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사울, 이기풍 목사
“기독교 박해자에게 열렬한 신자로“
이기풍 목사는 1865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1883년까지 개인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을 날을 허송세월하면서 서양선교사들을 박해했다.
특히 그는 1890년 어느 날 평양서문통 네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 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원산으로 피난을 했다.
원산에서도 그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등 못된 짓을 골라했다. 그러던 차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전군보라는 전도인의 전도를 받고는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며 기독교인이 되기를 결심한 것이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 기독교인이 되다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그 후에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구했다. 1894년 그는 슬왈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매서인으로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어 1902년부터 1907년까지는 황핼 안악,문화, 신천, 해주 등지를 도며 조사로 시무했다. 한편 이때 마펫 목사의 권고를 받고 1903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길선주,양천백 등과 함께 최연소자 신학생으로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했다.
제주도에서 선교활동
그가 졸업하던 해에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서경조, 길선주,양전백,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이기풍 목사는 이 독노회의 결의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떠났다.
부인 윤씨와 함께 인청항을 출발하여 목포를 경유해 제주도를 가려고 했다. 목포에 도착해 보니 마침 풍랑 너무 심하여 목포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제주도를 향해 떠나 난항을 거듭한 끝에 1908년 봄에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한편 그의 부인 윤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한편 이때는 이미 정부가 기독교의 선교를 허락한 때이었지만 1899년의 신축교난으로 제주도 주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은 편견은 여전히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주민들의 위협을 당해야 함을 물론이고 굶주림과 생활고까지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복음 전파에만 전심전력을 다했다. 뒤이어 총회에서는 그를 돕기위해 전도인 이관선 김홍련을 제주도 선교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11년 10월 전라노회에가 결성되어 제주도는 1912년부터 전라노회 관할이 되었다. 이기풍목사 일행은 주민들의 온갖 핍박과 방해공작 속에서도 성내교회를 비롯삼양 내도 금성 한림 협제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도서벽지를 통해 복음전파
1918년 그는 전라노회의 부름에 따라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목사로 전임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초창기 교회발전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한편 그는 1920년 전라노회장 및 총회 부총회장에 1921년 제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막중한 책임과 왕성한 활동 중에 그는 신병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성대가 막혀서 말이 작 나오지 않는가 하면 관절염, 귀병 등으로 심한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단 목회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와 요양을 하기도 했다. 1923년 그는 다시 전남 순천교회 목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했고 1924년 고흥교회로 전임되었고 1927년 다시 제주도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청빙되어 재차 부임하였다.
1913년에는 전남 벌교교회로 파송되었고 1934년에는 그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도서벽지 여수군 남면 우학리에라는 작은 섬에 복음을 전파하려 들어갔다. 이외에도 이기풍 목사는 돌산 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으로 순회 전도하면서 교회개척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일경의 고문으로 병을 얻어 순교
일제의 치하에서 민족교회가 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을 때에는 과감히 일제에 대항하여 교회를 굳건히 지켰다. 이러던 중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 그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서 극력 반대했다. 이에 일제는 그에게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순천노회 산하 오석주, 나덕환, 김상두, 김순배 목사등과 함께 1938년 체포당했다.
칠순의 노구를 지탱하기도 힘든데다 일경의 심한 취조와 고문은 그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광주형무소로 압송되기 전에 졸도하여 병보석으로 출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풍은 과로와 고문등으로 이미 건강이 심히 악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칠순의 나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회복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마지막 사역지인 우학리 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했다. 그의 유해는 우학리에 안장되었다.
그러다 11년 후인 1953년 전남노회 주선으로 광주 기독묘지에 이장되었으며,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는 그의 부인 윤함애 사모에게 표창을 주었다. 1962년 12월 25일 신여성으로서 평생 이기풍 목사의 성역을 도와 헌신한 부인 윤사모도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딸 하나가 있다.
윤함애 사모의 유언
1879년 12월 8일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 제주도의 최초 선교사였던 이기풍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제10대 총회장)의 성역을 돕는 사모가 되었다. 아래의 유언은 윤함애 사모님의 막내딸 이사례 님께서 2002년 8월에 옮겨 적은 것입니다.
[윤함애 사모의 유 언]
세상과 짝하지 마라 5분 이상 예수님을 잊지 마라 열심히 교회봉사를 하라 주의 종은 하나님 다음 가는 분이시다.
주의 종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마라. 목사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 미리암과 같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네 인격을 어떠한 방법으로 무자비하게 짓밟고 천대와 멸시를 하더라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끝까지 참아라.
네가 세상을 떠난 후에 심판대에서 예수님께서 판가름을 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참으며 네가 네 자신을 죽여라. 네가 죽어지지 않을 때 남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남을 용서하지 못할 때 예수님도 너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를 제일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이다.
신자의 무기는 감사와 인내와 사랑과 겸손이다. 감사는 축복을 열고 닫는 자물쇠이기 때문이다.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겸손할 수가 없다. 겸손하지 못할 때 성령님은 너를 외면하실 것이다. 제일 무서운 것은 신앙의 교만이다.
우학리 교회 (이기풍 목사가 순교한 당시의 교회)
이기풍 목사는 또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로서 제주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나 그가 우학리교회라고 하는 남해안 작은 섬마을 교회에서 목회했으며, 이곳에서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순교를 당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다.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남도 여천군 남면 우학리 233번지. 여수항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1시간 여 들어가면 그림처럼 다가오는 섬, 금오도(金鰲島). 교통이 발달된 지금도 서울서 열차로 꼬박 6시간이 걸렸고 다시 하루 네 차례밖에 다니지 않는 배를 1시간이나 타야만 닿을 수 있는 땅이다.
일제의 수탈이 기승을 부리던 1908년. 그해 4월 우학리의 몇몇 사람들은 당시 제당(祭堂)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예배당을 지었고 1925년에는 길선주 목사를 모시고 사경회를 개최했으며, 유치원도 운영하는 등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1908년 서울이나 「뭍」의 어느 도시가 아니고 뱃길 먼 작은 섬에 교회가 세워지고 날로 부흥했다고 하는 사실은 새삼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주민 4백여 명에 지나지 않지만 9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우학리교회(이해석목사)에는 지금도 매주일이면 1백30명이 넘는 교인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
주일학교 학생까지 합하면 교인은 2백여 명에 이른다. 마을 주민의 50퍼센트가 이 교회 교인인 셈이다. 이 교회에는 공개되지 않은 몇가지 자료들이 있다. 931년부터 기록된 당회록과 이기풍 목사가 시무할 당시 사용했던 「양은」으로 만들어진 성찬기들이 그것이다.
당시 순천노회 변요한 목사가 소장하고 있다가 교회에 모내온 떡그릇과포도주잔, 잔받침 등 빛바랜 모습들이 세월이 흐름을 소리 없이 말하고 있다. 당시 당회록에는 이기풍 목사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는데, 이 당회록을 통해 이기풍 목사에 대해 이제까지 잘못 알려진 부분도 드러나 교회사가들의 관심도 끌 것으로 예상된다.
이기풍 목사는 칠순이 넘는 노구를 이끌고 1934년 아무도 가기를 싫어했던 이 곳 섬마을로 들어와 복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