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당교회 조직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구충족을 위한 조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셋의 자손들도(창6:1-3) 노아의 자손들도 (창11:1-4) 열 지파 반의 반역 사건과(왕상12:1-20,25-33) 유대인들이 그러했고, 중세교회가 이 자리에 있었다. 지금은 우리가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교회당교회 실정을 보고, 우리들의 신앙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인가, 자기욕구충족을 위한 신앙인가,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사역자들이 먼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신앙은 내가 필요로 한 신앙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예수 믿어 구원받는 것 좋고, 적당히 헌금 받쳐서 복 받는 것 좋고, 열심히 예배당 섬겨서 신분의 명예(장로, 집사, 권사,) 얻는 것 좋고, 때론 교회를 통해 도움 받는 것 좋고, 소속감을 충족 시켜서 좋기 때문에 믿는 것이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의 신앙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주님이 우리들을 향한 뜻이 무엇인지를 놓고 기도해 본적이 있는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크리스쳔들의 미래를 향한 진로문제를 놓고 그렇게 기도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의 개신교가 개 독교소리라고 듣는 문제를 놓고 기도해 본적이 있으며, 대형교회들의 비리를 놓고 금식 철야 기도를 해 본적이 있으며, 지난번 세 월호 사건을 놓고 통곡해 본적이 있으며, 프랑스 샤를리 테러 사건을 놓고 지구촌의 앞날을 걱정해 본적이 있었으며, 추락해가는 개신교 위상을 놓고 근심해 본적이 있으며, 교회 개혁문제를 놓고 고민해 본적이 있는가?
특히 세 월호사건, 프랑스 샤를리 테러사건 등은 기독교가 배경이란 점에서 근심을 해야 하고, 앞으로 전개될 지구촌의 운명을 놓고 공포감을 가져야 하고, 지구촌의 평화문제를 놓고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지금 나타난 현상들을 놓고, 슬퍼하거나 밤잠을 설치면서 근심한 적이 없었다면 크리스쳔이라는 이름을 가진자들은 예수의 피를 수혈 받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창세기 3장에 기록된 타락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자율적 선택을 행사하면서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서 사단의 유혹을 받아 드리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자유의지’란 말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사실 지금의 크리스천들이 자기 자율적 의지를 가지고 살기를 원할 뿐,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그분의 통치를 받는 백성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할 뿐, 자기희생을 하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히브리서의 소위 믿음 장이란 곳에 등장된 인물들, 그 중의 한사람 모세를 살펴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이러한 정신과 태도가 믿는 자의 모델이다. 이렇게 할 수 없는 자라면 지금까지 예수의 이름으로 삯꾼 노릇한 자에 불과 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창조경제에서도 소개를 했지만, 요즈음 크리스천들은 재물을 팔아 천국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천국(언약의 말씀)을 팔아 돈을 버는 사람들이 되어 있다. 누군가가 말씀(진리) 때문에 기존세력에서 목 베임을 당하고,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되지 않고는 파탄된 관계를 회복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돈이나 자기명예를 탐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들에 의해서 파탄된 관계는 회복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파탄된 상황을 놓고, 금식하고 밤낮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자기 요구를 포기하는 사람, 자기 명예나, 기반이나, 재산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느헤미야는 포로생활에서 황폐한 조국소식을 듣고, 밥을 먹을 수 없었고, 잠을 잘 수 없어서 머리를 풀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밤을 지세 운 날들을 보냈었다(느1:1-11)는 내용을 수 없이 읽고 전하면서 가르치기도 했다. 문제는 삶의 현장에 실천의 열매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자기 밥그릇 챙기는 일 때문에 슬퍼하고 금식기도 한 것이 아니라 조국과 헐어져버린 하나님의 황폐해진 조국 도성을 놓고, 통곡을 하면서 울었던 사람이었다. 그의 슬픔과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고 마침내 하나님은 조국회복의 길을 열어 주셨다.(느2:1-8),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겪어야 하는 아픔이 있는 것이다. 이런것을 알면서도 고난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탄의 소굴처럼 되어버린 기존 틀에 몸담고, 그곳에서 밥을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 조직과 하나님의 관계가 멀어져버렸다면, 누구라도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관계를 회복을 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눈물 골짜기를 거닐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어도 누군가는 이 길을 가야 한다. 지금의 교회 형편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신앙이 아니라 자기욕구에 의한 신앙이 되어 돌이어 하나님을 자기 욕구충족을 위해 인간이 하나님을 부리는 결과를 만들어 왔다. 마치 하나님은 자기 욕구를 위한 부적(符籍)의 하나님으로 자기들이 지은 신당에 모셔 놓고 자기만족을 위한 하나님이 되시기를 바라는 심리에서 출발된 신앙, 이것이 유대인들의 신앙이었고, 지금 교회당교회 구성원들의 신앙이 되어 있다. 불쾌하게 들려 질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심리에서 믿는 믿음이란 아무리 열심이 있고, 많은 기도와 봉사를 하고,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도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믿음이란 내 뜻이나 열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내 의지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고백으로부터 출발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요소 중에는 영접, 인정, 순종, 의뢰라는 4대 요소를 포함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고전1:19) 인간의 얄팍한 지혜로 하나님의 통치 받는 것을 거부하려는 것은 더 무거운 종교의 올무에 걸려들어 종교의 노예 되어 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 점을 깊이 명심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