감을 주는 따뜻한 그 웃음이 떠오르면, (저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슬픔에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입니다.
일본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고토 겐지의 생전 모습.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INDEPENDENT PRESS
그가 목숨을 걸고 전하고 싶었던 것은, 이슬람국가(IS)의 무서움이거나, 정부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왜 이런 일이 세계에서 일어났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다'라는 것이 아닐까요. '나눔, 봉사, 사랑'의 마음이 세계 모든 사람 가운데 있다면, 그렇게 잔혹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여러 (어려운) 상황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 그래서 이웃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토 씨는 크리스천입니까?'라고 처음 물었을 때를 생각합니다. 그때 그는 "그렇습니다. (저는) 불경건한 크리스천입니다만... "이라며 부끄러운 듯 웃었던 얼굴.
고토 겐지 씨, 당신은 불경건한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훌륭한 저널리스트이면서 훌륭한 크리스천입니다. 우리들은 당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장 13절)
聖歌497番 神ともにいまし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