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1. 복음(Good News)이란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한다는 기쁜 소식'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기독교에서 복음(福音, 고대 그리스어: εὐαγγέλιον 유앙겔리온, 라틴어: evangelium 에우앙겔리움)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가져다 준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을 한자어로 풀이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한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 신자들 위에 성령의 강림이나 예수의 재림에 대한 예고를 포함하기도 한다.
좋은 소식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복음서에서 전하는 예수의 일생에 대한 기술, 그리고 신약성서의 서신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서 비롯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죽음에서 부활한 사건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하여 찾아오는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화해가 핵심적인 교훈이다.
기독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좋은 소식을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구약성서 전체에 걸쳐 예언되었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나타난 인간의 타락부터 전해지는데 이를 원시복음이라고 한다.(위키백과).
특히 예수는 '복음'이라는 용어를 제2 이사야서의 예언의 완성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예수는 가난한 이들에게 신성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였으며(누가 4:14-19, 7:22, 마태 11:5), 그가 선포한 기쁜 소식은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복음이었다(마태 1:14-15, 4:23, 9:35, 24:14).
그러나 사도들에게 있어 ‘복음’은 메시아로서의 예수가 그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위해 성취한 신성한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다(행전 5:42, 14:6 · 20, 15:20). ‘복음’의 대한 이러한 사용은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에 많이 나타나는데, 그는 ‘복음’이라는 명사를 60여 차례(롬 1:1, 9:15-16), ‘복음화 하다’라는 동사를 20여 차례나 사용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불렀는데(롬 1:1, 15:16, 고후 11:7) 그 이유는 그의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리스도의 복음’이며(롬 15:19, 고전 9:12, 고후 2:12, 9:13) 예수 그리스도 및 그의 구원사업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나의 복음’이라는 말도 썼는데 이는 바울로의 구원의 복음이 근본적으로 다른 사도들의 복음과 다름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갈 1:6-9) 그가 복음을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기 때문이며(갈 1:11-12, 고전 15:3) 예수는 그를 뛰어난 ‘복음의 교역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골 1:23).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은 주로 구원의 신비에 관한 것이지만, 그 밖에 사도들이 알고 있는 예수의 지상생활과 그의 가르침 역시 복음서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행 10:34-43). 이는 마가복음에서 첫 귀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에 사용된 ‘복음’의 의미이며 ‘기쁜 소식’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신약성서에 씌어진 ‘복음’이란 용어는 '기록된 복음'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2세기에 이 용어를 책의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나(Justin, Apol. 1:66, Dial 10:2) 초대 교회는 항상 오직 하나의 복음이 있을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신약성서에도 ‘복음’을 복수로 쓰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4복음서는 한 복음을 4가지 관점에서 쓴 데 지나지 않는 것이며 마태와 마가복음서 등에서 복음서의 저자들의 자기 나름대로 다른 성격만을 구별해주고 있다.
2. 구원(salvation)
구원이란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 또는 위험에 빠진 사람이나 나라를 대신해서 구해주는 행위를 말한다. 구약성경에서 구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예슈아’(yeshu?h)로 자연재해나 적의 침입과 같은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상황과 관련되어 쓰였다. 신약성경에서 구원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소테리아’(soteria)로 주로 죄, 죽음 그리고 사탄의 권세로부터 믿는 이들을 구해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되어 쓰였다.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인간이 할 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믿음으로 받는 것뿐이다.
그리고 구원의 대상은 유대인과 즉 이스라엘 자손들(사 45:17)과 헬라인들(사 45:17)뿐 아니라 이방인(롬 11:11-12; 갈 3:8), 즉 모든 사람(마 18:14; 롬 1:16)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해서(요일 2:2)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구약에서의 구원이라고 하는 말은 추상적인 의미, 즉 죄로부터의 영적인 구원(시 51:14; 겔 37:23)을 뜻하는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실제적인 의미, 즉 애굽(시 106:7-10)이나 환난(렘 30:7), 원수(삼하 3:18; 시 44:7), 병(사 38:20) 등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였으며 그 주체는 대부분 하나님이셨다.
구원은 적으로부터 놓임 받아 하나님께로 해방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인 사역이었다(사 43:11). 여기서 인간을 사로잡고 있던 각가지 적들은 죽음이나 두려움(시 6:4-5), 대적(신 20:4), 사악한 자(시 59:2), 질병(사 38:21), 환난(렘 30:7), 죄(시 51:14; 겔 36:29) 등이었다.
신약에서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놀라운 은혜였다. 죄의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인간을 대신해서 피 흘리게 하시므로 하나님과 인간이 온전한 화목을 이루도록 하셨다(롬 5:9).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새로운 상태(갈 4:6; 롬 8:14)에 놓이게 되었고 유업을 받게 되었다(갈 3:29, 4:7; 엡 1:11). 이러한 구원은 신약성경에서 헬라어‘소조’(sozo), ‘소테리아’(soteria) 등으로 기록되었는데(마 8:25; 요 11:12; 행 27:31, 34; 히 5:7) 질병을 고치는 이적과 함께 사용되거나(마 14:36; 눅 7:3) 죄 사함으로 인한 구원(눅 1:77)으로, 영생을 상속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표현되었다(막 10:17-26).
사도 바울은 구원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하여(요 17:2; 딤전 2:5; 딤후 1:9), 날마다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야 할 것이며(빌 2:12) 미래에 완성될 것(롬 13:11; 벧전 1:5)이라고 보았다.
3. 하나님의 능력(Power of God)
명사로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 또는 어떤 일에 대한 재능이 능력으로 표현하고 있다..
법률적으로 권리를 누리거나 행사할 수 있는 자격. 특히 민법에서는 행위 능력(行爲能力)을 뜻한다. 심리적으로는 정신적 기능이나 신체적 기능의 가능성이라고 했고, 또한 정신 현상의 여러 가지 형태라고 했다.
신약성경에 능력이라는 단어가 87번 나오고 있다. 그 중에 하나님의 능력이란 말이 11번, 성령의 능력은 3번(행 10:38=하나님의 능력, 롬 15:13=큰 능력, 18=성령과 능력)나오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실 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 죄를 해결하시기 위한 보혈의 능력으로 십자가(고전 1:18)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다. 창조의 능력과 보혈의 능력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있는 내용이 결코 아니다. 때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많이 해서 능력의 소유자로 혹은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능력자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 것인가?
4. 헬라인(이방인)과 유대인
1) 헬라인
위키백과 사전에는, 그리스인(그리스어: Έλληνες), 또는 헬라스 사람은 그리스와 키프로스 및 인접 지역에 뿌리를 둔 민족으로, 이들 지역 뿐 아니라 디아스포라로 전 세계에 분포하고 있다.
역사상으로 그리스의 해외 식민시와 공동체는 지중해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으나, 그리스 사람들은 고대부터 그리스어를 쓰던 에게 해 주변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그리스 사람들은 그리스 반도와 소아시아 서부 해안, 폰토스, 이집트, 키프로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단일 집단으로 모여 살았는데, 이들 지역 상당수는 11세기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와 동부 지중해의 고대 그리스 식민시와 일치한다.
그리스(헬라)-터키 전쟁 (1919년-1922년) 이후 그리스와 터키의 대규모 인구 교환으로 그리스 민족 대부분이 현대 그리스 국가와 키프로스 국경 안쪽으로 옮아와 모여 살게 되었다. 남부 이탈리아와 캅카스 지방에서도 그리스 민족 집단이 있으며, 여러 나라에 그리스 디아스포라 집단이 있다. 오늘날 그리스인의 대부분은 최소한 명목상으로나마 그리스 정교를 신봉하고 있다.
2)유대인 (히브리어: יהודי 유대인; Yehudim) 또는 유다인 혹은 유태인(猶太人)
셈 족의 한 파로, 히브리 어를 쓰고 유대교를 믿는 민족.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티나로 옮겨 거주하다가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았으나 1948년 옛 땅에 이스라엘 공화국을 세워 살고 있다. ‘유대(Judea)’의 음역어는 ‘유태1(猶太)’이다.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 민족적인 의미에서는 혈연 또는 개종을 통해 고대 히브리 민족의 후예가 된 유다 민족을 가리킨다. 유대교의 법률인 하라카의 정의에 따르면,어머니가 유대인으로서(민족적 의미) 유대교를 따르는(종교적 의미) 사람을 유대인이라 한다. 서아시아의 가나안에서 근원한다. 유대인의 민족, 문화, 종교 및 신앙은 서로 밀착된 강한 관계를 보이며,유대교는 유대인 간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전통종교인 것이다. 여기서는 민족적인 의미를 다룬다.
오늘날의 유대인에 대해서 백과사전에서 소개하기를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전 세계의 유대인 인구가 1천 8백만 정도였으나 히틀러가 집권하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1천만 정도로 줄어들었다. 오늘날 전 세계 134개국에 1천 4백만 정도가 살고 있다. 미국에 5백 80만, 이스라엘에 5백만 정도가 살고 있다. 그밖에 캐나다, 헝가리, 우크라이나, 프랑스, 아르헨티나, 러시아, 독일 등에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유럽의 유대인 인구는 2백 40만, 라틴 아메리카는 5십만 이상으로 추정된다.
1948년 5월 14일 설립된 이스라엘 공화국은 유대인이면 누구나 시민권을 발급할 수 있게 허용한다. 이는 귀환법 또는 귀향법(the Law of Return)이라고 한다. 이 법률상 조부모 중 유대인이 있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 모두 유대인으로 간주된다. 또 유대인 이민자들과 가족관계인 비(非)유대인들에게도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다. 이스라엘의 귀환법이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따르는 유대인의 정의보다 일부러 더 광범위하게 정의한 이유는 유대인의 친척들도 외부에서는 유대인으로 여겨 반유다주의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대인이 다수민족인 국가는 이스라엘뿐이다.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은 곳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1백만에서 1백 50만 정도가 있다고 추산된다. 유럽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빨리 증가하고 있는 국가는 독일과 동유럽으로 현재 많은 유대인이 많이 이주해 온다고 한다.
헬라인과 유대인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1)다 죄 아래 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3;9)
(2)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9-11)
(3)기도의 대상들이 다르다.
헬라인과 유대인의 ‘기도’의 대상에 대해서. 살펴보면 헬라인에게는 수많은 신이 있는데 각각의 신이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이라는 것이 무슨 신학적 원리나 근본 사상을 공유하기보다는 각 신의 속성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여 있다. 개인은 자기가 원하는 신을 선택하여 섬기며 신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푼다. 신과 이를 섬기는 사람의 관계는 마치 주인과 신하, 또는 친구와 같은 관계를 이룬다. 이런 관계에서 헬라인의 기도는 신에게 충성과 신의를 표시하거나,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신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목적을 가진다.
그러나 유대인의 기도는 헬라인의 기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기도가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개인이 저마다 자기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오로지 한 분 하나님만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다. 헬라인의 기도가 신의 마음을 달래 사람의 소원을 듣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유대인의 기도는 이런 목적과는 근본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어떠한가? 유대인의 기도와 유사한 점이 있다 해도 차이를 명확히 해야 할 것은 유대인의 기도는 제사와 제사장을 통해 드리는 기도였다는 점이다. 신약 시대의 성도는 하나님께 직접 기도를 드린다. 자기를 거룩한 산 제물로 주께 직접 드린다(롬12:1)는 것이다.
(4) 무슨 법으로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갈 3:27-28)
(5) 복음 전파자의 자격자 바울
사도행전 17장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복음을 전파하는 자에 대한 자격을 논하면서 유대인들에게는 성경에 따라 대처하면서, 철학적인 헬라인에게는 우주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에 따라 대처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 자신은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기에 자격이 있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하나님은 생명과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며,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함을 지적하면서, 헬라인들에게는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전함으로, 히브리종교나 헬라철학을 전파하지 않았고, 오직 모든 것을 포함한 영에 의해 실재가 되시는 분을 전파한 것이다
(6) 1차 전도 여행 때 동반자
바울은 1 차전도 여행 때 바나바와 함께(사도행전 13:50-51)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 신자를 얻게 된 기록도 있다(사도행전 14:1~7).
(7)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인 지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하면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지혜니라(고전 1:22-24)고 했다.
5.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사도 바울은 로마서 3-4장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신약성경에 92회 사용된 '디카이오쉬네'(義) 가운데서 바울이 그의 5대 서신(롬, 고전, 고후, 갈, 빌)에서 52회 사용한 것을 볼 때에 바울이 '의'를 중요한 신학적 개념으로 취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 인정받는 표현인 것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에 대해서 특히 롬 1: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다.
이 말씀의 역사적인 배경은 구약성경 하박국서 2:4절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일찍이 하박국 선지자는 사회의 부패성을 바라보고 성루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때 여호와께로부터 대답을 받았는데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서 신약시대 바울이 로마서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義人)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고 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횃불은 높이 든 마르틴 루터가 성당으로 무릎을 꿇고 미사를 드리러 올라가선 계단에서 갑자기 일어나 걸으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종교개혁자로서 담대하게 외치면서 들어갔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편지를 한 내용 가운데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갈 3:11)고 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확립하는 것과 그가 전한 복음을 실증하는데 확고한 태도를 견지했다. 바울의 반대자들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율법의 행위(할례, 절기 지킴의 등)를 더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사도 바울은 이를 다른 복음이라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바울은 의롭게 되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되는 일이며 성령 안에서 새 생활하는 것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에는 그리스도의 제사의 효과를 표현하는 의식적인 4가지 용어가 있는데
첫째 ‘속죄하다’
둘째 ‘정결하다’
셋째 ‘거룩케 하다’
넷째 ‘온전케 하다’ 는 것들이다.
그리고 히브리서의 목적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죄의식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게 하는 제사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러나 모든 제사의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 10:38)는 말씀으로 율법의 제도나 각가지 제사의식보다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이렇게 구원하게 하신 하나님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복음이 어떻게 값없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 롬 1:17절에서 이렇게 한마디로 설명을 하고 있다.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다고 설명을 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복음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있다’라는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공의가 있다라는 말보다는 사람을 하나님의 의의 기준까지 오게 하는 능력이 그 것이 복음 안에 있다는 것이다. 복음 안에 의롭게 하는 능력,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인이 의인이 되고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롬 10:13)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그러나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지에 대해서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그릇된 열심에 대해서 지적한 목적은 ‘구원을 얻게 함’에 대한 것이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로 아브라함도에게 후사에 대한 여호와의 약속으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고 하였다. 불가능한 약점을 가진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땅에 보내시고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1-12)라고 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구원하신 다는 것이다(요 3:16).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 죄인이 의롭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그 놀라운 복음의 능력이 그 ‘하나님의 의’(義)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영어 전치사 두 가지를 쓰고 있는데 from(에서...로부터)과 to(..에, …까지, …에 대하여),라는 단어다.
여기서 from은 믿음의 출처를 말하고 to는 믿음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복음 안에 구원의 능력이 있고 그 구원은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유명한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하박국서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느니라”(합 2:4)
여기서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모든 거짓된 종교를 가려 놓는 높은 담을 만들게 된 것이다. 잘못된 신앙, 전통적인 신앙, 형식적인 신앙을 이 말씀 한마디가 방망이가 되어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무섭고 어두운 중세시대에 마르틴 루터가 이 말씀으로 탈출하면서 종교개혁의 불을 붙이게 된 것이다. 오늘도 이 말씀이 많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새롭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참 믿음, 참 신앙, 참 구원을 이루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당 교회 문화의 현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진리를 핵심적인 진리를 다 분산시켜 놓고 말았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 건강해진다, 혹은 복을 받는다는 등의 기복적이고 범신론적인 종교사상으로 변질시켜 버린 것이라고 느껴진다. 옳은 말로 들리는 것 같지만 예수 믿으면 건강하고 축복을 받는다. 만사형통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중심 진리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핵심적인 진리는 무엇인가?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다(요 17:17).
두 번째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진리이시다(요 1:14, 14:6).
세 번째 성령이 진리이시다(요일 5:7)
즉 성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요, 성자 예수님이 진리요, 성령님이 진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수 없이 들었으면서도 ‘진리’에 대해서 모른다면 바로 빌라도와 같은 자들이 아닌가? 진리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던 빌라도가 일어나서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인가?(요 18:38) 라고 반문했던 것과 같지 않은가?
믿음의 의인들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오직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복음을 믿는 믿음,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믿음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변질된 내용으로 복음이 아닌 자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다면 분명 바울이 말한대로 저주를 받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지적하기를 분명히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고후 11:4)에 대해서 강하게 지적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9)라고 했다.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적 사고방식 전부 믿음을 이상하게 해석을 해 놓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잘못된 지도자들이 없지 않다. 그래서 영적 소경이요 귀먹어리가 되어버린 종교지도자들이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유혹하고 심지어 자기 정신력에 집중을 시키게 하고 심지어 자기 기도에 자기가 도취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예수 믿는다고 다 건강하게 오래 장수하는가? 결코 아니다. 일찍 죽은 사람도 있다. 예수 믿으면 다 부자가 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가난해 질 수도 있다. 그래서 잠언서에는 기도의 내용으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잠 30:8)라고 했다.
예수 믿으면 다 성공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실수할 수도 있다. 실패할 수도 있다. 진정 오래 사는 것이 진리인가? 예수님은 서른 세살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다면 정욕대로 욕심을 부리지 말고 있는 것을 족한 줄로 알고 감사하면서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않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삼상 2:6-8)
중요한 것은 복음을 믿는 믿음이다. 어떤 믿음인가? 즉 복음의 내용이 되신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이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 영혼의 구원을 받는 그것은 믿음으로 받는다. 내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요 감정으로 받는 것도 아니요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엡 2:8-9).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