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가깝고도 멀리 있는 것
교회 역사를 돌이켜보면
곽건용 목사(향린교회)
이곳 나성 한인사회에서는 교회 안 다니는 사람 만나는 것이 다니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합니다. “교회 다니십니까?”라고 묻는 사람보다 “어느 교회 다니시죠?”라고 묻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한인 반 이상이 교회에 적을 두고 있다고도 하고 70% 이상이 교회 다닌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국교인 나라를 제외하고 인구의 절반이 기독교인인 공동체는 흔치 않을 겁니다. 나성에서는 교회 다니는 것이 ‘상식’이고 안 다니는 게 ‘비상식’처럼 됐습니다.
이 현상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습니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교회가 소수였을 때 본연의 역할을 했고 다수였을 때 타락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소수였고 권력을 갖고 있지 않았을 때, 곧 교회가 사회 변두리에 머물러 있는 약자였을 때는 교회 본연의 모습을 갖고 있었고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을 했습니다. 정의, 평화, 생명의 가치를 선포하는 예언자의 메시지를 소리 높이 외쳤던 겁니다. 사회가 어디로 갈지 몰라서 갈팡질팡할 때 교회는 바른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부와 권력을 소유했을 때는 세상과 섞이고 세상에 흡수됐고 그래서 타락했습니다.
교회 첫 3백 년의 역사가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교회가 탄생했을 때는 유대교와 로마제국으로부터 이중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자리도 잡기도 전에 그런 박해를 당했으니 기독교인들이 겪은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교회의 ‘역사적 생명’ 또는 ‘영적인 생명’은 살아서 펄펄 뛰었습니다. 첫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그러다가 기쁘게 웃으며 죽어간 순교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쫓겨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카타콤 같은 곳에서 소리도 못 내고 숨죽이고 모여 기도하고 찬송했지만 가슴에서는 그 누구도 뺐을 수 없는 환희와 감사가 넘쳤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렇게 해야 천당에 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독교인 숫자를 늘려서 세력을 잡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화신 예수님이 삶으로 전했던 하나님나라를 자기네 삶 속에서 실현하려는 열정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은 삶을 모두 바쳤던 겁니다.
하지만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고 국교가 된 다음에는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이 벌인 하나님나라 운동이었던 기독교가 제국의 힘을 기반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는 ‘종교’가 됐습니다. 그러자 교회는 급속히 타락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교회는 양적으론 엄청나게 커졌지만 예언자의 목소리는 울리지 않았습니다. 사회가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때 교회는 방향을 제시하기는커녕 함께 방황했습니다. 그 옛날 예언자들이 성전에서 매일 짐승을 잡아 바리는 제사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지만 진정한 하나님 예배는 없었다고 비판한 것처럼 교회도 매일 미사와 예배를 드리고 아름다운 찬송 음률이 하늘 높이 올라갔지만 그게 하나님께서 교회에 원하셨던 것일까요? 오늘 나성의 한인교회들이, 한인 다수가 기독교인인 이곳 교회들이 번제 향기는 짙게 풍기지만 진정한 하나님 예배는 없는 예루살렘 성전이 돼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이름을 찬양하는 노랫소리는 우렁차지만 진정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없는 곳이 된 건 아닌지 두렵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왜 교회가 이 지경이 됐을까요? 그 이유는 ‘기본’이 안 돼 있기 때문입니다. ‘초월’을 추구한다는 사람들이 ‘상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란 얘기입니다. 대체로 신앙은 상식을 뛰어넘고 일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것’을 추구하고 성취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지요. 성령의 은사니 특별한 체험이니 방언이니 신유의 은사니 하는 것들이 신앙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특별한 경험이 신앙적 경험이란 뜻이지요. 어제 뉴스를 보니까 얼마 전에 한 아이가 천국을 보고 왔다고 책도 내고 뭐 그랬던 모양인데 그게 전부 거짓말이라고 고백했답니다. 지금은 그 아이가 거짓말했다고 고백을 했지만 그 동안 그의 말에 속아 책을 사고 거짓말을 두고 설왕설래했던 걸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천국은 그걸 보고 왔다는 사람이 있어야 믿을 수 있는 겁니까?
대개 기독교인들은 신앙이 특이한 것, 신기한 것, 일상생활을 뛰어넘어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걸로 여깁니다. 그런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종교는 비일상적이고 신비한 경험, 일상을 뛰어넘는 경험을 추구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을 뛰어넘는 경험이 그냥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무조건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것은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신앙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그런 일상적인 경험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수학을 하려면 산수부터 해야 하지요. 인수분해도 못하는 사람이 미적분을 할 리 없습니다. 이처럼 신앙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신앙에서도 수학을 하려면 산수부터 해야 한다는 겁니다. 산수 못하는 사람이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 수 있습니까. 그 경우는 ‘우연’이나 ‘요행’이라고 부르지요.
신앙은 상식을 뛰어넘을 수는 있지만 그걸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상식의 정의를 찾아보니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 등이 포함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정의에 동의하실 겁니다. 그럼 신앙에서 상식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방금 말한 상식의 정의에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제대로 이해하고 거기에 적응해서 사는 자세’라고 말입니다.
성서에서 기본적인 상식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책은 잠언과 신명기입니다. 잠언은 “열심히 일하면 부유하게 살고 게으르면 가난하게 산다.”고 말하고, 신명기는 “하나님 계명 잘 지키고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기본입니다. 물론 예외가 있습니다. 욥기가 예외에 관한 얘기입니다. 하지만 예외라는 것은 기본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 기본질서가 없는데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외가 있다고 해서 기본이 기본 아닌 것은 아니고 상식이 상식 아닌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뭘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뭘 원하십니까? 미가 예언자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미가 예언자는 야훼께서 뭘 원하시는지 사람들은 ‘이미’ 들어서 안다고 했습니다. 같은 뜻으로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알만한 것을 모든 사람에게 심어주셨다고 말했습니다. 미가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식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의를 실천하는 일’과 ‘은덕에 보답하는 일’, 그리고 ‘조심스레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신앙에 있어서 상식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어떤 종교가 이런 것을 금지하겠습니까. 종교가 없는 사람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따지고 보면 기독교인의 일상은 상식적인 일들의 연속입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상식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상식을 무시합니까? 상식을 무시해서 되겠습니까? 자연세계에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을 자연의 상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그걸 따르며 사는 게 상식적인 신앙입니다. 또한 인간세계에도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을 따르는 것이 상식입니다. 신앙은 정직하게 사는 것이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며 인정과 자비심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를 도와주는 게 신앙의 상식입니다. 이런 상식은 특별하지 않아도 신앙에 있어서 기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