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마태복음서는 흔히 유대인의 복음서라 한다. 왜냐하면 1장 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계보)라’고 시작 되는 것에서 이미 유대인을 대상으로 쓴 글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의 계보이야기를 보면 요셉으로부터 시작, 거슬러 올라가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 시니라’(눅3:38) 해서 인간 시작의 근본까지 올라간다. 그래서 누가복음서는 이방인의 복음서라 한 것과 비교하면 독자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다윗의 자손(Son of David)이란 메시아이신 다윗의 후손을 말한다(마 1:20; 눅 1:27).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나 예수의 수태 사실을 알릴 때 그를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불렀으며(마 1:20; 눅 1:27),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마 9:27).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던 사람으로는 바디매오(막 10:47-48), 가나안 여인(마 15:22), 아이들(마 21:15) 등이 있었다. 이렇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던 것은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바였다(삼하 7:12; 사 9:7; 렘 23:5; 겔 34:23-24).
‘세계’(世系)라는 원어(비블로스 게네세오스 bivblo" genevsew")는 ‘족보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복음서들은 세상에 오신 메시아에 대해 증거하는 책이며, 마태복음의 첫 부분은 메시아의 족보에 대해 말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예언되고 약속된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다(창 22:18).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몸에서 날 자식으로 그 나라를 견고케 하시고 그 나라의 위(位)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삼하 7:12-13, 16).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사 9:6, 7; 11:10; 렘 23:5; 겔 34:23, 24; 호 3:5).
물론 이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마태복음에 6번, 구약에 161번, 신약에 74번)과 다윗(마태복음에 15번, 구약에 825번, 신약에 55번)’ 수많은 조상들 중에 하필이면 ‘다윗’이란 이름을 박아 넣은 것도, 다윗이 유다의 자손이란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과 동시에 마태복음을 왕(15번)의 복음서임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 다른 복음서와 다른 것이고, 특히 유대인(14번)들이 대망한 메시아가 곧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함에서 더욱 유대인의 복음서라 말한다.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은 세 가지면으로 진리를 보여준다.
첫째로, 하나님의 일에는 때가 있다.
천하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전 3:1). 하나님의 일에는 때가 있다. 하나님의 때는 일반적으로 긴 세월을 필요로 한다. 아브라함은 주전 2천년경의 인물이고, 다윗은 주전 천년경의 인물이다. 수천 년이 지나서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 하나님은 결코 조급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 3: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것도 벌써 2천년이 지났지만 그는 반드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믿음으로 바라보자. 성도는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성도가 되자.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은 변개함이 없다.
그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는 약속과, 다윗의 자손으로 영원한 왕위를 얻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셨다. 사람에게는 약속을 쉽게 어기는 불성실함이 많다. 시간 약속을 어기는 경우도 있고 돈에 대해 불성실한 일도 있다. 약속을 어기는 것은 죄악이다(롬 1:31). 그러나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는 약속대로 메시아를 보내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본받아야 한다. 특히 시간과 돈과 말에 있어서 약속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약속에 성실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인격자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이다.
셋째로,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을 만세 전에 계획하며 작정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주권적 능력자이시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성 때문에 약속을 못 지킬 경우가 있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무슨 일이든지 행할 능력이 있으시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그의 때와 그의 하시는 일을 기다리자.
유대인의 복음서라는 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이 말은 전통성이 있는(남, 북조로 나눠진 후) 하나님의 백성이란 점 때문이다. 이 문제는 뒤에 나온 성경해석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하는 대목이다.
또 하나 특징이 있다면 '나라'(18번)라는 개념이 강조 되어 있다는 점이다. 교회라는 말도 마태복음서에서만 두 번 기록되어 있는데,(마16:18, 18:17)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그리스도의 왕국)가 강조되어 있는 마태복음서에 다른 복음서에는 단 한 번도 기록된바 없는 '교회'란 말이 왜 마태복음서에만 기록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도 교회론에 있어서 절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고 마태복음을 공부했으면 한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마태 1장)
1) 양성(인성과 신성)을 소유 하신 왕
마태복음 1장은 크게 둘로 나눠져 있다.
(1)1~17절까지는 인간의 혈통을 따라 탄생 하신분임을 증거하고 있어 예수는 사람이시다(인성예수)라는 것을 말씀 하고 있으며,
(2)18~25절까지는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탄생 하신 분임을 증거하고 있어 예수는 하나님이시다(신성예수)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양성(兩性)을 가지신 예수라 한다.
2) 왕의족보이야기
예수님의 족보이야기에 왜 하필이면 약점 있는 4명의 여인들의 이름을 넣어 기록했을까? 이 대목은 이 성경에 등장된 여인들이 주목할 만한 내용이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1)유다는 다말에게서- 다말은 세일(에돔) 출신으로 시부(媤父)와 동침해서 메시아 족보를 이어준 여인이고, 다말(Tamar)은 유다의 장자인 엘의 아내이다(창 38:6). 엘이 죽은 후 계대결혼 풍습을 따라 시동생이던 오난의 아내가 되었다(창 38:8). 하지만 오난은 형수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땅에 설정했고 결국 이를 악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다(창 38:9-10). 그 후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하였는데도 자신을 그에게 아내로 주지 않자 다말은 창녀로 가장하여 유다에게 나아갔다(창 38:14-18). 그리고 유다를 통해서 결국 베레스와 세라 쌍둥이의 어머니가 되었다(창 38:29-30). 그녀의 이름은 유다 지파의 계보와 그리스도의 족보 중에 실려 있다(룻 4:12; 대상 2:4; 마 1:3).
(2)살몬은 라합에게서- 라합은 가나안 여리고성의 기생 출신으로 보아스의 어머니가 되어 메시아 족보를 이어 준 여인이었고, 라합(Rahab)은 고대 근동의 신화에 나오는, 바닷 속에 사는 신비한 괴물의 이름이다. 욥기에는 하나님께서 라합을 정복하시는 모습이 묘사되었다(욥 9:13; 26:12). 여기서 라합은 교만하고 사악한 자를 뜻하며, 욥은 이런 세력마저도 하나님은 권능과 지혜로 능히 물리치실 수 있음을 말했다. 시편 기자는 시온의 영광을 노래하면서 애굽을 라합이라고 표현했다(시 87:4). 또 출애굽 때에 애굽을 물리치신 하나님의 권능을 “주께서 라합을 살륙 당한 자같이 파쇄하시고”(시 89:10)라고 말했다.
(3)보아스는 룻에게서라는 내용은, 룻은 모압 출신으로 남편을 사별하고 시모(媤母)를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노총각 보아스와 결혼 메시아 족보를 이어 준 여인이었다.
보아스(Boaz)라는 인물은
1. 룻의 남편이자, 다윗의 증조부이다(룻 4:13-17). 그는 살몬의 아들로 유대 베들레헴에서 살았다(룻 2:4). 부유한 농부로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율법에 순종하여(레 19:9-10; 신 24:19-22) 가난했던 나오미와 룻을 도와 주었다(룻2:1-23). 그는 룻으로부터 전남편의 이름으로 기업을 무르는 사람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자(룻 3:9) 이 일에 대해 책임질 만한 더 가까운 친족에게 의향을 물을 만큼 신중한 사람이었다(룻 4:1-12). 그리고 기업 무를 책임이 보아스에게 돌아오자 룻과 결혼하여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을 낳았고(룻 4:13-17)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마 1:5).
룻(Ruth)은 사사 시대에 살았던 모압 여인이다(룻 1:4). 룻은 유대인 엘리멜렉의 아들 말론과 결혼했다가(룻 1:1-4; 4:10) 과부가 되었다(룻 1:5). 그 후 그녀는 자기 족속에게 돌아가지 않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좇아서 유대 땅으로 갔다(룻 1:16-18). 유대 땅에서 나오미를 잘 봉양했던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였다(룻 4:13). 룻은 원래 말론의 가장 가까운 친척과 결혼하도록 되어 있었으나(룻 4:1-6; 참고, 레 25:25), 그가 기업을 무르지 않겠다고 하여, 그를 대신해서 기업을 잇겠다고 했던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었다(룻 4:1-13).
이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오벳이었는데(룻 4:13-17), 이 아이는 보아스의 아들이 아닌 엘리멜렉의 상속자로 간주되었고(신 25:5-10 참고)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룻 4:17). 그녀는 다윗의 증조할머니로 메시아의 족보에 오르는 여인이 되었다(마 1:5).
오벳(Obed)이란 인물은 보아스와 룻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룻 4:13-17). 그는 이새의 아버지이자 다윗의 조부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가 되었다(마 1:5).
(4)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는 헷 사람(전 남편) 출신(?)으로 다윗과 간통으로 만나 메시아 족보를 이어 준 여인이다.
이렇게 보면 4명의 여인들은 유대인들의 생각으로는 전혀 인정하거나 용납될 수 없는 이방 여인들이고, 더구나 정상적인 여인들과는 다른 수치스런 전력,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보편적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여인들을 하필이면 예수그리스도의 계보 이야기에 꼭 끼어 넣어야 했을까?
물론 이런 것을 두고, 이방인도, 죄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의도적 편집이라 한다. 그럴 만한 이야기다.
이 여인들을 하나하나 깊이 살피면 참으로 가슴 아픈 사연들을 가진 여인들이다. 이분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쓰임 받은 여인들이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 한 것들이 아니다. 하나같이 이 여인들은 남다른 용기가 있는 여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인도된 일이었겠지만 이들이 유다 족에 편입된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지금이야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만 그 당시는 히브리백성이 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 되는 유일한 조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여인들의 선택은 사람의 비난이나 죽음까지도 초월한 하나님의 큰 뜻을 위한 선택받은 여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미화 하려는 말이 아니다. 다말이 정욕 때문에 변장을 하고 시부와 동침을 한 것이 아니다. 만약 정욕 때문이었다면 다른 남자도 얼마든지 섹스파트너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고, 아합 역시 정탐꾼을 숨겨 준 일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한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고, 룻 역시 시모 나오미를 따라 나설 때부터 그는 믿음을 보여 주었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하도다’(룻3:10) 이 때 보아스는 기생의 자식이란 것 때문에 노총각이 되도록 장가를 못 같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시모 나오미의 말을 순종하여 심야에 노적가리 곁에서 잠든 보아스를 찾아간 그 밤에 보아스가 룻에게 한 말이다. 이 한 구절 속에 담고 있는 내용은 보아스가 얼마나 감동했는가를 잘 보여준 말씀이라 할 수 있다.
밧세바에 대해선 특별히 감동될 만한 사건은 없는 듯 보인다. 왕의 절대 권력에 어쩌면 몸을 내 줄 수밖에 없었겠지만, 다윗의 임종의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키면서 선지자 나단의 지시(협력)을 받아 자기 자식으로 왕의 자리를 계승하게 했던 여인이란 점에서 다윗의 다른 여인들과는 다른 모습을 가졌던 것만은 분명했다. 어쩌면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란 말이 밧세바의 행적에서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한다.
3) 14대, 14대 14대의 의미
(1)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요,
(2)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요,
(3)바벨론으로 사로 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요,
이것을 역사의 마디라고 말한다. 역사(History)란 마디를 만든 역사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3국 시대, 3국 통일시대, 이조(조선)시대, 일본 식민지 시대, 남북시대, 이와 같이, 구속사에서도 원시시대, 족장시대, 사사시대, 왕국시대, 포로시대, 유대교시대, 신약시대, 중세시대, 개혁교회시대, 이렇게 기록상으로 구별을 한다.
이것은 대나무가 마디를 만들면서 높이 자라는 것과도 같다. 시대기록의 구별을 하는 것을 두고, 어떤 분들은 ‘세대주의 자’라고 비난 하는 분들도 더러 있는 걸 봤다.
무엇을 두고 세대주의라 하는 지 또는 이걸 세대주의라 한다면 세대주의란 무엇이 문제인가, 이런 걸 필자는 아직 이해를 못하겠다. 필자는 성경에서 14대, 14대하고 기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걸 말하는 것뿐이고, 역사진행이 이렇게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왜 이 말을 하는가?
개혁교회가 출벌한지(1517년) 2016년이면 5백년이 된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구속사의 진행에 나타난 것을 보면 4백년 혹은 5백년을 주기로 해서 큰 변동이 있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변동이 있을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1장 이야기가 좀 길어져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설명을 하려고 한다.
4)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왕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18~25절까지는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분이란 점을 중시하고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말하게 된다.(예수는 참 하나님이란 증언을 한 구절들은 이 밖에도 많다.) 예수 탄생과 관련된 기사는 누가복음 2장에서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5) 정혼한 여인의 선택
(1)왜 하필이면 정혼(약혼)한 여인 마리아를 선택했을까? 이 여인은 약혼은 했지만 남자와 동거하기 전 이었다. 우선 쉽게 생각해서 남자와 동거한 여인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성령이란 거룩 성의 보존이 우선 허용되지 안 했을 것이고, 그럼 차라리 처녀를 선택 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왜 하필 약혼한 여인이냐는 것이다.
정혼(Be pledged to marry)이란 약혼을 의미하는 말이다. 구약에서 정혼한 상태는 결혼에 대한 구속력을 지녔고 정혼한 여인을 범하는 것은 죄에 속하였다(출 22:16; 레 19:20). 마리아와 요셉은 정혼한 사이였고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사실을 알자 요셉은 조용히 파혼하려고 하였다(마 1:18).
마리아(Mary)는 요셉의 아내이자 예수님과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을 비롯한 예수의 형제들의 어머니이다(막 6:3-4).
나사렛 마을에서 살던 그녀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서 동정녀의 몸이지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 예수를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소식을 들었다(마 1:18; 눅 1:26-37). 이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이 사실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믿음을 보였다(눅 1:38). 그리고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바로 사가랴의 집에 가서 엘리사벳을 만났으며 엘리사벳에 의해 천사가 전해준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받았다(눅 1:39-45).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령을 받고 정혼한 요셉과 함께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갔다가 어느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다(눅 2:1-7).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 율법에 따라 낳은 지 8일 만에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행하였으며 정결 예식을 행하러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반구 둘로 제사를 드렸다(눅 2:21-24). 거기서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과 안나를 만났다(눅 2:25-38). 누가복음에는 이 모든 일을 마치고 나사렛에 돌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눅 2:39) 후에 헤롯의 유아 살해 명령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 간 것으로 보인다(마 2:13-18). 그 후 헤롯이 죽자 주의 사자의 메시지를 듣고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와 살았다(마 2:19-23).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갔으며 일행과 떨어진 예수를 찾아 헤매다 성전에서 랍비들과 토론하고 있는 어린 예수를 발견하였다. 거기서 마리아는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사실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눅 2:41-51).
(2)이 문제도 보편적으로 생각 할 때 이유가 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통용되는 사회법이 처녀가 임신한 것이 발견되면 마을 사람들 앞에 끌려나와 돌로 맞아 죽어야 하는 것이 법이었다. 그래서 정혼은 했으되 아직 남자와 동거하기 전의 여인의 몸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묘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이 일에는 몇 가지 절차가 선행 되어야 했다.
(3)몸을 내 놓을 수 있는 여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통보 할 때 마리아는 이런 일이 어찌 이러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한다. 하지만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마리아는 ’나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고 헌신을 고백해서 마침내 마리아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 지게 된다.
(4)보호자가 필요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은 자연의 질서를 따라 생육법적 절차와 같이 잉태해서 10개월의 잉태기간을 거쳐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마리아의 몸에 잉태했다는 사실을 약혼자 요셉이 알아차린 것이다. 이 때 누구보다도 분개하고, 배신감에 치 떨어야 할 사람은 바로 요셉이다. 한데, 요셉은 이 일을 들어 내지 않고, 그 여인과의 관계를 조용히 끝내고자 결심하기까지, 요셉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약혼 여와 끝내기로 결정했을 때 천사가 꿈에 찾아와 ‘요셉아! 네 아내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 여인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다.’(마1:20) 이때부터 요셉도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을 위해 헌신하게 된다. 이때부터 요셉은 약혼녀의 몸속에 있는 그분을 위해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우선 아이가 낳기까지 동침을 하지 아니했고, 호적 하러 베들레헴을 동행해야 했고, 마구간에서 몸을 풀 때, 곁에서 도와야 했고, 미쳐 추 수리지도 못했을 때 어린 핏덩이를 안고 애굽이란 멀고 먼 피난길을 가야했다.
얼마가 걸렸을까 헤롯이 죽은 후에야 돌아올 수 있기까지 요셉의 보호 없이 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 날 수 있었을까? 그래서 그를 의인이라 칭함이 된 게 아닐까? 이와 같은 일은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아직 심판하시기 전까지는 계속되는 일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마리아와 요셉과 같은 헌신 자가 필요하신 것이다. 과연 ‘내가 당신의 종이오니 주의 뜻대로 내게서 이루어 지이다’ 하고 몸을 주께 내 놓는 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그 몸을 통해 주의 일은 이 땅에서 진행이 된다. 이 사건은 이미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건들이었다.(1:23, 2:15-18).
이응주 목사(재일한국선교사협의회(CCKJ) 회장 역임, 일본 도가네교회)
E-mail : ungjoor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