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창조경제
오늘날 교회당문화 안에서 크리스천들이 드리는 헌금에 대해서 크리스천의 경제문제와 직접관계가 되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한 주제가 된다. 이 문제는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얼핏 생각하면, 망상주의자의 이론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와 교회당교회라는 신앙문화에서는 정말 망상적 이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론에서 이상론으로 생각만 바꿀 수 있다면 가치 있는 새로운 경제이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기독교라는 신앙을 떠나서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지구촌의 인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일에는 한계가 있음을 지금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 질서는 심각한 양극화라는 결과를 만들어 왔고, 이 과정에서 부산물로 나타난 현상은 지구촌의 70억의 인구 중에 약 20%가 넘는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에 노출되어 죽음과 고통 속에서 시시각각 사투를 벌리고 있는 현실은 21세기 지구촌의 심각한 비극이다.
이 비극의 현장에 기독교회와 수많은 종교들이 있다. 그 중에 기독교회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워진 것이라면, 지구촌의 불합리한 현실에 함께 편승해서 희희 낙락 모른 채 지나칠 수는 없다. 돈이 하나님의 권세보다도 능가하는 세상이 되어버렸고, 마침내 교회도 돈의 지배아래 있는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어차피 교회개혁을 해야 한다면 과연 교회는 돈의 지배에서 어떻게 벗어 날 수 있을까하는 문제도 개혁의 대안에서 함께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신앙과 돈과의 관계정립(關係定立)은 필연적 주제가 된다. 만약에 교회개혁과 함께 크리스천의 성서적 경제 질서를 도출해 낼 수 있다면 지금의 자본주의의 경제 질서의 약점을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하고 꿈을 가져 본다. 꿈을 현실로 바꾸려면 어찌해야 가능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먼저 이상적 꿈을 꾸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창조경제’란 말을 천명하고 나섰다. 최근 들어 국가도, 기업에도, 교육계도, 인문이나 자연과학도, 문화예술도, 심지어 농업생산도, 관광 산업도, 패션이나 음식문화도 창조란 말을 안 쓰는 곳이 없다. 그런데 ‘창조’란 말을 안 쓰는 곳이 딱 한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교회이다. 왜 교회는 창조란 말을 안 쓰고, 창조에 대한 의지도 없을까? 여기에는 ‘절대보수주의’란 신학사상의 영향일 수도 있다.
기독교 교회의 출발은 창세기 1장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 창조주는 믿는 자들의 아버지라고 고백한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이다. 창조주를 아버지로 둔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창조의지가 없다면 뭔가 아버지를 담지 않은, 아버지의 유전자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성경의 구속사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인간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유전자에 문제가 생기곤 했었다.
아담이 그랬고, 죽은 아벨대신에 다른 씨로 탄생된 셋의 자손들이 그랬고,(창4:25, 6:1-3), 노아의 자손들이 그랬고(창11:1-),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그랬고(사1:2-6, 계2:9)
중세교회가 그랬고, 지금은 개혁교회를 두고 ‘개 독교’란 말이 나오게 된 지경까지 되었다는 것은 지금의 개신교에도 하나님의 유전자가 변질 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교회개혁이란 말이 나온 것이고,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 교회에 창조의지가 있겠는가?
세상은 창조란 말을 쓰는데, 진작 창조주의 자녀들은 보수주의 운운하면서 창조의지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이단, 삼단하면서 칼을 휘두르니 이건 사탄의 유전자가 침투했다는 증거가 아닐까하고 의심이 조금은 된다. 지금 교회는 어느 계층보다도 창조의지가 발휘되어야 할 때이다. 교회 형태(Form)를 바꾸는 일에도,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시장경제 원리라는 독소적 요소를 대응할 새로운 경제패러다임도 창조의지가 발휘되어야 할 때이다.
사실 우리가 인간의 언어로 창조란 말을 쓰지만 사실은 우리의 아빠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롬 8:15, 갈 4:6) 이미 창조세계 속에서 만들어 놓으신 원리들을 인간들이 발견해 낸 것을 인간 편에서 창조라 하는 것뿐이다. 성경 속에는 이미 담아놓은 새로운 질서들이 있다. 하지만 수백 년 전에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이론에 스스로 갇혀 이것을 전통운운 하면서 보물단지나 된 것처럼 꿈쩍을 안하고 부동자세로 있는 것뿐이다. 이런 모습을 젊은 신학도 들에게서 볼 때는 교회미래가 심히 걱정이 된다.
소위 말한 보수주의란 허무맹랑한 이론이 진리나 된 거처럼 붙잡고 있는 이상 새로운 신앙의 창조는 도출 될 수가 없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그 패턴이 발전해 가는 상황에서 교회만 5백 년 전 사고에 머물러 있다면, 교회미래는 없다. 그 결과는 인류사회에서의 리더십은 상실이 되고, 늙어버린 교회집단은 마침내 사람들로부터 외면된 건 당연한 결과다. 이런 현상이 이미 유럽교회에서 그리고 북미교회가 보여준 현상이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내려온 신학이론들이 거의가 뒤 바뀌어진 것들이 많다. 이미 성경에 담아 있는 말씀들을 이제 발견하고 보니 지금까지 진리로 믿었던 것들이 거짓과 오류투성이란 사실을 발견한 것이고, 성경 속에 감춰 두었던 대안(마 13:44에는 ‘보화’)을 새롭게 발견했다는 점에서 ’창조적 대안‘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개혁과 함께 크리스천의 성서적 경제 질서도 창조경제 질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하면서, 신앙인들의 돈에 대한 가치개념이 바뀌고, 성서적 경제 질서가 인류에게 영향을 미칠 수만 있다면 불합리한 시장경제 원리가 만들어낸 양극화 현상을 극복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재물의 관계는 무엇이라 하는 가를 검토하는 것도 필수적 요건이란 생각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서적 경제 질서가 어쩌면 지금의 시장경제 원리라는 독소적 자본주의 질서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기대를 가져본다. 물론 이런 문제는 우리의 가치관에서부터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지금은 돈의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보다 앞서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권세(능)로만 돌아설 수 있다면(그렇게 믿을 수만 있다면) 인류사에 새로운 경제 질서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져 본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풍요로운 돈에만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자본주의 경제가 인류생활에 도입된 이후 실체(실험)를 통해서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니 이미 실패한 사회주의 경제 질서를 말하는 건가? 하고 오해 할 분들이 있을 런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성서적 경제이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왕에 교회개혁을 말하는 마당에 크리스천들만이라도 성서적 경제관을 가져보자는 뜻에서 언급한 것이니 독자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