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따르릉“
심야에 울려오는 전화 벨소리는 웬지 불길하다.
“이목사, 나야”
멀리 한국에서 들려오는 형님의 목소리. 나도 모르 게
몸이 떨려왔다. 여간해서 전화를 안 하는 형님이기 때문이다. 미국 이민 28년동안 형님은 딱 두번 전화했다. 19년 전 아버지 순명하셨을 때,
3년전 어머니 소천하셨을때 전화온게 전부다.
‘누가 죽었구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우리 7남매중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나보다
먼저 죽을 사람이 없는데?,
머뭇거리고 있는데 형님의 슬픈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막내 완이가
죽었어”
(........)
망연자실하고 있는 나에게 형님이 떠듬거렸다. 서울에서 약국을 하는 막내는 서해대교가 지나가는
아산만 행당섬에 별장을 갖고 있다. 고향근처다. 지난 일요일 동생부부는 남매를 데리고 별장으로 내려왔다. 저녁식사 후 동생은 아들을 데리고
별장근처 카페로 갔다. 딸 한나는 탈랜트급 재원인데 아들 일범이는 자폐증환자. 동생계완이는 당뇨를 앓고 있었다.
“일범아, 우리 바닷가로
나가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고구마를 구워먹자”
모닥불을 피우던 동생이 갑자기 앞으로 쓰러졌다. 심장마비가 온 것이다. 옆에 일범이가 있었지만
27살된 자폐증아들은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동생은 그렇게 죽었다. 이번 정월 보름에 회갑연을 치른 향년 60세.
“우리 7남매의
막내 완이가 죽다니? 맨 나중에 가야할 완이가 먼저 가다니?”
하늘과 땅이 무너져 내리는 듯 했다. 머릿속이 하야졌다 까마졌다 하더니
멍해져 버렸다. 잠을 잘수 없었다. 자다가 깨면 하얗게 밤을 새웠다. TV드라마도 화토도 스포츠중계도 귀찮았다. 하룻밤 지난 후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런데 고장 난 수도 꼭지 처럼 눈물이 나왔다.
나는 실컷 울려고
바닷가로 걸어 나갔다. 바닷가 모래위로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조영남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생각난다 그 모습이/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는데
쓸쓸한 오솔길에 아무도 오지 않아/ 나 홀로 그리는 잊지 못할
사람
아아아아/ 우우우우
쓸쓸한 오솔길에 아무도 오지 않네/ 나홀로 그리는 잊지 못할 여인
아아아아
생각 난다 그
목소리/ 지금도 내 가슴에 들려오는데
그리운 그 사람 어디로 가버렸나/ 나홀로 쓸쓸히 오솔길에 서 있네“
조영남의 목소리로
부르는게 아니었다. 내동생 이계낭의 목소리였다. 2년전 한국에서 여동생 계양이네가 여행왔다. 돌섬을 거닐면서 동생은 이런 얘길 했다.
“오빠, 지난해 우리 7남매의 여섯 번째 낭이 회갑연을 호텔에서 했어요. 돌아가면서 노래를 하는데 사양하던 낭이가 맨나중에 마이크를
잡았어요. ‘오솔길‘을 부르는데 어찌나 잘 부르는지? 조영남보다도 노사연보다도 더 멋지게 부르는 거예요. 저 여자가 탈랜트출신이냐 가수출신이냐고
사람들이 수군거렸어요”
중학교 2학년때부터 교회 피아노반주를 했던 낭이었다. 최은희와 황정순을 합성한듯한 얼굴에 쌍룡자동차사장 사모님이니
얼마나 멋을 부렸을까?
그 후부터 나는 홀로 있을 때면 오솔길을 부른다. 오늘따라 미치도록 생각나는 사람 막내 완이.
아버지(이봉헌83세 향수) 어머니(이은혜 101세 향수)는 7남매를 나아 하나도 잃지 않고 고스란히 기르셨다. 첫째 이계화딸, 둘째 이계승아들,
셋째 이계선아들, 넷째 이계양딸, 다섯째 이계응아들, 여섯째 이계낭딸, 일곱째 이계완아들. 우리는 이름을 부를때 끝자만 부른다. 이름석자중에
끝자만 틀리기 때문이다.
넷은 아버지를 닮았는데 나와 낭이 완이는 어머니를 닮았다. 그래서 셋이 가까웠다. 낭이는 계집애라서 내색을
못했다. 오빠가 그리우면 피아노를 치면서 “뜸부기”를 부르곤 했다.
완이는 달랐다. 초등학교때 축구부주장을 한 완이는 중학교때는
경기도 대표팀의 핸드볼 골키퍼였다. 중2때 내가 대신 써준 글짓기로 전교 장원을 한후 열심히 글을 쓰더니 진짜 문학소년이 됐다. 아이큐 150의
머리로 하루밤에 500페이지를 읽어대는 독서광. 경인일보에 “의창칼럼”을 쓰기도한 문사다. 만년 스포츠맨인데 병원 약국을 운영하는 사업가다.
7남매중 효도일등, 우애일등, 일등짜리 동생이다. 얼굴생김새도 식성도 성격도 나와 비슷하여 나를 좋아했다. 내가 여자(?)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던때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목사, 막내 완이네 집에 갔더니 완이댁이 이런말을 하는거야. ‘어머니, 잠을 자던 막내(계완)가
새벽 1시쯤 벌떡 일어나더니 엉엉울면서 ’하나님 우리형님에게 왜 그런여자를 주셨어요‘ 호소하더니 쓸어져 자더라구요. 다음날 아침에 물어보니
모른다는 거예요’ 하더라구. 완이가 왜 그랬을까?”
어머니는 머리를 갸우뚱 하셨다.
“글쎄요?”
나는 그때 겉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울었던가! 난 동생 완이에게 아픔을 토설한적이 없다. 얼마나 형을 사랑했으면 자신도 모르면서 무의식으로 그랬을까?
완이는 나에게 그런 동생이다.
“형님, 양이 누나한테 뉴욕여행 얘기 들었어요. 언젠가 저희부부도 한나 일범이와 함께 뉴욕여행 갈거예요.
그때 돌섬바닷가를 함께 거닐면서 낭이 누나가 부른 ‘오솔길’을 합창하자구요”
그런데 완이가 가버렸다. 그래서 나 혼자 돌섬바닷가를 걸으면서
오솔길을 부른다.
“생각 난다 그 모습이/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는데
쓸쓸한 오솔길에 아무도 오지 않아/ 나 홀로 그리는 잊지
못할 사람아“
*사진 몸이 불편하여 장례식에 못가는 대신 추모의 정을 담아 보낸 조화(弔花)“
“살아생전 효자이더니/ 제일먼저
부모님 곁으로 가는구나! 뉴욕에서 형 이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