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과 부활절에 대한 소고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절기 가운데 부활절, 감사절, 성탄절이 있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 감사절은 추수기에 얻은 열매로, 그리고 부활절은 겨울이 지나고 꽃이 피는 봄을 맞이하는 시기에 이스터 축제를 가진다. 무엇보다 부활에 대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유는 죽음 후에 영생의 세계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로 살아나시고 사망의 권세에서 부활하셔서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신 것이다.
신약성경에 부활이라는 단어가 40번 나오고 있다. 마태복음 22장 23절에 처음으로 나오는 부활(Resurrec-tion)이라는 말은 ‘죽었다가 다시 영원히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고전 15:4, 52 참고). 그러나 죽었다 다시 죽을 몸으로 되살아나는 소생(蘇生)과는 다르다(막 5:35-43 참고).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할 만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 내용이다. 신약성경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는‘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계 20:6)라고 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 기간 동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라고 선언하셨으며, 승천하신 후에는 “(나는)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8)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죽으심)과 함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모두 동등하게 강조되어야 할 내용이다.
1. 원어상의 의미
원어상의 의미로 ‘일어서다’, ‘오르다’, ‘깨우다’의 의미로 사용되는 헬라어 ‘아나스타시스’(anastasis)와 그 명사형인 ‘아니스테미’(anistemi) 그리고 ‘에게이로’(egeiro) 등의 단어들이 부활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물론 이 단어들이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지만(마 22:24; 26:62; 27:53; 막 14:57, 60; 눅 4:14; 22:45; 행 7:18 등), 대부분은 부활에 대한 풍부한 신학적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 가운데 ‘에게이로’는 수동태(일으킴을 받는다)로 예수님의 생명의 부활에 대해 주로 사용되었으며, 반면 ‘아니스테미’와 ‘아나스타시스’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소생시킨 것과 종말론적이고 우주적인 부활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제외하고 두 동사의 주체는 거의 언제나 예수님이고, 이들이 타동사로 사용될 때에는 주로 하나님이 주체가 되며 예수님은 객체가 된다.
이것을 일괄적으로 적용시킬 수는 없지만 예수님에 대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행위는 ‘에게이로’에 의해 표현되며, 인간 경험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묘사할 때에는 ‘아니스테미’가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실 경우,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죽어 장사된 주께서 다시 육체를 지닌 생명으로 일깨움을 받는다는 것으로 말해진다(행 2:31, 34; 엡 5:14).
예수님의 부활이 단지 하나님을 주체로 하고 예수님을 객체로 해서 묘사되는 것만은 아니다. ‘에게이로’는 중간태로서 자동사의 의미를 취하여 예수님을 주체로 만들기도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는 것이다(롬 6:9; 8:34; 막 14:28; 16:6; 마 27:63). 이러한 용법의 변화는 부활시키는 능력이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는 것이지만 아버지와 하나이신 아들 역시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구약에서의 부활사상
구약에는 부활에 관한 명확한 내용이 없으며, 특히 오래된 책일수록 그렇다는 주장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와 거리가 멀다. 성경의 초반부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영생하도록 창조되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특히 창세기 5장은 모든 사람들의 일대기가 ‘죽었다’로 끝나고 있지만 하나의 예외적인 인물 에녹을 등장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또한 영혼의 미래 상태에 대한 신앙의 표시로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는 매장하는 행위와 명백히 구별되는 표현이다(창 25:8-9; 35:29; 49:29, 31, 33).
(1)족장들의 부활사상
족장들은 죽은 자들의 시체를 소중히 취급했는데, 이것은 부활에 대한 일종의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창 47:29-31; 50:25; 출 13:19; 히 11:22).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사실을 부활 신앙과 관련시키고 있다(히 11:17-19).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님이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인용하셨던 것에서도 구약의 부활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32). 이것은 족장들이 단순히 어떤 존재의 상태로 계속 생존해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그들이 부활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2)욥이 말하는 부활의 사상
욥기 19:26의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나의 육체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구절은 욥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신약에서 시편 16:8-11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용되고 해석되었다(행 2:27; 2:31). 또한 ‘스올’(sheol)에 넘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시편 기자들의 소망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확신에 기초한다. 이러한 확신에는 부활에 대한 분명한 소망의 씨가 포함되어 있다.
(3)선지서에 나타난 부활사상
선지서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빈번하게 부활 사상과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2)는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과 함께 이사야 25:6-8, 에스겔 37:1-10과 다니엘 12:2은 구약의 부활 사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본문들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라”(단 12:2).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가졌던 영생의 소망은 단지 영혼이 사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이었다. 그것은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전인적 부활을 가리킨다. 다만 ‘생명과 썩지 않을 것’(딤후 1:10)이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밝히 드러났지만 구약에서는 아직 완전한 빛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을 뿐이었다. 부활 신앙의 사상적 기원을 포로 시대나 그 후의 페르시아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부활 사상이 족장 시대로부터 전수된 성경의 가장 오래 된 개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에 의해 거부될 수밖에 없다.
3.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주장들
신약에서의 부활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나머지 내용들은 이에 대한 부연 설명에 불과하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견해들도 있었다.
(1)도적설로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갔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범인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면 유대인들이나 로마 당국자들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설득력이 별로 없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다면, 그러한 ‘조작행위’로 제자들의 삶에 그토록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설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듯이, 자신의 양심을 괴롭히는 거짓말보다 인간을 더 소심하게 만드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고의적인 거짓말이 한 무리의 겁쟁이들을 그처럼 용감무쌍한 사도로 변화시켰으며,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했다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또한 유대인들이나 로마 당국자들이 시신을 숨겼다는 주장은 더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얼마 후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담대히 증거하고 다닐 때 왜 그들은 썩어가는 예수님의 시체를 내보이며 예수님이 확실히 죽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상당한 뇌물을 받았던 파수꾼들의 거짓 증언이었음을 밝혀 주고 있다(마 28:11-15).
(2)기절설로는 십자가에서의 고통과 심한 출혈로 인해 잠시 기절했다가 무덤의 서늘한 기운과 향료의 좋은 냄새, 그리고 몇 시간의 휴식을 통해 다시 소생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막 15:44) 하고 이상히 여겼다는 본문을 근거로 한 것이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빨리 죽으셨다는 것은 사실이다. 성경은 “군병들이 …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2-34)라고 분명히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3)무덤 오인설로 막달라 마리아가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을 찾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무덤을 잘못 찾아갔다는 주장으로, 비어 있는 무덤을 보고 울고 있던 중 희미한 문지기의 모습을 보자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이때가 ‘해 돋은 때’(막 16:2)라고 말한다. 이로 보아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잘못 찾을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장은 유대인들이나 제사장들이 ‘새로운 종교’가 확산되고 있을 때 왜 예수님의 시신이 묻혀 있는 무덤이나 시체 자체를 곧바로 제시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4)지어낸 이야기 또는 전설로는 성경의 부활 사건에 대한 기록들이 실제 사건 기록이라기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기록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 시기는 부활 사건이 전설로 발전해 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또한 부활 사건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인물로 막달라 마리아를 설정하기보다는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비중 있는 인물로 대치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5)환상설은 부활을 부인하는 가장 그럴듯한 제의는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의 객관적인 경험이 아니라 주관적인 경험 또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환상을 경험하게 되는 몇 가지 전제조건들 즉 일정한 부류의 사람들(감수성이 예민하고 공상을 많이 하는 사람들), 적당한 시간(저녁, 밤, 새벽)과 장소, 장기간에 걸친 반복 등과 같은 것들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부류는 너무나 다양했으며(고전 15:3-8), 예수님을 목격했던 시간대와 장소 또한 다양했다. 그리고 그 모든 현상은 40일 간이라고 하는 짧은 시간에만 한시적으로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환상을 보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 즉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는 바가 제자들에게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부활을 기대하고 간절히 바랐던 상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과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었다. 분명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간절한 기대감이나 소망적 사고가 환상을 낳은 것은 아니며, 또한 환상이 그러한 기대감이나 소망을 갖도록 한 것도 아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고,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으며, 만질 수도 있었다(눅 24:39). 또한 제자들과 함께 걷기도 하셨으며(눅 24:15), 음식을 드시기까지 하셨다(눅 24:41-43).
4.. 예수님의 부활 후 40일 간의 행적
(1)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막 16:9)에 대해서 마태는 두 여인 곧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야고보의 어머니)만을 언급하고 있으나 마가는 살로메를(막 16:1), 누가는 구사의 아내 요안나를 추가하고 있음(눅 24:10)
a. 제자들에게 나타나심(눅 24:34; 고전 15:5)
b.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심(눅 24:18-35)
c. 안식 후 첫날 저녁,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나타나심(막 16:14; 눅 24:36-49; 요 20:19, 24)
d. 두 번째 주일(안식일로부터 8일 후)에 제자들이 모였을 때 의심하는 도마에게 나타나심(요 20:26-29)
e.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요 21:1-14)
f.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심(요 21:15-19)
g.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심(고전 15:6)
h.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에게 나타나심(고전 15:7)
i. 감람산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나시고 승천하심(막 16:19; 눅 24:50-52; 행 1:9-12).
5.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응
마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여러 반응들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공포(마 28:4),
(2)거짓말(마 28:13),
(3)뇌물(마 28:15),
(4)경외심(마 28:4),
(5)의심(마 28:17),
(6)큰 기쁨(마 28: 8),
(7)경배(마 28:17) 등이 그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효과를 내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부활은 가까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한 영향을 미쳤다. 마태는 여러 반응들 가운데 특별히 ‘경배’라는 반응을 부각시키고 있다. 마태복음 28:9에 나오는 여인들, 그리고 28:17에 나오는 열한 명의 제자들은 경배로 반응했다. 장로들과 군병들의 거짓말과 뇌물이라는 반응은 이 두 반응 사이에 샌드위치 속처럼 끼여 있다. 즉 마태는 경배야말로 부활에 대해 보여야 할 가장 적절한 반응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6. 성경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
(1)사렙다 과부의 아들(왕상 17:17-24)
(2)수넴 여인의 아들(왕하 4:32-35)
(3)엘리사의 뼈에 닿은 시체(왕하 13:20-21)
(4)야이로의 딸(마 9:23-25; 막 5:35-43)
(5)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눅 7:11-15)
(6)베다니의 나사로(요 11:43-44)
(7)많은 성도(마 27:52-53)
(8)도르가(행 9:36-40)
(9)유두고(행 20:9-12)
7.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는 명백한 증거들
누가가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확실한 많은 증거로’(행 1:3) 부활하신 사실을 알려 주셨다. 그 확실한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비어 있는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첫 번째 증거다(눅 24:1-3). ‘빈 무덤’을 달리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설득력이 없음은 이미 위에서 살펴보았다.
(2). 무덤에 있던 천사가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마 28:6)라고 한 증거이다.
(3). 수많은 부활의 목격자들이 그 증거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다(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 자신 등).
(4). 사도들의 증거(행 2:32; 3:15)와 함께 그들의 변화된 삶 자체가 또한 증거다. 두려움과 슬픔, 낙심과 좌절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갑자기 변화를 받아 세상을 소란케 하고 뒤엎는 사람들이 되었으며, 어떠한 반대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자들로, 공회에서도 담대히 부활에 대해 증거 하는 자들로 변했는지는 오직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5). 오늘날 지켜지고 있는 ‘주일’(Lord’s Day)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다. 안식 후 첫날에 드려진 초대교회의 예배(행 20:7; 고전 16:2)는 그날 새벽에 발생했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기초한 것이다(마 28:1; 막 16:2, 9; 눅 24:1; 요 20:1, 19).
(6).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으며 전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는 기독교의 역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 공동체의 기원은 성경의 기록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나온 바로 그때이다.
8.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체에 대하여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적 부활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인간의 (1)촉각(마 28:9; 요 20:17, 27)과 (2)시각(눅 24:39), (3)청각(요 20:16)을 통해 확인되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생선을 드셨다(눅 24:42-43).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은 물리적 한계를 초월하는 ‘변화된’ 육체였다. 요한은 문들이 ‘닫혔을 때’에 예수님께서 갑자기 나타나셨음을 기록하고 두 번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요 20:19, 26).
누가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신 후 갑자기 사라지셨으며(눅 24:31),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갑자기 나타남으로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들이 보고 있는 예수님을 영으로 오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눅 24:36-37).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인간의 오감을 통해 그분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육체적이었던 동시에 물리적 제약을 초월하실 정도로 변화된 몸이셨다. 즉 우리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새롭고 영적인 몸으로 변화하신 것이다.
9. 역사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님의 부활
부활하신 주님은 위대한 사상적 스승이나 지도자들이 그들의 사후에도 계속적으로 당대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영향력’이 아니다. 예수님은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살아생전에 ‘소생’(resurrection)시키셨던 사람들(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과도 분명히 구별된다. 주님은 그들과 같이 다시 죽음을 경험하실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이다(계 1:18).
10. 고린도전서 15:3-5에 나오는 부활의 대한 용어
(1)‘죽으시고’(died),
(2)‘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buried),
(3)‘다시 살아나사’(raised),
(4)‘보이시고’(appeared) 등의 동사가 모두 같은 주어(‘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 즉 처음의 두 단어가 의문의 여지없이 육체적 예수의 죽음을 나타낸다면 나중의 두 동사의 주어 역시 부활하신 육체적 예수라는 것이다. 장사 지낸바 된 것은 그분의 몸이므로, 다시 살아난 것도 그분의 몸이었음이 분명하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사흘 만에 일어난’ 하나의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영적인’ 부활이 아닌 ‘변화된’ 육체적 부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제자들의 체험 속에서만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11.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보여 주는 부활
(1) 예수님의 부활은 먼저 그분이 참으로 인간이셨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즉 부활 자체가 이미 그의 죽으심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의 참 인간 되심, 즉 그분의 인성(성육신)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이다(롬 1:3-4; 계 1:18).
(2)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인성(人性)과 함께 신성(神性), 즉 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신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롬 1:4)라고 말한다.
(3)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선포이다. 바울은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그의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도록 기도했는데(엡 1:18-19), 부활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외적이고 공개적이고 객관적으로 드러난 하나의 표적이요 역사상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대한 최고의 증거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엡 1:20). 이는 또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4)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의 성취를 나타낸다. 부활 없는 십자가는 별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승인하신다는 것과, 그분이 헛되이 죽지 않으셨다는 것과, 그분을 믿는 자들은 충분하고 값없이 주시는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다.
12. 자연적 육체와 부활한 육체의 차이점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이와 관련된 네 가지 대조 구문 즉
(1)‘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
(2)‘욕된 것’과 ‘영광스러운 것’,
(3)‘약한 것’과 ‘강한 것’,
(4)‘육의 몸’과 ‘신령한 몸’ 등의 대조를 통해 두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5)‘신령한 몸’(soma pneumatikon)이 ‘육의 몸’(soma psychikon)과 대조된다고 해서 부활한 육체가 비육체적, 비신체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단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와 지배를 받고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부활한 육체와 현재의 육체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는 다른 두 개의 본문은 고린도전서 6:13과 마태복음 22:30(막 12:25; 눅 20:35)이다. 즉 부활한 육체는 육체의 소화기적 기능이나 결혼제도가 필요 없는 상태가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요한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이라고 했으며(요일 3:2), 바울은 우리의 ‘낮은 몸’이 ‘그의 영광스러운 몸’(빌 3:21)과 같이 될 것이라고 했다.
13. 육체의 부활과 그 시기
헬라 철학은 인간의 영혼에 비해 육체는 열등하고 불완전하며 심지어는 영혼을 가두고 있는 감옥으로 간주한다. 또한 육체는 죽음과 함께 소멸되는 반면 영혼은 불멸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육체와 영혼을 함께 만드셨으며, 이 양자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은 육체가 악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날에 있게 될 ‘육체의 부활’은 기독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교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육체의 부활이 언제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어떤 이들은 천년왕국(계 20:4-5)이 시작할 즈음에 믿는 자들이 일어나게 되며, 불신자들의 부활은 천년왕국이 끝날 무렵에 발생할 것이라고 본다. 또 어떤 이들은 7년 대환난의 끝 무렵에 환란기 성도들의 부활과 천년왕국 끝 무렵에 천년왕국 성도들의 부활을 덧붙여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신자들의 부활과 불신자들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날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단 12:2; 요 5:28-29). 특별히 사도행전의 “나는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행 24:14-15)는 말씀에서 쓰인 ‘부활’이 영어 번역본들뿐만 아니라 헬라어 원문에도 ‘단수’로 쓰였다. 성경이 두 번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면 여기에서 부활을 단수로 사용한 것은 잘못된 것일 것이다. 성경의 분명한 교훈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때에 신자와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육체적 부활이 있을 것이며,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14. 부활 신앙의 중요성
부활에 대한 믿음과 신앙은 초기 기독교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성령 충만한 가운데 행한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가 이것을 잘 보여 준다. 그는 예수님의 고매한 인격이나 탁월한 가르침, 헌신적인 삶에 대해 설교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호소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행 2:22)도 지나가는 말로 언급했을 뿐이며 베드로가 정작 강조했던 것은 죄수로 처형된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이었다(행 2:24-32). 그리고 자신과 열한 사도는 이 사건에 대한 ‘증인’(witnesses)일 뿐이라고 했다.
이것은 사도가 되는 자격 요건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즉 가룟 유다를 대신해 사도가 될 사람은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행 1:22)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 설교들의 대부분은 부활이 그 중심 주제였다(행 3:14-15; 4:33; 10:40-42). 초대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교리를 통해 생겨난 것도 아니고, 죽지 않는다는 희망으로 된 것도 아니며, 구원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통찰로 된 것도 아니었다. 단 하나의 위대한 사건, 즉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난 것을 선포하는 것을 통해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존립 근거도 2000년 전의 부활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바울의 말처럼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믿음도 헛것”(고전 15:14)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이루시겠다고 하셨던 모든 말씀이 거짓으로 판명날 것이다. 사도들은 거짓 증인들이며, 인류의 죄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하나님은 그분을 다시 살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과, 그분을 믿는 자들은 값없이 주시는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정당함을 인정해 준 사건이었다.
수확의 ‘첫 열매’이며, 또한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자’가 되신 예수님의 부활체는 성도들도 구속되고 변형되리라는 신적 보증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죄 사함과 능력과 궁극적 승리를 확신시켜 준다.
15. 부활절 주일에 대하여
부활절(Easter)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이 절기는 부활주일 후 40일 간, 즉 승천일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부활주일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견해가 다르다. 서방교회는 복음서대로 주일을 부활절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마 28:1). 반면 동방교회는 유대인의 유월절을 기준하여 니산월 14일을 부활절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을 토대로 니케아 종교회의(325년)에서는 유대인의 유월절을 기준으로 하여 니산월 14일경의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키도록 결정하였다. 따라서 부활절은 대개 3월 22일부터 4월 25일 사이에 지켜지고 있다. 니케아 종교 회의에 의해 결정된 부활주일을 쉽게 계산하는 방법은 봄의 첫 날인 춘분(3월 21일경)이 지나서 오는 보름날 다음의 주일을 부활주일로 보는 것이다. 이 계산법에 따라서 부활주일을 헤아리면 가장 늦게 오는 부활주일은 2038년으로 4월 25일이며, 가장 빠른 부활주일은 2285년으로 3월 22일이 된다. 이런 계산법에 의하면 4월 첫 주가 부활주일로 가장 많이 지켜지게 된다.
16.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1)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셔서 우리에게 의(義)를 주셨다. 이 의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얻으신 것이다(롬 4:25).
(2)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 또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지금 현재 소생함을 받는다(롬 6:4).
(3)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복된 부활의 보증이다(롬 8:1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45문에서 배울 수 있다..
17. 부활절에 대한 언어적 유래
부활절을 뜻하는 영어 'Easter'와 독일어 'Ostern'는 원래 튜튼족이 숭배하던 '봄의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이스터는 그 기원이 갈대아어에 있었다. 이스터는 하늘의 여왕인 벨티스(Beltis)의 칭호중의 하나인 아스테르테(Asterte)이다. 고대 니느웨에서는 이 여신의 이름이 이쉬타르(Ishtar)였던 이 아스타르테에서 매년 4월마다 열리는 이스터(Easter)라고 불리는 종교축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스터 여신을 기리는 기간은 4월에 있었는데, 이 축제가 부활절과 사육제의 유래이다.
교회사에서는 3,4세기에 기독교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하기 위해 바빌론의 여신 숭배의식인 이스터가 아닌, 파스크(Pasch), 즉 유월절(Pass over)로 알려진 부활절을 지키기 시작 하였다. 로마는 이교도들을 기독교 안으로 회유하기 위하여 이교도의 이스터와 기독교의 파스크를 통합하는 작업을 시행 하였으며, 이 양자 간의 합성을 이룬 사람은 리틀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Little)로 알려진 수도원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밖의 언어들은 대부분 초기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에서의 부활절은 교회력 절기 중 하나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를 가리킨다. 초창기의 부활절은 3월과 4월경에 불규칙하게 위치하였다.
325년 로마 가톨릭교회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동방교회에서는 유대인이 지키는 유월절과 같은 날 즉 니산월 14일에 부활주일을 지켰고 서방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일요일 날 부활하신 사실을 중시하여 춘분 후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지키고 있어 부활주일의 날자 문제는 오랫동안 일치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이 문제를 니케아 회의에서 서방교회의 손을 들어 정하였는데 “부활주일은 춘분 후 만월후의 첫 일요일에 지키기로 정하였다”, 이에 따라 태양력 기준으로 3월 22일부터 4월 25일까지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다.
부활은 죄로 인해 죽은 성도가 다시 살아나는 소망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이므로, 부활절 또한 교회력에서 차지하는 중요도가 큰 편이다.
18. 부활절의 유래
부활절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3일 째 되는 날,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기독교의 부활절은 기존 유럽과 중동의 다신교 전통과 상징물이 합쳐진 것이다. 3세기경에 지켜졌던 부활절은 오늘날의 부활절과는 상당히 달랐다. 기독교 전파가 한창이었던 시점에 교회 지도자들은 다신교 문화의 사람들에게 복음 전파와 예수의 부활을 믿게끔 하는데 덜 거부감이 드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다신교 의식의 많은 부분을 유대교 의식에 접목시키게 되었다. 즉, 다신교의 의식들에 기독교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렇게 차츰 섞여가던 의식들이 기독교의 부활절을 완성시켰다
19. 부활절의 시기
부활절은 매년 그 날짜가 달라진다. 이르게는 3월 넷째 일요일, 늦게는 4월 넷째 일요일에 올 수도 있는데, 이는 부활절이 음력을 고려하여 지켜지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는 유월절을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켰다. 그러나 기원 후 4세기에 접어들면서 부활절을 언제 지켜야 할지에 관한 의견충돌이 생겼다. 부활절을 히브리력의 유월절에 따라 정해야 한다는 교단들과 이에 반대하는 교단들 간의 대립은 결국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파스칼보름'(Paschal full moon: 325년 당시 춘분이었던 3월 21일 이후 첫 보름) 다음의 일요일로 부활절을 정하면서 정리되었다. 파스칼보름이 일요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 주 일요일이 부활절이다. 오늘날에도 이 방법으로 날짜가 계산된다.
파스칼보름은 3월 21일~4월 18일 사이에 위치하며, 이에 따라 부활절은 3월 22일~4월 25일 사이에서 정해진다.
20. 부활절의 상징물
부활절의 상징물은 크게 부활절 달걀과 부활절 토끼 두 가지이다. 이 풍습은 부활절 토끼가 초콜릿, 캔디, 부활절 달걀 등을 착한 아이들에게 준다고 여겨 아이들이 토끼를 위해 집을 만드는 것이다. 18세기에 독일 이민자들이 미국에 오면서 함께 이 풍습이 전해지고 있다.
21. 부활절의 풍습
부활절의 풍습은 계란 굴리기(Egg Rolling), 계란 찾기(Egg Hunt), 부활절 퍼레이드(Easter Parades), 그리고 부활절 카드(Easter Cards) 교환이 있다.
(1)우선 계란 굴리기는 19세기 초, 미국 4번 째 대통령인 James Madison의 부인인 Dolly Madison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녀는 국회의사당에 아이들을 초대했고 잔디밭에서 계란 굴리기 이벤트를 열었다.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 긴 스푼모양의 막대기로 가장 멀리 가장 빨리 굴리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 계란 굴리기의 규칙이다.
1880년부터는 장소가 바뀌어 백악관에서 열렸는데, 이는 국회의사당 정원이 망가진다는 의원들의 항의 때문이었다. 이 이벤트가 계속되어 남북전쟁 때를 제외한 매년 열리고 있다. 12살 이하의 아이들이 참가할 수 있으며, 어른들은 아이들과 동반 시에만 입장 할 수 있다. 부활절 월요일은 여행객들이 백악관 마당을 지나다닐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다.
(2) 두 번째로 계란 찾기는 단체 또는 마을단위로 이루어지는데, 많은 계란을 부활절 아침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곳곳에 숨기고 아이들이 그것들을 찾게 하는 것이다. 가장 많이 달걀을 찾은 아이가 상품을 받는데 이 상품은 주로 달걀모양의 초콜릿이다.
(3) 세 번째로는 부활절 퍼레이드가 있다. 이 퍼레이드는 부활절 아침 사람들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갔다가 마친 후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퍼레이드로는 뉴욕시의 오번가(Fifth Avenue) 퍼레이드를 꼽을 수 있다.
(4) 마지막으로 부활절 카드가 부활절의 풍습으로 정착되었다. 미국의 카드회사인 American Greetings에 따르자면 크리스마스, 발렌타인데이, 어머니의 날 다음으로 가장 많은 카드를 보내는 날이 부활절이라고 한다. 그 밖에도 부활절 햄, 부활절 빵 등 다양한 형태의 풍습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
개역한글 성경
성경(성구)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