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부흥의 불씨 길선주 목사

by kim posted Mar 1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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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부흥의 불씨 길선주 목사

새벽기도회로 한국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다!


 길선주 목사가족.jpg


길선주 목사는 한국을 부흥의 불바다로 만든 1907년 평양 부흥운동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2만 번 이상의 설교를 했고 당시 380만 명 이상이 그의 설교를 들었으며 3000명 이상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무려 60개의 교회를 설립했던 한국 개신교의 살아 있는 증인 이었다


그는 1869년 평안남도 안주의 한 독실한 유교가정에서 출생했다. 당시의 대부분의 한국 가정이 그랬듯이 길선주의 가정도 한학을 존중하며 그 전통 속에서 자녀들을 교육하는 평범한 가정이었다. 자연스럽게 길선주도 어린 시절 부터 엄격한 한학교육을 받았고 후에 지방 관청의 말단 서기로 관직을 갖기도 했었다.


도교에 심취하다

길선주(1869.3.~1935.11.)18693월 평안남도 안주에서 무관인 길봉순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워 한학에 능했고 총기가 상당해서 주변으로부터 기대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청렴결백한 성격의 길선주는 당시 부정부패가 만연된 관청의 모습에 깊은 실망을 느끼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4년 동안 장사를 하다가 그것 역시 일생을 걸만큼 가치 있는 일이 아님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도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교에 많은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신선이 되려고 옥추보경(玉樞寶經)을 읽고 정좌심공(正坐心工)의 훈련을 하고 선약(신선이 되는 약)을 먹는 등, 이를 연마하기 위해 한적한 산속에서 40일을 수도에 전념하기도 했다. 때로는 잠을 쫒아가며 수도에 몰두하기 위해 찬물에 몸을 담그며 산 약수터에서 얼음물을 길어다 눈에 부어가며 책을 읽고 참선에 전념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각막은 파괴되었고 나중에는 책을 읽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모습도 식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장님으로 알려진 길선주 목사가 그렇게 시력을 잃어버린 것은 사실 젊은 시절 그를 그렇게도 사로잡았던 이러한 종교적인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진리를 찾는 길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를 각오를 가지고 있었다.


천로역정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는 그가 평양에서 한약방을 할 때였다. 그는 도교에 몰두하는 동안 거의 동시에 한의학 연구에도 착수했고 후에는 평양에서 한약방을 열 정도까지 되었다. 이때 평양은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던 시기였다


그 즈음 길선주는 도교의 가르침에 회의를 느끼고 좀 더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는 종교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게일 선교사가 번역한 천로역정을 통해 복음을 수용할 준비를 하게 된다. 길선주는 천로역정을 구해 아내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종교적인 노력을 순례의 경험과 동일시한 그는 고행과 시력상실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종교적인 노력들이 완전히 헛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아내에게 그 책을 몇 번이고 읽어 달라고 부탁했고, 자신이 생의 문제와 죄의 짐을 짊어지고 절망 가운데 허덕이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때 서양귀신이 도()를 이긴다.”는 말을 전해 듣고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마침 한때 자신과 함께 도교에 심취했던 친구 김종섭을 만나 그가 야소교에 입교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리고 그는 그의 생을 주께 완전히 굴복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생을 헌신하기로 다짐했다


그는 곧 새사람이 되었다. 영적 평안함과 새로운 평화가 그의 마음에 넘쳤고, 환희가 그의 삶에 찾아왔다. 이것은 그가 잃어버린 시력보다 훨씬 더 소중했다. 길선주는 복음을 접하자마자 고향 안주로 돌아가 믿지 않는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이 새로 발견한 진리를 전해주었다. 그의 전도를 통해 부모님과 친구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 뿐 만 아니라 그는 1907년 대한민국 장로교 신학교에 들어가 1907년 최초의 7명의 1회 졸업생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마포삼열 선교사를 만나다

김종섭을 따라 마포삼열 선교사를 만나서 큰 감동을 받고, 마포삼열은 두 사람에게 한문으로 된 성경을 각각 주었다. 원래 글을 좋아하는 길선주와 김종섭은 그 책을 받자마자 집으로 돌아가서 다 읽고 결단을 내렸다


길선주가 선교사님, 제가 성경을 읽고 깜작 놀랐습니다.”라고 고백하자 마포삼열은 그럼 내일이 주일인데, 여기 가까운 널다리교회에 오시면 더 많은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더 많이 알 수 있다는 기대에 차서 길선주는 친구 김종섭과 함께 널다리교회 참석한 후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였으며 마침내 세례교인이 되었다. 그 후 1898년에는 널다리교회 영수로 임명을 받고 마포삼열선교사의 일을 열심히 돕게 되었다.


장대현교회

길선주와 김종섭이 도가(道家), 선문교를 버리고 야소교로 개종했다는 말에 자연히 교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널다리교회는 더 이상 몰려오는 교인들을 수용할 수가 없게 되자 장대현으로 옮기면서, 그곳에 기역자()교회를 신축하여 장대현교회라 불렀다


1901년 장로 선거가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길선주 영수의 신앙심에 감복되어 그를 장로로 선출하였으며, 다시 마포삼열 선교사는 그 넓은 평안남도 지역에 전도를 해서 교회를 설립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자신이 맡았던 장대현교회는 길선주 장로에게 맡겼다


길선주 장로가 장대현교회에서 첫 월급을 받고 크게 놀랐다. 월급이 바로 6원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동안 운영해 오던 한약방의 수입이 월 80원이었으니 상당한 차이가 났지만, 그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운영하던 약방을 처분하고 장대현교회만 열심히 섬겼다


1905년 장대현교회 대표로 평남대리회에도 참석하는 등 장대현교회 대표자 역할을 하였다. 한편 가는 곳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애국을 외치며 회개운동을 부르짖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우리 백성들은 각성하고 회개하며 정신 차려,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미 민족애가 투철했던 길선주 장로는 장대현교회에서 매주 설교시간마다 민족애를 부르짖었다. 길선주 장로는 그해 9월 평양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계속하여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되었다.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시작

190716일부터 장대현교회는 사경회를 준비하면서 새벽기도를 시작했는데, 한국교회의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한국교회가 특별한 때마다 통성기도로 부르짖는 역사의 시작도 이때 길선주 목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흥사경회 중에 한 건장한 남자가 손을 들고 앞으로 나와서 나는 이모임에서 강도들이 회개한다고 해서 쉽게 잡으려고 찾아온 순검입니다. 강도를 잡으면 한 계급 특진할 수 있어서 왔다가 제가 먼저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며 통회를 했다


이때 길선주 목사가 충격을 받고 큰 소리로 저는 아간과 같은 사람입니다. 제 친구가 병으로 삶을 마감하며 부인과 아이들을 돌봐 주라고 100원을 맡겼는데 그 돈을 제가 써 버렸습니다. 이제야 회개합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여러분 제가 죽일 놈이었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통곡하며 회개를 하였다


마침내 예배당은 갑자기 통회의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길선주 목사로부터 앞장서서 복음을 전하면서 회개의 간증과 통회 자복하는 기도를 드리자 참석한 교인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선교사들 역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면서 불길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으며 가슴을 치는 회개운동으로 장대현교회 사경회는 113일 월요일까지 계속되었고 이어지는 성령운동은 1907년 역사적인 평양대부흥운동의 불을 집혔고 국내 교회들뿐 아니라 서방세계에까지 번져 나갔다


그 후 길선주 목사는 사경회 강사로 여기저기 많이 불려 다녔다. 그는 가는 곳마다 애국심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그의 사상과 행적이 마침내 19193·1운동 애국지사 33인의 하나로 삼일독립운동의 한 축이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살이를 했으나 옥살이 중에 요한계시록 만독(萬讀)을 마치면서 요한계시록을 다 외워버렸다고 하니 그의 열정이 놀랍기만 하다


그는 출옥 후에도 성령의 힘으로 전국을 다니며 사경회를 이끌었으며 간도지방에 살던 우리 동포 교회에까지 성령운동을 펼쳤다. 환경이나 사람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사역하던 길선주 목사는 193511월 평남 강서 고창교회에서 사경회마지막 날 축도하던 중 뇌출혈로 삶을 마감했다. 길목사의 장례식에서는 평소에 그가 즐겨 불렀던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찬송가 364)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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