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성경 바로 읽기 2

by kim posted Mar 1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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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성경 바로 읽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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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19-20 기도응답조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 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성경구절 중에서 가장 오해된 구절이 마태복음 18:19-20이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합심기도'로 읽고,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은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실 '필요조건' 이라고 이해한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특히 적은 숫자가 모여 기도하는 사람들은 힘을 얻는다. 정말 그러한가?

 

마태복음 18장은 남을 실족하게 하는 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용서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한 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주제를 정해 묶음으로 기록한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말씀의 제목을 붙이기가 용이하다. 산상설교(5-7),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13), 말세장(24-25)등등. 그러기에 마태복음 18:19-20 역시 잠언 경구처럼 이 구절만 툭 던져진 기록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마태복음 18장은 천국에서 큰 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면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운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의 요지는 이렇다. 어린 아이는 어른들에게 있어서 하잖게 여겨질 수 있다. 이는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작은 자와 비교된다. 별 볼일 없는 자이기에 그들은 무시당하고 함부로 할 수 있다면 문제다. 이러한 자들은 남을 실족하게 하는 자이다. 남을 실족하게 하는 자는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고 말씀한다


인간에게는 작아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에게는 귀중한 자이다. 세상에서는 제대로 취급받지 못해서 하나님께 어린아이처럼 다가온다면 천국은 오히려 그들의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러기에 작은 자라 할지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왜냐면 그 역시 하나님은 귀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이 작은 자에 하나님의 마음을 99마리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의 갈등이 있다. 남을 실족하게 하는 자는 그렇다면 지옥에 가도록 버려둘 것인가?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작은 자 역시 하나님께 귀중한 존재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지옥에 갈 수 없는 자 역시 하나님을 찾기를 원한다는 이중의 의미를 담은 비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들 역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신다. 이래서 15절에서부터 범죄한 사람을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질제적인 문제를 담고 있다.

 

마태복음 18:19-20은 교회의 권징과 관계가 있다

 

마태복음 16:19에는 교회 곧 믿는 자들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쉽게 말하면 천국을 갈 것인가 지옥에 갈 것인가는 이제는 밝혀진 비밀이기 때문에 누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 교회는 그를 향하여 당신은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하며 천국의 문을 여는 일을 하는 것이요, 믿지 않는다하면 당신은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교회는 천국 문을 닫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바로 이 16:19의 구절이 그대로 18:18에도 등장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 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범죄한 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다시 천국의 백성 곧 구원받은 자의 기쁨을 누리며 계속해서 교회의 일원으로 함께 할 것이로되 회개하지 않으면 범죄한 자의 징계에 대하여 교회가 권징을 행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남을 징계할 때 실족함을 입은 자가 실족하게 한 자를 교회에 알려 그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징계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남을 정죄하는 일은 소홀히 할 수 없다. 증거도 없이 그리할 수는 없다. 그래서 두세 증인을 반드시 세우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교회의 권징이 갖는 목적은 그를 징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여 돌아오게 함에 있다. 그래서 판결을 어느 한 사람에게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두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서 결정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마태복음 18:19-20이 등장한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이라는 말은 유대 공의회에서 법정 판결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필요한 재판관 숫자와 관련이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이 말씀을 이야기 하셨을 때 그들은 이러한 의미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하나님이 의로운 법정에 현현(임재)하였음을 전제한 것이다


마찬 가지로 두세 사람이 법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을 때, 셰키나(하나님의 현현)가 임재하였다고 말한다. 물론 이 구절은 기도하는 것과 관련은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징계할 때 기도하지 않고 하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이 기도는 판결을 내리기 위해 혼자의 판결이 아니라 적어도 두세 사람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것도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 끝에 내리는 판결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다는 그런 내용의 성구가 아니다. 남을 정죄할 때 얼마나 신중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8:19-20은 용서함과도 관련이 있다

 

이 말씀이 끝나자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죄의 용서에 대하여 묻고 있음을 보게 된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15절에서 20절까지 주어진 말씀은 범죄한 자를 벌주기 위한 말씀이라기보다는 용서하기 위한 말씀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죄를 범한 자를 법정에 고소하기 위해 그 사람의 죄를 확증하기 위해 찾아간 것이 아니라 용서하기 위해 찾아가고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5절에 보면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분명히 인정할 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15-17절에 주어진 말씀은 책벌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이 책벌을 정당화하는 말씀으로 남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판결을 위한 기도는 반드시 용서가 전제된 판결이 될 것을 말한다. 17절에서는 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푸는 것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가 이중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듯이 마태복음 18:19-20은 교회의 권징과 관련이 되기도 하지만 용서주고받기를 위한 기도에도 관련이 성경 구절이다. 우리가 가장 하기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용서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용서하기가 싫은 것이다


여기에 기도가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는 구절이 본 구절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신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을 지라도 내게 능력주시는 주 안에서 우리는 할 수 있다.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베드로는 묻고 있다. 만일 범죄자가 회개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당연히 용서하라는 것이다

몇 번이나?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 라도 해야 한다고 예수님을 말씀한다(22) 이 일이 쉽겠는가? 그것도 동일한 범죄라면? 이를 위해 두세 판결자가 되든지, 아니면 두세 증인이 함께 기도하는 것이든, 아니면 상처를 입은 자와 죄를 범한 자가 함께 이든지, 용서를 위한 기도는 용서의 주고받음의 역사를 만들어 내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용서한다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하나님은 문제의 당사자들을 화해시키는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태복음 18:19-20은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문제의 당사자들이 서로를 비난하고 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조용히 마주 앉아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사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놀라운 화해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성경으로 본문이 사용되는 것이 맞다


어떠하든지 마태복음 18:19-20은 두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의미의 구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혼자서 골방에서 기도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기도는 응답될 것이다. 본 구절은 의로운 판결을 위한 기도로 또는 용서주고받기의 기도로, 문제가 있을 때 인간적으로 해결하지 말고 기도함으로 해결하라는 의미로 주어진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예승장로교회 김성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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