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음을 품고 십자가만 자랑하자
(2015년 3월 29일 고난주일)
일본 Togane Home Church 이응주 목사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1. ‘이 마음을 품으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
(1)바울은 성도들의 마음에 품어야 할 마음을 분명하게 알리고 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한 것이다. 이 마음을 품게 되면 모두를 사랑하고 용서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Mind)의 세계는 육안으로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그의 말이나 삶의 모습을 통해서 마음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마음’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마음은 ‘사람의 지식, 감정, 의지 등의 정신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을 말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히 4:12, 롬 8:27). 그리고 하나님의 평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고 했다.
(2)성경에서 마음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인 동시에 인간 내면세계의 중심지이며 윤리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특별히 히브리인들은 정신과 육체를 구별하지 않고 마음을 인간의 가장 내부에 있는 것으로 알고 의지나 감정뿐 아니라 지적 능력이나 육체적인 능력의 원천으로 생각했다.
(3)마음에 대한 원어
(a)구약에서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는 10가지 이상이 되는데, 주로 사용된 단어는 ‘레브’(leb), ‘레바브’(lebab)이다. 신약에서는 ‘누스’(nous,롬 1:28; 7:23; 고전 1:10)나 ‘프뉴마’(pneuma, 마 26:41) 등이 마음이라고 번역되었는데,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카르디아’를 썼다(kardia, 마 5:8, 28).
(b)‘레브’(leb)라는 단어는 가슴 부위 혹은 심장 등 신체 부분을 가리킬 때 쓰였다(시 37:15). 이곳엔 다양한 인간의 감정이 들어있다고 하는데. 괴로움(삼상 1:8; 렘 4:18; 시 13:2), 즐거움(출 4:14; 삿 16:25; 잠 14:10), 근심(신 20:3; 사 7:2), 절망(전 2:20; 애 1:20), 기력(시 40:12), 친밀함(창 34:3) 등으로 희로애락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이 있다는 것이다.
(c)정신적인 작용면에서는 인식(출 9:21; 전 1:13), 통찰(신 8:5; 욥 17:4), 비판적인 능력(수 14:7), 재판하는 능력(왕상 3:9; 대하 19:9) 등이다. 또한 마음은 지혜의 기관(잠 2:10; 16:23; 왕상 10:24)이자 뜻과 계획의 자리라는 것이다(삼하 7:3; 렘 22:17).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실 수 있으신 분이다(시 51:10).
한편 성경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관한 표현도 있는데, 하나님도 마음 안에 감정을 가지고 계시며(창 6:6; 호 11:8) 마음으로 아시고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왕상 9:3; 렘 44:21) 의지와 계획을 품으신다(렘 7:31)고 했다.
(d)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르디아’(kardia)는 신약에서 총 157회 사용되었는데, 누가가 특히 많이 사용하여 누가복음에 22회, 사도행전에 21회를 사용했다. 그러나 디도서, 빌레몬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카르디아’는 내적인 자아를 말하고, 때로는 인칭대명사처럼 사용되었으며(마 9:3; 고후 2:1), ‘나’를 가리키기도 했다(벧전 3:4). 그리고 거듭나기 전의 인간의 마음은 죄가 거하여 지배하는 장소처럼 묘사되었다. 즉 악한 생각이 나오며(막 7:21-23) 불순종하여 회개할 줄 모르고(롬 2:5; 고후 3:14), 굳고 믿지 않으며(히 3:12) 우둔하고 어두워 있는(롬 1:21; 엡 4:18) 곳이라고 했다.
(e)한편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롬 8:27)인 하나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는 사역을 시작하시는 곳도 마음이다(롬 10:10).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듣게 하실 때(행 16:14), 빛을 마음에 비추실 때(고후 4:6)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은 순종함으로 믿음이 있음을 보이며(롬 6:17) 하나님의 말씀을 좋은 마음으로 듣고 지키어 깨닫고(마 13:23) 인내로 결실(눅 8:15)하기도 한다.
(f)잠언서에 나타난 인간의 마음은 한 사람의 내면적인 삶 전체를 묘사하는 단어라고 한다. 그래서 마음은 감정과 이성, 행동과 자발적 의지의 중심을 이룬다. 그래서 마음은 어떤 사람의 정신과 정서, 의지와 행동의 원천이 되는 곳이라는 것이다.
특히 비밀스런 장소인 마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비밀스런 영역인 곳이다(잠 14:10, 13; 23:33; 30:19). 그러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에 인간의 내면은 감춰질 수 없고, 심지어 자신도 모르는 부분을 하나님은 아신다(잠 15:11; 21:2). 인간의 마음은 감춰져 있긴 하나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그는 자신의 참 모습을 확연히 발견할 수가 있다(잠 27:19).
(g)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기쁨과 슬픔으로 대표되는 감정의 파도가 끊임없이 물결치고 있는 곳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기쁜 마음은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하고(잠 15:13) 건강에도 도움이 되며(잠 17:22) 육신의 생명(잠 14:30)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원수가 넘어지거나 엎드러질 때 마음에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잠 24:17). 이것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감정을 조절해야 됨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기 때문이다(잠 24:16-18). 여기서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깊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보게 된다.
(h)이성(理性)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마음에는 지식을 받아들여 저장하기도 하고, 냉철하게 판별하여 사고(思考)하기도 하고, 계획을 세우는 기능도 있다. 잠언에서는 자주 마음의 이성적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잠 2:2, 10; 3:3; 6:21; 7:3; 15:14, 28; 16:23, 23:15).
(i)의지(意志)가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마음의 중요한 기능은 의지로 결단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것이 중요하다(잠 23:26). 순종과 결단은 듣는 것과 관련되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마음에 두는 것은 곧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다(잠 22:17).
(j)신앙의 자리인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받아들이는 곳이 마음이라면 신앙의 자리는 바로 마음이다. 또한 죄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 인간의 마음이기도 하다(잠 21:4).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씻지 못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로만 해결할 수 있다(잠 20:9).
(k)마음에 받은 ‘사형선고’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위기들을 만났음을 고백했다(고후 1:8-9). 그는 이런 절대 절명의 상태를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표현했다. 이는 실제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당했던 환난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는가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고후 11:23-27).
학자들은 바울이 당했던 고난에 대해 몇 가지로 추측하는데, 특별히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라고 말한 것을 근거로 삼는 이들은 사도행전(행 19:23-41)에 나오는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소송사건일 것으로 본다. 다른 학자들은 그때는 바울이 생명의 위협까지는 느끼지 않았다고 보고 그가 당한 고난을 맹수와의 싸움이라고 보기도 한다(고전 15:32).
그러나 바울은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고 살 소망마저 없어져버린 상황에서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9)라고 고백했다.
성경에 사용된 몇 가지 마음의 상태와 내용을
(1)시편에서 순전한 마음(시 11:2), 자신의 죄에 대한 후회(시 34:18; 51:17)를 표현할 때 쓰였다.
(2)잠언서에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강조하거나(잠 17:3) 사람의 계획이 아닌 여호와의 뜻이 실현될 것이라는 경험과 함께 쓰였다(잠 16:1; 19:21).
(3)신명기에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며(신 4:29; 10:12; 11:13) 영적으로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함(신 10:16; 30:6)을 말할 때 사용되었다.
(4)예레미야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요구하며(렘 3:17; 11:8) 그들의 강퍅함에 대해 말했다(렘 3:17; 7:24; 11:8).
(5)에스겔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함을 말하며 돌 같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뀔 것을 기대했다(겔 36:26).
2. 하나님의 본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6-)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본체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1) 본체(本體, Nature)란?
그 사물의 본래의 모습을 말한다. 헬라어로는 ‘모르페’(morphe)이며 ‘(인간, 동물, 생물 등의) 형태, 외부의 생김새나 모양새’ 등을 뜻한다. 헬라 철학에서는 ‘한 존재가 그가 의존하는 다른 존재의 탁월한 본성을 지님으로 영원히 그 본성과 동일시되는 것’을 뜻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형’된 모습을 보여 주셨을 때(마 17:2; 막 9:2),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을 때(막 16:12), 종의 ‘형체’(빌 2:7)를 입기 전에 하나님의 ‘본체’(빌 2:6)로 계셨음을 언급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2)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에 대해서
예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보이신 완전한 겸손은 그가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를 포기하신 데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神性) 상실이나 가현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본체’란 하나님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성을 조심스럽게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다(빌 2:6). 신성이 인성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과정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고 했다.
(3)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에서 ‘동등’(equal)이란 지위나 자격이 같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상을 빌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 2:6-7).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한 것은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요 5:18).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사 40:25).
지위나 자격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세계에서 따지는 것이다. 학벌이나 정치세계나 심지어 자격에 대해서 따지는 세상의 풍속과는 전혀 다른 면에서 신적권위를 가지시고 계신 예수님에 대해서 바울은 성부와 성자의 위치를 확실히 구분해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에서 분명하게 선을 그어서 관계를 설명하면서 구체적으로 ‘종의 형상을 빌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했다.
3. 사람의 모양으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이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므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창 2:7). 흙으로 창조된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창조된 사람이 아니고 ‘성령으로 잉태’(마 1:18)되어 창조주로서 ‘자기 땅’(요 1:11)에 오신 것이라고 요한은 말씀하고 있다.
목적은 살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죽으려고 오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태어나지만 예수님은 죽기위해서 오신 것이다. 왜 죽으려고 오셨는가? 인류가 죄라는 멸망의 강에 빠져서 떠내려 가는 것을 막고 또한 악한 마귀의 종으로 저주를 받아 지옥이라는 불 못으로 떨어지고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라는 이름에 대해서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함이심이라“(마 1:21)고 했던 것이다.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죄를 용서해주시고 깨끗이 씻어 주신 것이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고 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Cross) 위에“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를 붙였다는 것이다(마 27:37).
유대인들도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생각하였다(신 21:22-23, 갈 3:1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셨으며 십자가의 극한 고통과 수치를 참으셨던 것이다(마 27:32-44; 눅 23:26-43; 요 19:17-24). 그래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속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고전 1:17이하; 갈 6:12; 엡 2:16; 골 1:20; 2:15).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오라고 명령하셨다(마 16:24, 눅 9:23).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4.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1)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이다. 그 이름을 주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게 하신 것이다. 여기서 上天下地와 땅 아래 즉 이미 무덤에 들어간 자들 모두가 그의 음성을 듣고(요 5:27-29) 심판대(롬 14:10)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심판대 앞에 선 모든 사람들이 무릎(Knee)을 꿇게 될 것이다.
(2) 무릎을 꿇는다는 이 단어가 성경에서 상징적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아이를 무릎에 받는다는 것은 자기의 자녀로 인정함을 의미했다(욥 3:12). 할아버지가 아이를 무릎에 받는다는 말은 아이를 양자로 입양한다는 뜻이었고(창 50:23) 다른 여인에 의해 낳은 아이를 본부인이 무릎에 받는다는 것은 그 아이를 자기의 자녀로 받아들임을 나타내는 행위였다(창 30:3).
‘무릎을 꿇다’는 말은 성경에서 자주 쓰인 말로 하나님께 대한 간구, 기도하는 표현에 많이 쓰였다(왕상 8:54; 왕하 1:13; 대하 6:13; 스 9:5; 사 45:23; 단 10:10; 눅 22:41; 행 7:60). 또한 무릎을 꿇는 행위는 예배의 자세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했다(마 8:2; 17:14; 막 1:40; 10:17; 14:35; 눅 5:12; 롬 11:4; 엡 3:15; 빌 2:10). 연약함을 표현할 때는 ‘무릎이 약하다’(욥 4:4; 시 109:24; 히 12:12)라고 말했고 ‘무릎이 서로 부딪힌다’는 말은 ‘두려움’을 뜻하는 것이었다(단 5:6; 나 2:10).
(3)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왜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는 것인가? 이유는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십자가위에서 죽으신 주님은 순종보다 더 강한 표현인 복종하신 것이다. 영어로 복종(①obedience, ②submission ③subordination)이란 단어 중에 ‘obedience’로 대부분 쓰여 졌다. 그리고 한글 사전에서 복종은 ‘명령이나 의사를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따르다. 혹은 남의 명령이나 의사(意思), 또는 규칙 따위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따름이라고 했다. 그러나 복종이나 지배 관계는 서로에 대한 적대감으로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다고 하면서 유태인에게 있어 부자 관계는 아비의 일방적인 권위와 아들의 절대적인 복종으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또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와 다수의 의지에 대한 복종과 평등을 강조하는 민주주의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라고 했다.
5. 결론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
(1)십자가는 사형집행의 도구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고 했다. 즉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심으로 인간이 죄를 아무런 댓가 없이 용서해 주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롬 5;8)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공의를 실천하신 것이다.
(2)그리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고 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죄를 지은 인간은 모두가 죽어야 하고 멸망 받아야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요 6:40).그러므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죽게 하심으로 인간을 구원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신 것이다(요일 2:2).
(3)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화평이 되신증거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엡 2:13-14)고 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악의 담이 허물어지고 화평케 된 것이다.
(4)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믿는 자가 받는 새로운 별칭이 있다.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롬 5:9)고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 죄인이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의로움의 표현인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19-24)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엡 1:7)을 받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롬 3:24)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전 10:31)는 각오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울의 신앙과 신학의 사상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만 자랑의 내용 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자랑하기로 작정한 내용은 오직 십자가와 예수뿐임을 분명하게 밝혔던 것과 같이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이 자랑한 예수와 십자가 복음만 전하면서 살아간 것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고전 2:2, 갈 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