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따라가다가, 꿈의 지시대로 순종한 사람들

by wgma posted Jun 13, 2015 Views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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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주목사와 함께하는 성경강해-2

별 따라가다가, 꿈의 지시대로 순종한 사람들

(마태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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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나 지금도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 가운데 지도자들에 질문을 던지고 싶다. 성경이 예언한 말씀 따라서 길을 가고 사역현장에 임하고 있는가? 신령한 꿈을 몇 번이나 꾸고 자연에 나타난 신비한 별을 발견하고 믿음의 길을 따라간 일이 있는가? 필자 자신도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여기까지 지내왔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에벤에셀(삼상 7:12)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마태복음 2장에서는 크게 3단락으로 나누어서 생각 할 수 있다.

(1)1~12절까지는 꿈을 따라온 동방박사들의 방문(멀고 먼 여행자들)

(2)13~18절까지는 꿈에 지시를 받고 피난 가는 아기예수(선지자의 말씀같이)

(3)19~23절까지는 꿈에 지시대로 나사렛으로 간 예수(나사렛 예수)

동방박사들은 헤롯 궁으로 들어가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묻게 되었다. 먼저 헤롯에 대해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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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헤롯 왕

헤롯 왕(헤롯 대왕, 주전 40-4년)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는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였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소동하였다.

둘째 유다 총독 헤롯

헤롯(Herod)은 BC 55-AD 93년경까지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팔레스타인과 그 인접 지역을 다스리던 이두메 왕조의 왕들을 말한다. BC 1세기 초 알렉산더 얀네스(Alexander Jannes)에 의해 안티파테르(Antipater) 1세가 이두메의 통치자로 임명되면서 이두메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안티파스(Antipas, 안디바) 2세가 BC 47년 율리우스 케사르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어 유다 지역을 다스리면서 헤롯 왕가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는 한 아들인 파사엘에게는 예루살렘을 통치하도록 하였고 헤롯(헤롯대왕)에게는 갈릴리 총독 자리를 주었다.

셋째 헤롯 대왕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은 유아살해 명령을 내린 왕으로 안티파스 2세의 둘째 아들로 BC 47년, 25세의 나이에 갈릴리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갈릴리 지역의 도둑떼를 소탕하며 하스몬 왕가의 안티고누스(Antigonus)가 갈릴리를 침입하였을 때도 그들을 물리치는 등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났다. 아버지 안티파스가 암살당한 후 형 파사엘과 함께 유다의 분봉왕으로 임명되었으며 BC 40년에는 로마 황제 아구스도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BC 37년이 되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던 파르티아 군대와 안티고누스 왕을 물리치고 유대인의 왕위를 얻게 되었다.

넷째 헤롯의 정치적 수완

헤롯은 로마 정부와 유대인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등 왕으로서의 정치적 수완을 보여 주었다. 지중해 연안에 항구 도시를 만들어 가이사 아구스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가이사랴라고 칭하기도 했으며, 사마리아와 여리고 같은 도시들을 재건하였고, 헬라 양식의 극장이나 원형 경기장 등과 같은 건축 사업도 활발히 수행하였다. BC 20년에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헤롯 성전이라고 불리는 이 성전은 그가 죽은 후 68년경에 완성되었다.

다섯째 헤롯은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다.

헤롯은 순수한 유대인은 아니었다. 에돔 출신으로 선조가 개종하여 유대인이 된 반쪽짜리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스몬 왕가의 딸 마리암네와 결혼하여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주 잔혹하여 자신의 왕권을 노린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가족도 예외없이 처단하였다. 그는 왕비 미리암의 남동생 아리스토불루스, 할아버지, 어머니, 왕비 미리암, 미리암의 두 아들을 차례로 죽였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유아 살해 명령을 내리는 잔인함도 보였다(마 2:16-18).

여섯째 헤롯의 유대인 살해 명령

헤롯은 자신이 죽은 후 국가적인 애도 기간을 확실히 하고자 여리고에 있는 경기장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BC 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일곱째 베들레헴이란 지명의 뜻

베들레헴(Bethlehem)이란 지명으로 ‘떡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예루살렘 남쪽 8km에 위치한 예수님의 탄생지이다(눅 2:15). 주변에 감람나무가 많고 해발 700여 미터의 산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여덟 번째 미가의 메시야 탄생지로 예언된 곳

구약에서 ‘에브랏’으로 불리우기도 했던(창 35:19; 48:7; 미 5:2) 이곳은 스불론의 베들레헴과는(수 19:15) 구별되는 유다 베들레헴이다(삿 17:7). 미가 선지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고(미 5:2; 마 2:6) 그 예언은 메시아가 그곳에서 탄생함으로 성취되었다(마 2:1).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이 미가의 예언을 믿고 있었다(요 7:41-42).

아홉 번째 다윗 왕의 고향 베들레헴

베들레헴은 나오미의 고향이기도 하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모압 땅으로 이주했다가(룻 1:1-2) 룻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룻 1:19, 22). 이곳은 다윗 왕의 고향이기도 하며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부은 곳이기도 하다(삼상 16:1-13; 17:12, 15, 58). 사사 시대 미가의 집에 거주하였던 레위인 소년도 유다 베들레헴 출신이었고(삿 17:9) 다윗의 30명 용사 중 하나인 엘하난도 이곳 출신이었다(왕하 23:24). 요압의 형제인 아사헬이 묻힌 곳이며(삼하 2:32)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난 사람 중에는 베들레헴 사람 123명이 있었다(스 2:21).

열 번째 순례 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이 작은 도시는 지난 2,000년 간 성지 순례 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며 특히 성탄절에는 세계 각국에서 수만 명이 몰려들어 여러 가지 행사를 벌인다.

열한 번째 성경에 나오는 박사들의 모습

성경에 나오는 박사(Wise man)는 현자(賢者), 점성술이나 마술 등을 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개역성경에 ‘박사’로 번역된 단어는 아람어로는 ‘학키민’(chakkimin), 히브리어로는 ‘하카밈’(chakamim), 헬라어로는 ‘마고스’(magos) 이다.

먼저 ‘학키민’은 다니엘서에 나오는데, 바벨론에서 직업적으로 점성술, 마술 등을 행하던 사람들(단 2:12-14; 2:18, 24, 27, 48, 4:6; 5:7-8)로, 현자 즉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 ‘하카밈’도 이런 사람을 가리키며 개역성경에는 박사(창 41:8; 출 7:11; 렘 51:57; 겔 27:8) 외에도 지혜로운 자(욥 15:18; 옵 1:8), 지혜자(전 2:14; 7:4)로 번역되었다. 이들은 주로 바벨론(렘 50:35), 애굽(창 41:8; 출 7:11), 바사(에 1:13; 6:13) 등에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에 대해서 전도서 기자는 윤리적인 면에서의 지혜로운 사람으로 보고 있다(전 2:14; 9:17; 10:12).

‘마고스’는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점 치는 일에 능했던 메대 사람들이었다. 학자였거나 조로아스터교의 승려들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들은 꿈을 해석하거나 점치는 사람으로, 신약성경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마술사라고 했다(행 13:6, 8).

열두 번째 동방 박사

동방 박사에 대하여 찬송가 116장은 “동방 박사 세 사람 귀한 예물 가지고”로 시작된다. 여기서 동방이란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른데, 이들이 가져왔던 예물이 생산되던 곳을 근거로 아라비아, 천문학이 발달했던 바벨론, 또는 바사 등으로 본다. 그럼 진짜로 동방에서 왔던 박사들이 세 명이었을까? 별을 따라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그리스도를 찾아 경배하러 왔던(마 2:11) 그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왔다. 성경 외의 전승들은 선물이 세 가지였던 것에서 박사들이 세 사람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 사건에서 확실한 것은 이들이 메시아 예언의 장소를 몰랐던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복음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이미 전해졌던 것이다.

열세 번째 유향

유향(Incense)이란 감람 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에서 채취한 진액으로 만든 향기로운 향품이다. 점액질 고무를 얻어낼 수 있으며 여름에 수집된다. 끈적거리는 고무가 나무껍질에서 처음 추출될 때는 호박 빛이지만 일단 나무에서 분리가 되면 진액이 그 표면에 하얀 분말을 내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 성경에 나오는 유향은 홍해 연변의 유향나무에서 채취한 것으로 불에 태우면 강한 향기를 발했다(사 60:6; 렘 6:20). 이는 향료로 사용되었고(출 30:34-36), 진설병과 함께 제단에 올려졌다(레 24:7).

그러나 속죄제(레 5:11)와 의심의 소제(민 5:15)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예물로 드린 것 중에도 들어 있다(마 2:11). 유향은 기도의 상징으로도 쓰여 졌다(시 141:2; 계 8:3).

열네 번째 몰약

몰약(Myrrh)이란 난초과의 소교목으로 몰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모르’(mor)는 향료의 일종으로 발삼나무(Balsamodendron myrrha)에서 얻어지는 방향성 나무진이다. 줄기와 가지에서 저절로 방향성의 수액으로 생성되며 공기 중에 노출되면 황갈색을 띠며 딱딱하게 굳는다. 액체 몰약은 고귀한 것으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예물 중 하나였고(마 2:11),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고가의 수입품 중 하나였다(아 3:6).

액체 몰약은 관유를 제조하는 데 사용되었다(출 30:23). 향기가 좋아 옷이나 침상에 뿌려졌고(시 45:8; 잠 7:17) 향주머니에 넣어 여인들의 품에 간직되었다(아 1:13). 또 여인의 몸을 정결케 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에 2:12).

창세기 37:25과 43:11의 ‘몰약’은 히브리어 ‘로트’(lot)에서 번역한 단어이다.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특산물로 ‘시스투스(Cistus) 장미’ 또는 ‘바위장미’(Commiphora Villosus)에서 추출한 것으로 쓴 맛이 있고 향료로 사용되었다.

* 마취제와 방부제로 사용된 몰약

마취제의 기능도 있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도록 제안 받으셨다(막 15:23). 방부제의 기능도 있어 유대인들은 장례에 몰약을 사용하였다(요 19:39). 고대의 애굽인들은 몰약을 신에게 드리고 미이라를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열다섯 번째 경배의 대상

경배(Worship)는 특정한 대상을 공경하여 예배하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어로는 ‘샤하’(shachah), 헬라어로는 ‘프로스퀴네오’(proskyneo)로 ‘머리를 숙이다’, ‘경외함으로 절하다’, ‘손에 입맞추다’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나 거짓 신에 대한 숭배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창 24:26; 출 24:1; 신 4:19; 삼하 12:20; 마 4:9; 눅 24:52).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경배받으실 분(마 4:10)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자신도 친히 경배받으셨다(요 9:38). 반면 베드로는 자신에게 경배하는 고넬료를 말렸다(행 10:25 이하).

 열여섯 번째 유대인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 이것은 구약 예언들의 성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 오셨다. 그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는 그의 몸(엡 1:22-23)이시다. 만 인류의 구원의 주님이시며 만왕의 왕(딤전 6:15, 계 17:14, 19:16)이시며 만주의 주(딤전 6:15)님이시다. 교회는 그의 나라의 시작이다. 그는 지금 영적으로 우리의 심령을 다스리시지만, 장차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에 온 세상을 영육으로 다스리실 것이다. 지구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즐거이 순종하며 그 나라를 위해 즐거이 봉사해야 한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는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있을 때이고, 로마의 가이사(황제) 아구스도가 전 로마의 통치지대의 사람들에게 호적신고를 하도록 영을 내렸을 때에 마리아와 요셉도 호적을 하러 고향 베들레헴에 갔다가 거기서 아기 예수를 출생하게 된다.(눅2:1-7 참고)

1) 동방의 박사들이 착각하고 찾아간 헤롯 궁

이때 동방의 천문학자(박사/점성가들)들이 별을 관찰 하던 중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발견하고 그 별을 보고 유대(팔레스타인)에 이르러 예루살렘 헤롯 궁을 찾아간다. 그리고 자기들이 동방에서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왕 헤롯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알려져 순식간에 예루살렘엔 소동이 일어났다.

헤롯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모아놓고,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나겠느냐고 묻는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미가선지가 예언한 말씀을 정확하게 찾아 보고하기를 ‘베들레헴’이라고 가르쳐 준다.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 말을 듣고 동방의 박사들은 베들레헴을 향해 길을 떠나려는데, 헤롯왕이 동방 박사들에게 부탁을 한다. ‘당신들이 찾으면 돌아 올 때 내게도 알려 주시오, 나도 그에게 경배하러 가겠오’ 박사들은 베들레헴으로 가는데, 동방에서부터 보던 별이 다시 나타나 예수 나신 곳까지 인도해 준다.

서기관(Secretary)은 문서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직무를 담당한 사람을 말한다(왕하 12:10; 대하 34:13). ‘비서’와 같은 뜻으로도 쓰였다(왕하 12:10-NIV). 히브리어로는 ‘소페르’(sopher)로 직업적인 필사자를 이르는 말이었다. 이들은 계약서를 베껴 쓰거나 문서나 편지를 작성하고 구술(口述) 등을 받아 적는 일을 하였다(렘 32:10-12; 36:4, 18). 바룩은 예레미야가 구술한 예언을 받아 적는 일을 한 서기관이었다(렘 36:18).

그리고 후대에 가서 이들은 율법을 필사하고 보존하며 해석하고 가르치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스 7:6; 렘 8:8). 서기관들의 이런 역할 때문에 서기관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사, 학자로도 불렸다(스 7:6; 사 50:4). 에스라가 이러한 역할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스 7:10).

왕의 서기관(대하 24:11)들은 왕의 비서 역할을 감당하며(왕하 22:3; 대상 27:32) 왕실 내의 모든 사건을 기록하며 보관하는 일을 하였다(왕상 4:3). 히스기야 때의 서기관 셉나는 히스기야의 명을 받고 앗수르 사람들과 협상하기 위해 파송되는 중요한 일을 맡았다(사 36:3). 요시아 왕 때의 서기관 사반은 일종의 회계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였고(왕하 22:3-7), 왕 앞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낭송하였다(대하 34:15).

포로기 이후에 이들은 한 계급을 이루었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서기관(마 5:20), 율법사(마 22:35), 랍비(마 23:8), 교법사(딛 3:13), 선비(고전 1:20) 등으로 불렸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보존하는 일에 주력하였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승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도록 다시 세칙을 만들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장로의 전승, 유전 준수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율법의 근본정신보다는 형식주의와 외식에 빠지게 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마 15:2-9).

이들은 공회에서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권력층에 속하였고(마 16:21; 26:3, 57)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는 자리에 있었다(눅 20:46).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외식과 형식주의를 책망하셨다(마 23:2-36). 이들은 이러한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세력이었다(마 21:15; 눅 22:2). 결국 이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율법 지식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치명적인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눅 22:66; 23:10).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핍박하는 무리들 가운데 한 세력이었으며(행 4:5),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였다(행 6;12).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부활 문제에 대하여 바울의 편을 든 사람도 있었고(행 23:9) 예수님을 믿은 사람도 있었다(마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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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길로 돌아가는 박사들

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고 돌아오려는 데, 천사가 꿈에 나타나 오던 길로 가지 말고 다른 길로 가라는 지시를 따라 고국으로 돌아갔다. 왜 천사가 동방박사들에게 오던 길로 가지 말고 다른 길로 돌아가라 했을까? 그것은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결과를 알고 있는 천사는 동방의 박사들에게 다른 길로 가라고 지시한 것이다.

*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본 과제가 무엇인가?.

예수를 만난 사람은 과거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다른 길로 가야만 한다. 만약에 예수를 만난 후에도 여전히 옛사람의 습관대로 살던 구습을 버리고(엡 4:22) 믿음의 길로 다시 돌아갈 때는 예수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 사실 지금도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과거 죄악의 길로 여전히 갈 때는 상처를 입는 것은 자신이 아니고 예수님이다. 지금도 교회가 불신자들에게 조롱과 불신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수가 잘못해서 교회가 욕먹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욕을 당하고, 교회가 욕을 먹는 것은 곧 예수가 욕을 먹는 결과들이 되어 왔다. 인도의 무저항 주의자로 살았던 마하트마 간디란 사람이 죽기 전에 그런 말을 남겼다지 않던가? ‘나는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 왜 인도의 국부라 불리 운 간디가 그런 말을 남겼을까? 이것은 그리스도의 품을 찾아오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을 대표적인 예에 불과 한 것이다. 예수 만난 사람은 새로운 길을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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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함이 없는 성직자들

여기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본다.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은 당시의 성직자들이었다. 그들은 동방박사들의 예루살렘 방문으로 예루살렘지경이 왈칵 뒤집어진 상황 속에서 헤롯왕의 소환에 따라 헤롯 궁에 모여 동방박사들이 방문한 설명을 듣고, 성경을 해석 해준 성직자들이다. 이들의 성경 해석을 따라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을 찾아 아기 예수를 경배를 했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생명이 출생할 때 는 좋은 환경에서 조산원이나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산모의 출산을 지켜주고 있다. 그러나 아기 예수가 탄생할 때는 조산원이나 따뜻한 방이나 좋은 환경이 아닌 가장 낮은 분위기 춥고 더럽고 냄새나는 말구유(밥통)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경해석을 해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은 아기 예수를 찾아가 경배한 자들이 단 한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동방의 박사들도, 들에서 양치는 목동들도 아기예수를 경배한 기록은 있지만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경배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흔적도 나타나 있는 곳이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성경을 너무 잘 알고, 그것을 해석해서 가르쳐 주면서도 자기들은 왜 말씀을 따라 베들레헴을 찾지 안 했을까?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것인가?,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신분이 성직자라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노략질 하는 이리라’(마7:15)고 말씀하고 있다. 몰랐을 때는 허물하지 않지만 알면서도 행치 않는 죄는 핑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이 당시의 성직자들이었다.

3) 헤롯의 착각으로 만들어진 죄악

헤롯의 착각으로 인한 결과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희생된 현장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오늘날 교회지도자들이 진리의 말씀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내용을 바로 가르치지 못한 결과로 귀한 생명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희생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외치는 자들의 소리는 많지만 생명을 살리지 못하고 세상방법으로 성경말씀을 지식전달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현대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누구인가를 진단해 보아야 한다.

헤롯은 동방의 박사들의 접견을 통해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에게 부탁을 했다. ‘당신들이 가서 태어난 왕을 만나면 돌아오는 길에 내게도 말해 주쇼, 나도 그에게 경배하러 가려고 하오’ 그렇게 부탁을 하고 동방의 박사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박사들에게 속은 걸 깨달은 헤롯은 군인들을 불러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아래의 남자아이들은 모조리 죽이라고 영을 내렸다. 마침내 군인들은 왕의 명을 따라 죄 없는 사내아이들의 생명을 무참히도 학살을 자행했다. 왜 이런 끔찍한 죄를 저질렀을까?

이 사건은 헤롯의 단순한 오해와 착각으로 인한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은 헤롯에게는 엄청난 위협이 되는 사건이다. 자기의 권력과 왕좌에 대한 도전이요, 로마를 상대한 반역자의 탄생이라고 생각 했던 것이다. 물론 이때의 헤롯에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생각은 당시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을 비릇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 했으니 이두 매 출신 헤롯이야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 나라의 왕이(요18:36)란 사실을 헤롯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가진 지식이라 하면 세상의 학문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세상의 초등학문이 지식의 전부는 아니다(골 2:20). 헤롯이 성경을 알았다면, 선지자들의 예언의 글을 알았다면 이런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기야 성경 박사들이라고 자처했던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도 성경을 알뿐 성경말씀을 믿은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어찌 헤롯이야 두 말할 것 없는 일이었다.

*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가슴)으로 믿는 신앙의 삶은 생활 속의 태도와 언행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구분되어진다. 그래서 요즈음과 같이 성경공부를 여러 가지 형태로 하면서 지역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학 박사들 교수들 혹은 대형교회 목사를 통해서 양적부흥과 그들이 체험한 목회스타일을 모방하려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내 손에 들려있는 성경에서 주님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보다 분위기에 민감하게 움직이는 것이 오늘의 교회지도자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고 되어 진다.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학공부를 하고, 수십 년 성경을 읽고 통독을 했어도 뒤늦게 보니 지난날이 소경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성경을 바로 알고 이해 한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지식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의 감동(벧전 1:21)과 조명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으니 어쩌면 그래서 성경(하나님의 말씀)인지도 모른다. 호세아서의 예언한 말이 생각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호4:6상)

4) 부모의 품에 안겨서 피난길을 떠나는 어린 왕

동방의 박사들은 떠나고 난후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헤롯이 아이를 죽이려하니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13-)하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다. 이 사건은 호세아선지를 통해 이미 에언 해놓은 대로였다.(호11:1)

부모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가 피난을 떠난 후에 벌어진 사건을 생각해보자. 한편 헤롯은 동방박사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영영 나타지 않은 것을 알고, 비로소 박사들에게 속은 줄 깨닫고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박사들이 다녀간 때를 계산해서 베들레헴 지경에 있는 2살 아래의 사내 아기들을 죽이라고 지시를 하니 병사들은 그 지경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임으로, 자식 잃은 그 지경의 여인들의 통곡은 산천을 흔들고, 눈물은 강물이 되었다. 이것은 이미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대로였다.(렘31:15/ 마2:1-12, 16-18)

왜 동방의 박사들이 끝까지 별의 인도를 받지 안 했을까? 만약에 인도하던 별이 없어졌다면 별이 나타 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릴 수는 없었을까? 그래서 예루살렘을 찾아갔고, 헤롯 궁전을 찾아 헤롯왕을 면담했는가? 박사들의 생각은 왕의 탄생은 당연히 왕궁에서 태어 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왕궁을 찾아 갔을 것이다.

박사들이 헤롯궁을 찾은 일로인해 베들레헴 온 지경에 있는 죄 없는 어린 생명들이 무참하게 학살을 당하는 이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것을 생각해 보라, 하지만 이 엄청난 재앙을 가져왔던 동방의 박사들은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사실조차도 모른 채, 콧노래를 부르면서 귀국했을 것이고, 그들은 죽는 날까지도 이 슬픈 비극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 동방박사들이 왕궁을 찾은 실수로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의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죽임을 당했다면, 지금도 예수를 만나기 위해 화려한 권력을 찾고, 웅장한 곳을 선호 한다면 당신의 그 행위로 인해 당신이 알지 못한 곳에서 참혹한 죄 없는 생명들이 희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는 초라한 베들레헴 마구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도 궁권과 같은 예배당이라는 거대한 종교 문화안에 예수가 나타나실까? 죄로 더러워진 회개한 사람들의 마음에 개인적으로 예수 영접으로 들어오시기를 원하시는가? 어떤 공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 마음에 주님을 영접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5)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왕(요 18:36-37)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동방박사들이 헤롯 궁을 찾게 된 것은 상식의 판단 때문이었다. 왕은 당연히 왕궁에서 태어 날거라고 생각했던 동방의 박사들, 신앙의 길에서 상식의 선택은 엄청난 죄를 생산해 낸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왕궁에서 예수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많다.

동방의 박사들이나 헤롯의 씻지 못 할 죄악을 저지른 것은 왕에 대한 인식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들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사람들도 잘못된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다. 물리적 힘과 권세를 자랑하는 땅에 속한 왕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유대인의 메시아사상이다.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동방의 박사들과 헤롯이었고, 지금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더러는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예수를 믿어 물질도, 명예나 권세를 얻는 것도 예수 믿어 복 받아 이룬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고가 여기에 속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기복신앙을 강조하는 잘못된 지도자들 때문에 방황하는 어리석은 양들이 얼마나 많은가?

분명한 것은 예수는 왕은 왕이시되 이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다.(요18:36-37 참고)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니까, 빌라도가 묻는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 이다.’(요18:37)

그런데, 예수가 말씀하신 왕에 대한 이해는 진리에 속한 자는 듣는다 했는데,(요18: 36하) 불행하게도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 세계가 되어 있다. 이해를 못한 결과는 예수가 왕 되신 걸 부인하고, 오직 종교의 신(하나님)으로만 존재하게 만든 것이 지금의 세상이고, 기독교의 실상이 아닌가 한다.

예수는 헤롯 궁에서 탄생하신 분이 아니라 작은 고을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분이다. 세상에 속한 왕은 왕궁에서 태어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왕은 짐승의 우리(밥통)에서 태어나셨다.

우리는 이제라도 분명하게 예수가 누구신가를 바르게 인식을 해야 한다. 예수는 종교의 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권세를 부리는 땅의 왕도 아니다. 예수는 왕이시되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시다. 그렇다면 그 왕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고 질문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21세기에는 이 질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6) 다시 꿈의 지시로 귀환하는 왕

애굽에 내려와 있던 요셉의 꿈에 천사가 다시 나타났다. ‘헤롯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 요셉은 일어나 아이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헤롯이 죽고 그의 아들이 헤롯의 왕권을 계승해 왕이 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요셉은 두려워했다.

이 때 천사가 꿈에 다시 나타나 요셉을 갈릴리 지방 나사렛이란 동네에 머물러 살게 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냐’(요 1:46)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7:52) 했던 사람들의 의식에서 폄하된 지역, 그래서 예수는 나사렛의 예수가 되셨다. 지금도 대도시나 농어촌에 무목 교회가 있으면 어떤 목사를 청빙하려고 하는가?

이 시대에는 과연 어떤가?

대부분의 중대형 교회 목사의 설교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건 그들의 설교는 진리가 되고, 이름 없는 작은 개척교회 목사의 설교는 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 박사, 교수들의 말은 진리로 받아드리지만 아무런 Degree나 세상적인 학위가 없는 사람의 말은 무슨 말을 하건, 무시하고, 배척하는 세상, 나사렛의 예수인가, 예루살렘의 예수인가를 따라 거부하거나 인정 하려는 사람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인 듯싶다. 나사렛 예수란 점에서 ‘천국은 감 추인 보화’(마13:44) 라 한 것은 아닐까?

나사렛 마을은 시골 벽촌이었다. 예수님은 시골 사람이셨다. 그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셨다. 거기서 그는 약 30년을 사셨다. J. C. 라일의 말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이 어디에 사느냐보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냐가 더 중요하다.” 사람이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됨됨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시골에서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겸손히 자신을 감추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자. 스스로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선전하는 것은 세상 사람의 모습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모습은 아니다.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고 감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실 때까지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자가 되자.

별 따라 꿈 따라 간 사람들도 순간적으로 보이지 않고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때 서 두르지 말고 다른 방법이 없을까? 기도하는 가운데 지혜롭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기록된 말씀 외에는 없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지 말고 평소에 말씀으로 무장해서 만왕의 왕 예수를 만나는 기적이 생활현장에 있어져야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유대인의 왕에 대해서 요한이 소개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그의 가난해지심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부요하신 분이셨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의 신성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영광과 부요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처럼 부자가 누구인가? 그러나 그는 자발적으로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셨다. 마리아는 그의 탯줄을 따뜻한 방이나 병원에서가 아니고, 아마 쌀쌀했을 구유에서 끊었다. 얼마 후 요셉은 가난한 자가 드리는 제물인 비둘기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그가 전도자로 나서셨을 때에도 그는 집을 갖지 않으셨다. 그가 때때로 시장하셨던 것을 보면 드실 음식이 늘 준비된 것 같지 않다. 마침내 그는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놓으셨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그의 낮아지심의 절정이었다.

그의 낮아지심과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큰 은혜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낮아지심과 가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과 부요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받은 구원과 부요함이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죽었던 영혼,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했던 우리 영혼이 부활과 영생을 얻었다.

참 소망이 없었던 우리가 부활과 영생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 하나님 자녀의 자격을 잃었던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되었고, 기도할 줄 몰랐던 우리가 기도하는 특권을 얻었다. 죄로 인해 허무하고 비천하고 무가치했던 우리, 벌레(시 22:6, 욥 25:6)와 같았던 우리가 천국의 기업을 상속받는 존귀한 자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자들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그에게 감사하자.

이응주 목사(재일한국선교사협의회(CCKJ) 회장 역임, TOGANE HOME CHURCH )

  E-mail : ungjoor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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