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
진정한 회개, 철저한 회개로 성결의 삶을 살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부흥사 가운데 한 사람인 이성봉 목사는 1900년 7월 평남 강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여섯 살 때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돼 이성봉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신앙생활로 훈련을 받았다. 이성봉은 20세가 되었을 때 병을 얻어 3년간 투병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경험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로 중생의 체험을 해 목회자로써의 삶을 결심하게 된다.
어머니의 기도
이성봉 목사는 1900년 평남 강동군 간리에 있는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두 번씩이나 비상을 먹고 자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성봉이 여섯 살 때 집안에 복음이 들어왔다.
그의 어머니는 주일이면 성봉이를 이끌고 40리나 되는 평양선교리 감리교회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지지 않고 다녔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한글을 가르치고 기도문을 써주어 기도하게 하였다. 여섯 살 때는 신약을 한 차례 읽게 되었다. 일곱 살 때는 교회에서 목사님이 “누구든지 성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와서 기도하시오.”하자, 즉시 나가서 기도하여 온 교인을 놀라게도 하였다.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 부활절 같은 때는 언제나 독창과 연설을 도맡아 하였다.
이성봉은 자라서 중화 경의학교에 다니면서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몸이 약한데다 폐디스토마에 걸려 깡다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말랐다. 성봉의 어머니는 황해도 신천장로교회 김익두 목사의 초청으로 신천소학교 교원으로 봉직하게 되자 성봉도 따라가서 학교에 다녔다. 거기에서 성봉은 김익두 목사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고 자기도 장차 김 목사와 같은 훌륭한 부흥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가지 못하자 좌절하여 한때 자살까지 하려 한 적이 있다. 그는 할 수 없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30리나 되는 평양에 가서 팔아 좁쌀 몇 됫박 사다가 입에 풀칠하곤 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말 한 필을 사서 겨울에는 나무 장사, 여름에는 과일 장사를 하여 차츰 푼돈을 모았다.
나이 들면서 그는 불공평한 세상을 원망하고 하나님도 부인하였다. 부모님을 따라 마지못해 교회를 나가기는 하였으나 예배에는 관심이 없고 처녀들을 눈요기하는 재미로 앉아 있다오곤 하였다. 스무 살쯤 되어 마부 노릇을 하면서 아주 곁길로 들어서 버렸다.
술 담배에 화투와 투전 놀음으로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았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너 어려서는 교회도 잘 나가고 착하더니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세상이 어떠니 해도 주님밖에 없느니라. 어서 마음 돌려 예수 잘 믿어야 한다.”, “젊은 놈이 자유가 없는 예수만 믿고 어떻게 살아요. 젊어서는 세상 재미도 보고 한 사십이 되어 믿어도 늦지 않아요.”, “너 그러다가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 맞을까 두렵다.”, “하나님이 계시다구요? 그렇다면 어디 나를 패주시는지 두고 봐야겠네요.”, 어머니는 어처구니없어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탁월한 부흥사로, 투명한 삶과 사역
이성봉 목사는 1930년대부터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사였다. 그는 40여년에 걸쳐 탁월한 부흥사로 사역했지만, 오늘날 자칭 유명하다는 부흥사들과 목회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그 흔한 잡음 하나 없을 정도로, 그의 삶과 사역은 그야말로 투명했다.
많은 사역자들은 오늘도 그를 한국교회의 사표로서 존경하며 따르고 있다. 그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여 공감할 수 있는 깨끗한 신앙의 경주자로써의 삶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성결한 신앙의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이성봉 목사는 자신이 수원교회에서 개척목회를 할 때 경험했던 신비한 신앙적 체험이 그 계기가 됐다고 고백했다. 이성봉 목사는 그때를 29세가 되던 8월 12일로 기억했다.
당시 이성봉 목사는 교회를 개척하고 불철주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과로 때문인지 아니면 악마의 시험인지는 몰라도 몸이 항상 쇠약했고, 오후마다 열이 올랐다 내리는 증상을 겪었다. 그래도 이성봉 목사는 신유(神癒)를 믿고 의약을 쓰지 않고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8월 12일이었다. 그날은 주일이었는데 예배를 마친 후, 이성봉 목사는 다시 끙끙 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너무 열이 올라서 그만 혼몽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 공중에서 뜻밖의 소리가 들렸다. “이성봉 전도사는 이제 살기 어렵다. 아마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때 “내가 죽어?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지? 천국이야? 지옥이야? 천국에 갈 준비가 다 되었나?”라는 생각이 이성봉 목사에게 떠올랐다. 그리고 신학교를 마치고 주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아직 철저하게 회개하지 못한 것이 몇 가지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속히 회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내를 불러 증인을 세우고 숨은 부끄러움을 종이에 적어가면서 자복했다
“임마누엘 특공대“ 전도단 조직
이성봉 목사는 성결교회의 전신이었던 동양선교회가 운영하던 경성성경학원(현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에 1928년 입학해 성경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1929년에 졸업했다. 1931년 성결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36년 신의주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그의 목회는 늘 말씀과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강조해 신의주교회를 항상 살아 움직이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이로써 그의 명성이 서서히 드러나 전국적으로 부흥회 강사로 나서게 되자 총회는 그를 전국 부흥사로 임명했다. 1941년부터 해방 때까지 만주 전도자로 사역하다 해방이 되자 그는 북한에서 성결교회의 재건에 진력다가 해방 이듬해 월남,이남의 성결교회 재건에 크게 힘썼다.
1950년 한국전쟁과 휴전 후 그는 전국교회에 초교파적으로 초청돼 전후 혼란한 사회와 교회,특히 갈 길을 알지 못하고 헤매던 교인들을 영적으로 바르게 인도했다. 그는 '임마누엘 특공대'라는 이름의 전도단을 조직해 산간벽지의 미자립 교회를 순회하면서 부흥성회를 계속 인도했다. 또한 1956년 성결교단 희년을 맞이해 1천 교회 설립을 목표로 전국을 누비며 부흥 성회를 인도했다.
그는 1965년 7월 성결교회 합동총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고 그 다음 달인 8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성봉 목사는 한국이 낳은 위대한 부흥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교단을 초월해서 '한국교회의 전설적인 부흥사로, 한국의 D.L.무디'로 불리기에 충분한, 한 시대에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부흥사로 각인되어 있다.
그는 특히 한국전쟁 후 피폐된 교회와 교인들에게 영원에 대한 소망과 말씀을 통해 위로해 모든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재확인케 했다. 그는 '천로역정'을 주제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바르게 해 나갈 수 있는지를 적시해 주었다.
이목사가 활동했던 일제시대나 해방 이후 한국전쟁 후의 혼란기에는 수많은 부흥사가 나왔으나 그 결말이 좋지 않게 끝난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그 시작이나 끝이 아름답고 귀해 후세의 부흥운동가들이나 목회자들의 좋은 귀감이 됐고 그가 걸어간 길이 목회자와 부흥사들이 걸어갈 길의 모델이 됐다.
평생, 가난한 교회를 위해 헌신
유명한 부흥사들이 주로 대도시, 대교회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반해 이성봉은 농어촌, 벽촌, 특히 양로원이나 한센병자(나병환자) 교회 등 남들이 별로 돌아보지 않는 어려운 교회들을 중심으로 부흥회를 인도함으로써 희망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 소망과 비전을 제시해줬다. 이러한 점은 칭송 받아 마땅한 부흥사 삶의 한 단면이다.
또한 그는 일생을 청빈의 삶으로 일관했다. 그는 한 교회에서 받은 강사료를 다음에 방문하는 어려운 교회에 헌금을 하는 식으로 사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청빈의 정신으로 물질에 대한 욕망을 떨쳐 버렸다. 따라서 적지 않은 부흥사들이 물질적, 성적 스캔들에 휘말려 좋지 못한 끝을 맺는데 반해 이성봉 목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깨끗한 삶으로 일관해 왔다. 그는 진정 세대의 위대한 선생이요, 선배로 길이 남아 있어 우리의 표상이 되고 있다.
이성봉 목사님의 허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