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예배, 흔들리는 삶"
김진호목사
2010년 1월 11일 현지 시각 오후 4시 53분 9초, 아이티에 진도 7.0의 강진이 났다. 진원지는 수도 포르토프랭스 지표면으로부터 13 킬로미터 깊이였다. 깊은 곳으로부터 흔들린 것이다. 어이없는 장면은 대통령 궁이 붕괴된 모습이었다. 그때 나에게 스쳐지나가는 마음의 그림이 있었다. 그것은 그 때로부터 15년 전, 1995년 1월 16일 동이 틀 무렵, 일본 고베시를 강타한 거의 같은 강도의 지진 참사를 소개한 타임지의 사진이었다. 큰 건물들이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있거나 부분적으로 부셔져 있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진이 언제 일어났는 냥 우뚝 서 있는 건물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확실한 기초와 중심 위에 내진(耐震)설계에 충실하게 건축하였기 때문이다. 지진이 많은 알류산(Aleutian) 열도에 속한 일본은 내진설계를 하고 그에 따른 건축 자재를 쓰지 않으면 건축허가를 받을 수 없다.
기초와 중심은 생명처럼 중요하다
우리의 인생도 마치 건축하는 것과 같다. 옛 어른들은 바른 삶의 가치관 위에 서서 정진하고 있지 못한 젊은이들을 향하여 따끔하게 “이 사람아, 중심 좀 잡게나”라고 일침을 가했다. 건물이든 인생이든 그 중심과 그것을 받쳐주는 기초는 매우 중요하다. 기초가 흔들리면 중심을 잃고, 중심을 잃으면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흔들리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필리핀에서 선교할 때, 그리 강하지 않은 태풍이었는데도 흔들리다 못해 뿌리 채 뽑혀서 넘어져 있는 커다란 나무들을 보면서 현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였다. 나무는 큰데 뿌리가 깊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건물의 기초는 나무의 뿌리와도 같다. 뿌리 깊은 나무가 버티는 힘이 있다. 넘어지지 않는다. 인생도 그렇고 신앙도 만찬가지이다.
예배가 흔들리고 있다
예배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만남의 관계를 누릴 수 있도록 주셨다. 예배가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성령의 기름부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배에 있어서 화려한 착각은 예배를 사람이 만드는 프로그램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만드신 것에 인간이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가 만든 예배라는 프로그램에 반응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넘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예배를 통하여 감동을 받아야 할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더 좋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예배 디자인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본주의적인 예배로 기우러지지 않도록 모세성막을 예배 디자인의 원론적인 틀로 제시하셨다. 건축으로 말하자면 빌딩이 올릴 때 세우는 철골과도 같다. 건축을 일컬어서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예배 역시 그렇다. 주님이 예배의 프레임(frame)을 쳐 주시고 우리가 주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라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을 표현함으로서 예배라는 종합예술이 표현된 건축물을 창조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는 습관에 의한 반복되어지는 종교행위가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사랑과 생명이 흐르는 십자가의 도가 분명하게 표현된 철골구조(십자가의 만남들로서 형성된 구조)에 우리를 향한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와 찬양과 경배로 완성된 사랑의 건축물을 헌정해 드리는 종합예술이 예배이기에 예배드리는 자의 창의적인 표현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하나님을 향한 관심과 사랑으로 받으신다. 하나님을 지루하게 해드리는 예배는 결코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릴 수 없다. 하나님은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시고 그 다양성을 통해서 드러나는 표현들을 기뻐하신다.
오늘날의 예배현장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 모습을 만나게 된다. 특별히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중요한 가치로 받아드리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팽배된 시대 속에서는 흔들릴 수 없는 복음적 관점을 중심삼고 다양한 형태의 창조적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동화되지 않으면서 시대를 이해하고 끌어않을 수 있는 포용성이 있는 창조적 예배를 드릴 수 있다.
특별히 예배의 초점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소원인 영혼을 구원하데 목적을 둔 구도자 예배에는 구도자들의 눈높이에서 창조적으로 디자인 된 예배 순서는 그 자체가 구도자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영과 진리로 예배가 되어 올려 지도록 기도하며 드려질 때에 주님은 위로부터 기름을 부으셔서 영혼이 주의 나라로 돌아오도록 역사하신다. 예배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를 들여다보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 문제의 대부분의 원인은 건강한 교회보다는 성장하는 교회에 초점을 두고 예배드리기 때문이다. 예배 내적인 요소보다는 예배 외적인 요소에 공을 들이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대감각을 가진 건축물과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많이 약화되거나 상실된 예배가 흐르기 시작한다. 이러한 예배는 마치 기초와 중심이 부실한 건물과도 같다. 예배의 기초에 균열이 생겼다. 이로 인하여 조그만 문제가 발생되어도 교회의 중심이 흔들리기 쉽다. 예배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힘과 성품이 메말랐기 때문이다. 예배가 삶이되고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할 예배의 중심이 흔들리면 삶의 중심 역시 흔들린다. 교회의 건강모드보다는 성장모드에 중심을 내리고 세워지고 있는 예배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그 근본 원인을 진단해 본다.
1. 신념과 믿음을 혼동하다.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신앙인의 기초가 흔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반석으로 비유한다. 그 이유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람의 내면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신념은 다르다. 그 문자적 의미부터가 그렇다. 신념(信念)은 믿을 신(信), 생각할 념(念)이다. 그러니까 신념이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념이 믿음보다 강조되어지는 예배는 폭탄 같은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롬 1:17) 드려지는 예배가 믿음보다 신념이 강하게 흐른다면 낭패이다. 이런 예배에는 복음은 악세사리가 되어 등장한다. 악세사리는 두드러지게 나타는 나지만 핵심과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악세사리화 된 복음은 표면적인 프로그램처럼 드러난다. 그러므로 선교는 전시효과같이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예배의 중심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정신적 육체적 치유를 보장해 주기도 한다. 사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서의 복음과 진실로 연합된 예배에는 자신이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짐으로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어나는 부분들이지만, 이렇듯 사람의 신념에 의해서 조정되어지는 흔들린 예배로 인하여 생긴 균열 사이로 세상의 누룩과 가치가 들어간 것이다.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d로 충만한 예배와는 달리 신념으로 충만된 예배는 예배를 건축으로 비유할 때에 시멘트에 소금기 있는 바다모래를 썩은 것과 같다. 이러한 아파트들은 건축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건물에 금이 가고 안전에 위협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념이 믿음보다 강하게 나타나는 예배는 이미 복음에서 벗어난 흔들린 예배이다. 예배가 흔들리면 삶이 흔들린다. 그러한 예배로 세워진 교회는 세상이 그 결과를 박혀주는 뉴스거리를 만드는 아픈 결과를 만들어낸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