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성경바로읽기 6
요한복음 18:38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 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 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한복음 18:37-38)
예수님이 마침내 붙잡혀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 앞에 섰다. 빌라도의 질문이 시작된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이 답변한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빌라도가 묻는다. “그럼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하다. “맞다. 나는 왕이다. 진리를 아는 자는 내 소리를 듣는다.” 빌라도의 질문이 이어진다. “진리가 무엇이냐?”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없다.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없자 여기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주어졌다. 정말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답을 내놓지 않았는가?
예수님은 진리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다
요한복음에는 진리라는 단어가 22번이나 나온다. 이 중에는 비기독교인의 세계에서도 인용되곤 하는 구절이 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말씀하고 있는 대표적인 성구인 1:14에 처음으로 진리란 단어가 등장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는 성구는 비기독교인들의 세계에서도 자주 인용되곤 한다. 특히 14:6의“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구절은 진리란 의미가 길과 생명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길과 생명이 아버지(하나님)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바로 진리라고 선포하신다.
그 이유는 예수님만이 죄인된 인간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생명에의 길이 되시기 때문이다고 밝히시고 계신다. 이를 더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베드로전서 3:18을 보자.“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이 보여주는 진리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죄를 없이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과 연관되어있음을 본다.
이제 빌라도와의 대화에 나오는 진리에 대하여 들어보자.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 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 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18::37)
예수님의 오심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고자 함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오심은 죄인된 인간을 생명에의 길로 인도하는 것 곧 창조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라는 뜻한다. 그러하기에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영생)을 원하는 자 곧 하나님을 진정 만나고자 하는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신 것이다. 당연히 빌라도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는 우리는 안다.
진리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빌라도는 스스로 답하고 있다
빌라도의 질문은 단지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 아니다. 지금 빌라도는 죄인을 심문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고자 했다면 이는 로마에 대한 반역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고소하는 사건에 대하여 심문하고 있다. “네가 진정 너를 심문하고 있는 자들의 고소와 같이 유대인의 왕이 되고자 했느냐?” 예수님은 분명한 어조로 정치적인 왕이 되고자 함이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다. 그러자 빌라도는 다시 심문한다. “그렇다면 왕이 되고자 함이 아니었다는 말이냐?”
예수님의 답변은 분명했다. “왕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이미 나는 왕이다. 나의 왕국은 이 세상의 왕국이 아니다. 나는 결코 눈에 보이는 정치적인 왕이 되어 로마에게 항거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진리의 왕국의 왕이다. 죄인된 인간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왔다. 나는 진리 왕국의 왕이다” 빌라도는 자신의 머리로는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빌라도가 마지막으로 심문한다.
“진리가 무엇인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고소한 자들의 죄 곧 유대인들의 정치적인 왕이 되어 로마에 항거하고자 하는 죄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빌라도의 모습은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에게서도 발견되는 모습이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계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했던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고소 사건을 기각시켰다. 예수님의 죄를 도무지 찾을 수 없노라고 선언한다.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진리가 무엇이냐고 스스로 묻고 스스로 예수님은 죄가 없다라고 선언한다. 빌라도는 진리와 죄 없음과 연관시키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 죄없는 자가 하나님을 만난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스스로 만날 수 없는 죄인이다. 빌라도는 자신의 비겁함으로 예수님이 죄없음을 알면서도 십자가형을 언도한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들의 죄를 없이하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인간의 죄를 지고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침내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진리 자체이심을 십자가(죄에 대하여 죽으심)와 부활(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을 통하여 이루신 것이다. 예수님이 스스로 진리가 무엇이냐고 답변하실 필요가 없었다. 빌라도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다! 그러기에 죄없으신 예수님만이 죄인된 인간을 위해 죽으실 수 있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가야바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어떠한 죽음을 당하실지 말했던 장면이 요한복음 11:50에 나온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빌라도와 같이 가야바도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을 스스로 답하고 있는 것을 본다.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행함으로 답변하셨다
예수님은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말로서 답변하지 않으셨다. 죄인된 인간을 하나님께 인도하시기 위해 행함으로 답변하셨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이셨다. 요한복음 18:32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예수님의 죽음이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서다. 당시 십자가형은 로마에 반역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참람되이 했다고 고소했다. 단지 이는 로마에게는 고소 사건이 되지 않기에 로마에 항거하는 반역도로 유대인의 왕이 되고자한다고 고소한 것이다. 여기에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가 있다.
인간의 근본적인 죄는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죄이다.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버린 죄,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십자가는 그런 종류의 형틀이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의 죄를 단죄하는 형틀이었다.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의 죄가 십자가에서 단죄되었다.
이제 하나님께 항거한 죄가 얼마나 잘못되었음을 알고 하나님께 돌아오고자 하는 자는 십자가에서 반역의 죄가 해결되었음을 선포하고 죽음이 아닌 부활의 메시지가 전해진다. 죽을 자가 살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선포하는 진리는 십자가와 부활이다. 조심하자. 순서를 바꾸면 안된다. 십자가가 먼저이다. 그리고 부활이다.
십자가없는 부활만을 꿈꾸는 자는 헛꿈을 꾸는 자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지만 부활은 하나님의 일었다. 나의 일은 십자가다. 부활은 하나님의 일이다. 진리는 무엇이냐?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지는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심을 선포한다.
예승장로교회 김성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