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목사님들께,
여기 보내드리는 이 호 목사님의 강의를 꼭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어떻게 예수를 믿고 대한민국 건국에 기독교 입국론을 도입했는가에 대한
놀라운 사실들과 복음의 진리의 말씀앞에 아멘으로 저절로 화답하게 하는 놀라운 메세지입니다.
황준석 목사 올림
1898년 24세 청년 이승만은 개화운동을 하다 반역죄로 투옥.
한성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1899년 1월 예수를 믿게 됨.
그것은 대한민국 최초로 양반이, 더구나 이씨왕족이 기독교인이 된 사건이었다.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던 이승만은
선교사들이 넣어주는 책으로 세계정세를 연구하면서
1900년 "코리아 완충지대론"이란 글을 발표.
즉, " 일본은 우상숭배의 나라로서
살인의 영, 죽음의 영, 전쟁의 영에 사로잡힌 일본인들 8000만명은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일본은 먼저는 한국, 그리고 만주, 중국본토를 공격하고,
결국에는 미국 본토를 공격할 것이다..."
따라서 빨리 코리아를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후 40년동안 끈질기게 미국을 설득함.
당시 만주는 일본 영토의 7-8배이고
중국은 30-40배 큰 영토를 가진 나라였고
러일전쟁에서 미국이 일본에게 군자금을 지원할 정도로
두 나라는 동맹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결국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고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
난징에서는 3일간 50만명의 여성들이 강간 살해 당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한성감옥에는 나라를 걱정하던 애국청년들이 많이 구금되어 있었는데,
이승만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이들이 후에 민족지도자로서 활약을 하게 된다.
이들 중 월남 이상재 선생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사자가 와서 말했다...
워싱턴에 있을 때 하나님을 안 믿은 죄,
독립협회 일을 하면서 주변의 다른 사람까지 믿지 못 하게 가로막은 죄,
그런데, 지금 이 감옥에서 하나님을 안 믿고 또 거부하면 그것은 더 큰 죄이다..."
급박한 국제정세 가운데, 이승만은 1905년 곤장 100 대를 맞고 갑자기 석방되어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미국에 가게 됨.
미국에서 이승만은 조지와싱턴대학, 하바드대학 석사,
프린스턴대학 박사과정을 5년만에 마침(미국의 천재들도 12년 걸린다는 과정을...).
당시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 "이승만의 전시중립론" 인데
이는 세계최초의 국제정치논문이었고, 이승만은 세계최초의 국제법 박사였던 것이다.
1차대전이 끝나고 140개 나라들이 독립운동을 했는데,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을 이끌어간 나라는 우리 나라 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의 크리스찬은 인구의 0.1%)
다른나라들은 다 공산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승만은 1910년 국제법과 외교사를 다룬 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을 완성했다. 18세기 영국·스페인 등 유럽 해양 강국들이 전쟁 중 '국제 교역의 중립적 자유'를 법률적으로 어떻게 다뤘는지 살피고, 19세기 미국과 영국 사례를 분석한 논문이다. 윌슨이 졸업식에서 이승만에게 직접 박사학위를 줬다. 한국인 미국 박사 1호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윌슨에게 "학비를 돌려달라"며 엉뚱한 농담을 던졌다. "국제법이란 강대국의 논리일 뿐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데 그런 것을 공부하라고 했으니 등록금을 돌려줘야 할 것 아니냐"고 해 사람들을 웃겼다. 이승만의 논문은 한반도 상황과 무관했지만, 우리 민족이 살 길은 국제법과 외교학에 능통해야 한다는 고뇌를 담은 것이었다.
▶이승만 박사학위 취득 100주년을 맞아 프린스턴대에 '이승만 홀'을 만들자는 운동이 일고 있다. 프린스턴대 한국동문회가 엊그제 "건국 대통령의 흔적을 만들기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모금운동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전직 대통령 중 김영삼 기념관은 지난 5월 거제시 생가 옆에 개관했고, 박정희·김대중 기념관도 국고보조금 174억원과 15억원을 각각 받아 추진된다. 이승만 기념사업에는 30억원이 배정됐지만 기념관 건립 논의는 없다. 백범기념관은 180억원을 들여 2002년 건립됐다. 이념 대립 때문에 건국 대통령을 홀대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이승만의 공과(功過)를 객관적으로 보자는 입장이 학계에서 늘어나고 있다. 말년에 독재를 했지만, "이승만이 4·19때 순탄하게 권력을 내놓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는 평가도 있다. 모교에 '이승만 홀'을 세우려는 모금 운동이 이왕이면 국내에서 건국 대통령을 기리는 캠페인의 불씨가 된다면 더 좋지 않을까.
1898년 24세 청년 이승만은 개화운동을 하다 반역죄로 투옥.
한성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1899년 1월 예수를 믿게 됨.
그것은 대한민국 최초로 양반이, 더구나 이씨왕족이 기독교인이 된 사건이었다.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던 이승만은
선교사들이 넣어주는 책으로 세계정세를 연구하면서
1900년 "코리아 완충지대론"이란 글을 발표.
즉, " 일본은 우상숭배의 나라로서
살인의 영, 죽음의 영, 전쟁의 영에 사로잡힌 일본인들 8000만명은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일본은 먼저는 한국, 그리고 만주, 중국본토를 공격하고,
결국에는 미국 본토를 공격할 것이다..."
따라서 빨리 코리아를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후 40년동안 끈질기게 미국을 설득함.
당시 만주는 일본 영토의 7-8배이고
중국은 30-40배 큰 영토를 가진 나라였고
러일전쟁에서 미국이 일본에게 군자금을 지원할 정도로
두 나라는 동맹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결국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고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
난징에서는 3일간 50만명의 여성들이 강간 살해 당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한성감옥에는 나라를 걱정하던 애국청년들이 많이 구금되어 있었는데,
이승만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이들이 후에 민족지도자로서 활약을 하게 된다.
이들 중 월남 이상재 선생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사자가 와서 말했다...
워싱턴에 있을 때 하나님을 안 믿은 죄,
독립협회 일을 하면서 주변의 다른 사람까지 믿지 못 하게 가로막은 죄,
그런데, 지금 이 감옥에서 하나님을 안 믿고 또 거부하면 그것은 더 큰 죄이다..."
급박한 국제정세 가운데, 이승만은 1905년 곤장 100 대를 맞고 갑자기 석방되어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미국에 가게 됨.
미국에서 이승만은 조지와싱턴대학, 하바드대학 석사,
프린스턴대학 박사과정을 5년만에 마침(미국의 천재들도 12년 걸린다는 과정을...).
당시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 "이승만의 전시중립론" 인데
이는 세계최초의 국제정치논문이었고, 이승만은 세계최초의 국제법 박사였던 것이다.
1차대전이 끝나고 140개 나라들이 독립운동을 했는데,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을 이끌어간 나라는 우리 나라 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의 크리스찬은 인구의 0.1%)
다른나라들은 다 공산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