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나의 따뜻한 밥상] 강아지 똥과 민들레

by kim posted Apr 0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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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나의 따뜻한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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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똥과 민들레

 

돌이네 흰둥이가 골목길 담 밑 구석 쪽에 똥을 누었다. 날아가던 참새 한 마리가 ! ! 에그, 더러워하면서 가 버렸다. 강아지 똥은 그만 서러워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시간이 지나고 강아지 똥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난 더러운 똥인데,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텐데.“ 봄비가 내렸다. 강아지 똥 앞에 파란 민들레가 싹이 돋아났다. “넌 뭐니?” 강아지 똥이 물었다. “난 예쁜 꽃을 피우는 민들레야.” 


어떻게 그렇게 예쁜 꽃을 피우니?” “그건 하나님이 비를 내려 주시고, 따뜻한 햇볕을 쬐어 주시기 때문이야.”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한 가지 꼭 필요한 게 있어. 네가 거름이 되어 줘야 한단다.” “어머나! 그래? 정말 그래?” 강아지 똥은 얼마나 기뻤던지 민들레 싹을 힘껏 껴안아 버렸다


그때부터 사흘 동안 비가 내렸다. 강아지 똥은 온몸이 비에 맞아 자디잘게 부서졌고,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 민들레 뿌리로 모여들었다.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향긋한 꽃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


원수를 사랑하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 (Love your enemies.)” 예수님의 말씀 중 제일 실천하기 힘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 같다. 특히 매일 얼굴을 대할 수밖에 가족이면 더 그러하다. 또한 같은 잠자리에 드는 부부는 어떠한가? 눈에 거슬리는 티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있는 남편과 아내는 종 종 원수 아닌 원수가 될 때가 너무 많다. 이 실천하기 힘든 원수? 사랑?”이라는 단어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그 사이에 무언가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해라는 단어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만의 입장만을 생각하기에 상대방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기에 섭섭함으로 원수를 맺게 되고 또한 사랑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말씀에는 “~ 하라!”는 명령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3-44)고 기록 되어있다


또한 우리나라 옛 속담에도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라는 말이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에서는 화목이 제일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사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헤세드이다. 헤세드는 자비” “인자” “선대(善待)” “은총이라고 번역되곤 하는데, 헬라어로 본다면 아가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헤세드의 사랑은 크게 세 가지 용례를 갖고 있다. 첫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 셋째,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그리고 헤세드단어 중심에는 하나님의 친절하심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토라)을 주신 것이 친절이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큰 사랑이었다는 뜻이다. 한편 헬라 철학에서의 사랑은 아가페, 필레오, 에로스(이성 간의 사랑), 스톨게(자연적인 사랑, 가족간의 사랑) 등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에 대한 철학적 구분이 예수님 당시에는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 전후 200~300년 동안은 아가페와 에로스, 필레오 같은 단어들이 서로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또한 그 당시 예수님은 헬라어로 말씀하시지 않고 아람어를 사용하셨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람어를 복음서 기록 과정에서 헬라어로 옮긴 것이다


아람어에는 아가페나 필레오 같은 구분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헤세드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것이다. “헤세드(사랑)”의 대상이 누구이며, 방법이 무엇이든지 공통점은 자기희생이며 친절함이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바로 희생의 사랑인 것이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성육신하시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고, 3일 만에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 예수님이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에 대한 산 소망을 주셨다(벧전 1:3).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 부활절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1년 중 정해진 어느 하루가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루의 절기로 기억 되는 것 보다는 사람들의 삶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이와 달리 현시대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이 비일 비재하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는 2015년 부활절 즈음에 어떤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가어떤 모습으로 보아주기를 기대하는가?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인가?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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