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환장로, 옥희 권사 부부의 인생역전!

by kim posted Mar 1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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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세계챔피언에서, 복음 세계챔피언으로"

홍수환 장로, 옥희 권사 부부의 인생역전!


 홍수완 장로 (2).jpg


38년 전 흑백TV와 라디오를 통해 전달되었던 흥분의 목소리 주인공 홍수환. 그 말은 기억해도 그 말의 주인공이 24세 때의 홍수환 선수임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한때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는 유행어가 되어 여러 패러디로 각색되기도 했다


온 국민이 권투에 열광하던 1970년대 ‘45기의 신화로 더욱 유명한 홍수환 선수. 그가 이제 자신의 주먹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크리스천이 되어 복음전파에 앞장서고 있다


홍수환 장로는 프로정신과 도전정신’, ‘누구에게나 한방은 있다라는 주제로 그동안 철저하게 자신의 주먹을 믿고 살아오다가, 왜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었나?”를 간증하고 있다.


우리나라 권투역사의 살아 있는 전설

1950년 서울에서 출생한 홍장로는 1969년 김상일과 프로복싱 데뷔전으로 권투계에 나온 후, 1971년 한국 밴텀급 챔피언, 1972년 동양태평양복싱연맹(OPBF) 밴텀급 챔피언, 1974년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 챔피언으로 승승장구했다


이 세계타이틀전에서 아놀드 테일러를 15회 판정으로 누르고 국제전화로 어머니에게 외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말은 당시 큰 유행어가 됐다. 그러나 19752차 방어전에서 알폰소 자모라에게 4KO패를 당하고, 이듬해 도전했지만 12회에 TKO패해 팬들을 아쉽게 했다


그러나 1977년 세계복싱협회(WBA)가 신설한 주니어페더급(슈퍼밴텀급) 초대 타이틀 결정전에서 홍 회장은 한 체급 높여 출전,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 경기에서 홍 회장은 헥토르 카라스키야에게 24번 다운돼 패색이 짙었으나, 가까스로 공이 울려 패배를 면했다. 팬들은 이길 수 없는 경기라고 자포자기 상태에서 3회전을 맞았다. 그러나 여기서 홍 회장은 기적을 만들었다


금방 쓰러질 것 같던 홍 회장이 순식간에 돌변 카라스키야를 KO로 제압한 것이다. 온 나라가 축제였고, 홍 회장은 ‘45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19782차 방어전에서 챔피언 방어에 실패한 홍 회장은 19801219일 염동균과 마지막 경기로 권투에서 은퇴하였다.


홍수완 장로.jpg



45기의 신화 탄생

19771127일 파나마. WBA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인 엑토르 카라스키야에게 도전장을 낸 홍수환이 링에 올랐다. 카라스키야는 경기 초반부터 소나기 펀치를 퍼부었고 홍수환은 2회에만 4번이나 다운을 당했다


16,000여명 파나마 관중이 카라스키야의 마지막 KO펀치를 기대하던 3회전. 만신창이간 된 홍수환은 불굴의 의지로 레프트 훅을 날렸고, 의기양양했던 카라스키야는 중심을 잃더니 결국 바닥에 드러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복서 홍수환의 ‘45기 신화 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홍수환은 앞서 1974WBA 팬턴급 챔피언인 아놀드 테일러를 15회 판정승으로 눌러 이미 복싱스타가 됐다. 당시 경기가 끝나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한 말은 전 국민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은퇴 후 미국이민

5041(14KO)45패를 끝으로 1980년 은퇴를 선언한 홍 씨는 가정문제로 인해 미국 이민길에 오른다. 당시 스타커플 탄생으로 화제를 모았던 가수 옥희씨와 헤어진 홍수완씨는 본처와 다시 결합해 이민을 선택한 것


미국 알래스카에서 택시기사를 하며 가정을 꾸려나가던 홍 씨는 마약 운반혐의로 구속돼 20년 형을 받을 위기에 처했지만 결국 무혐의로 석방되는 등 고충을 겪는다


그는 당시 교도소에서 만난 수형자의 권유로 성경책을 읽었고 그 때부터 믿음의 싹이 자라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홍 씨는 이후에도 한국인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등 어렵게 생활하다가 1992년 이민생활을 청산하고 혼자 몸으로 한국에 돌아온다


귀국 후 옥희 씨와 다시 가정을 꾸린 홍 씨는 1996년 부인과 함께 세례를 받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이 시기 KBS 권투 해설위원을 맡은 그는 방송인으로의 능력을 인정받아 영화와 드마라 출현을 물론 라디오 DJ로도 활약했다


극과 극의 인생을 살아온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쓴 자서전 누구에게나 한방은 있다(45기 오뚝이 인생경영)’가 인기를 얻으면서 강의도 시작해 지난해에는 기업체 강의만 180여 차례를 했다. 최근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홍수환스타체육관을 개업하고 후배 양성에 나섰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세계챔피언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에서다


그는 복싱 침체와 관련해 신인왕이 한 명 탄생하면 그 선수가 많은 시합을 뛸 수 있어야 하는데도 1년에 1~2번 밖에 대회에 나갈 수 없다면서 권투협회의 대회 운영 방식이 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방송, 강의 등 바쁜 일정에도 간증집회를 위해 지방을 찾는 그. 그는 권투 세계챔피언보다 복음챔피언으로 불리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옥희와의 만남, 그리고 제2의 인생시작

한국 프로권투 사상 최초로 두 체급 세계챔피언을 지낸 홍수환과 1974, 75, 76, 3년 연속 지상파 방송3(KBS, MBC, TBC) 7대 가수에 올랐던 옥희는 77년 홍수환챔피언과 첫 만남을 가졌다. 열애 끝에 불거진 스캔들로 79년 헤어졌던 이들은 94년 재결합해 현재까지도 화목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16년이란 세월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 커플을 보면서 진실한 사랑과 행복이 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가수 옥희는 1974'나는 몰라요'로 데뷔해 77년까지 방송 3사의 가수왕을 휩쓴 유례없는 가수였다


3때 미국으로 건너가 라스베이거스에서 활동했던 옥희는 74년 귀국해 '나는 몰라요'를첫 노래로 크게 히트했다당시는 패티김, 김세환, 하춘화, 정훈희, 윤복희 등 기라성같은 스타들이 활동하고 있던 터라 그 활약은 더욱 돋보였다


TV방송이 대중음악을 주도하는 시기로 가요시장이 급변해 라이브 가수들의 무대가 줄어들면서 '라이브의 귀재' 옥희도 빠르게 잊혀져갔고, 94년 앨범을 마지막으로 가수활동을 중단했다노래에 대한 열망과 대중가수로서의 책임감으로 16년 만에 다시 앨범 '소설 같은 사랑'을 내며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시간'은 놓쳤지만 상처 입은 세월 덕분에 '감정'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홍수완 장로는 옥희에게, 항상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이라 내길 가기가 쉽다고 전한다. 한편 옥희 권사는 "그런 건 왜 해" 이런 말 한번 없이 항상 지지해준다"며 강연회 강사로, DJ, 체육관 관장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했던 중년 이후의 삶을 옆에서 지켜준 옥희 권사에게 간접적으로 항상 감사의 뜻을 전한다고 한다


옥희 권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취미, 성격, 취향까지 똑같았다""음악 좋아하고 골프등 운동 좋아하는 것이나, 둘 다 혈액형이 O형에다가 덜렁거리고 계산 잘 할 줄 모르고, 남을 속일 줄도 모르는 성격도 같다고 한다. 홍장로는 옥희 권사가 만들어주는 음식은 뭐든지 '다 맛있다'고 한다. 오래 결혼생활을 유지하려면 성격이 비슷해야한다"며 여러모로 '천생연분'인 두 사람이 뒤늦게서야 재결합하게 된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홍 장로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며, “가장 천한직업 권투선수출신이 세계 챔피언이 된 것보다도 더욱 소중한 것은, 주님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해 깊은 감동을 준다


링을 떠난 그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1회전 더 뛴 것 때문에 사람들이 널 기억하잖아라고 말해 주었던 절친한 친구의 말을 기억하며, “뒤돌아보지 말자. 난 지금의 나야. 살아야지. 살자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한편 홍수환 장로는 교회와 공무원, 기업체의 초청으로 크리스천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의 인생을 강연하는 강사로 활동 중이며, 서울에서 홍수환 스타복싱체육관을 운영 중에 있다


그는 복싱 침체와 관련해 신인왕이 한 명 탄생하면 그 선수가 많은 시합을 뛸 수 있어야 하는데도 1년에 1~2번 밖에 대회에 나갈 수 없다면서 권투협회의 대회 운영 방식이 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방송, 강의 등 바쁜 일정에도 간증집회를 위해 지방을 찾는 그. 그는 권투 세계챔피언보다 복음챔피언으로 불리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홍수환 장로와 옥희 권사는 [전도서 1213]을 가슴에 새기며 지금까지 인생의 고비마다 여정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귀한 사연들을 기독교인으로서 부부의 신앙심을 전파하기 위해서 동분서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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