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으나 죽은 교회, 사데 성서의 땅 터키에서 온 편지
‘황금의 도시’라 불리운 사데(Sardis)는 그 별명처럼 화려하고 부유했던 도시였다. 지금은 비록 폐허가 되었지만 한 때 사데는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고, 페르시아 제국의 소아시아 지역 수도였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물질과 신앙은 공존하기 힘든 요소인 것 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도시들이 걸었던 전철을 사데도 동일하게 걷게 된다. 이번에는 사데를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고 돌이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사데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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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데 유적지가 보이는데, 유적지 뒤쪽으로 산 위에 그 당시 지어진 아크로폴리스가 있고 많은 유적지가 남아 있지만 산이 험준하여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이 유적지를 방문하고 돌아간다.
위치
‘남은 자’ 또는 ‘남은 물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남쪽으로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강가와 산기슭에 위치한다. 사데는 앞으로 팍톨루스(Pactolus)라는 이름의 강이 흐르고 있고, 뒤로는 투몰루스(Tumolus)라는 산이 자리하고 있다. 강과 산 사이의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사데의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 이 도시를 난공불락의 도시로 만들었다. 한때 사데는 리디아 왕국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역사
사데는 고대국가인 리디아(Lydia)의 수도였다. 현재 터키가 위치해 있는 곳을 예전부터 아나톨리아(Anatolia)라 불렀다. 아나톨리아란 ‘태양이 떠오르는 곳’ 즉 ‘동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BC 1900~1200년에는 앙카라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아나톨리아 최초의 통일 국가였던 히타이트(Hittites) 제국이 세워지면서 점차 번성하였다. 히타이트는 성경에서 헷족속으로 알려진 민족이며, 이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철기를 사용하였고 기마 전술에도 능했던 민족이다.
BC 1280년경에는 당시의 대제국이었던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와 세력을 다툴만큼 강대국을 이루었지만 BC 1200년대에 이르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히타이트 제국이 쇠퇴하게 된 이유는 유럽 해양 민족이었던 브리기아(Phrygia) 민족이 대거 아나톨리아로 침략하였기 때문이다. 히타이트 제국을 멸망시킨 이들은 BC 1000~800경 아나톨리아 반도의 주요 지역을 대부분 장악했으며, 브리기아라는 왕국을 세우고 앙카라에서 서쪽으로 94㎞ 떨어진 고르디온을 수도로 하여 번성하였다.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동부 지역에는 BC 900년경대에 우라르트(Urartus) 왕국이, BC 700년대에는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에 사데를 수도로 두고있던 리디아(Lydia) 왕국이 등장하였다.
BC 546년에는 성경에는 고레스라 불리는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Cyrus) 2세가 리디아를 침략한 후 에게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아나톨리아 반도가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로 아나톨리아는 세계 패권의 중심지로 부각되게 된다.
헤로도투스(Herodotus)는 리디아 왕국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였으며 ‘기게스의 반지’의 주인공인 기게스(Gyges)에게 어떻게 정권이 넘어가게 되었는지를 그의 저서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리디아 왕국 헤라클레스(Heracles) 왕조의 마지막 왕인 칸다우레스(Candaules)는 자기 아내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그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인 기게스에게 종종 자랑을 했었는데, 하루는 칸다우레스 왕이 기게스에게 자기 아내의 알몸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기게스는 왕의 아내, 즉 왕비의 알몸을 차마 볼수가 없어 극구 사양하지만 왕의 말을 언제까지나 사양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왕의 말대로 침실 은밀한 곳에 숨어 침실로 걸어 들어오는 왕비의 알몸을 보게된다. 그런데 기게스가 숨어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왕비는 이 사실을 모른채하고 있다가 다음 날 기게스를 왕 몰래 불러 하나의 제안을 하게 된다.
왕비의 벗은 몸을 보았으므로 왕인 칸다우레스를 죽이고 자기와 결혼하여 리디아의 왕이 되든지, 아니면 지금 죽을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한다. 왕을 죽이고 왕이 되려고 하다가 역모 죄로 죽임을 당하든, 아니면 왕비의 명령을 거역하여 지금 죽으나 매 한 가지이므로 기게스는 살아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왕을 죽이고 왕비와 결혼하여 리디아의 왕이 되기로 결정하여 실제로 칸다우레스 왕을 암살하고 왕비와 결혼하여 리디아의 새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리디아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켰고, 이에 신탁을 요청받은 델리의 아폴론 신전 사제들은 기게스를 왕으로 인정하면서 다만 헤라클레스의 저주를 받아 다섯 세대 후에 망할 것이라는 신탁의 예언을 전한다.
아르미스 신전터 |
크로이소스 왕이 신전을 세우기 전에는 키벨레 신전이 있었다. 키벨레 신은 소아시아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풍요의 여신으로, 아르테미스(아데미)와 같은 성격의 신이었다.
BC498년,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이오니아로 연행하던 길에 아테네 군대가 신전을 파괴했다. 그 후 334년 알렉산더의 명령으로 오늘날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같은 장소에 세워졌다. 그 이전의 키벨레 신전은 사라졌지만 정신은 남아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의 관습이나 성격은 아르테미스에게 물려졌다.
기게스가 세운 새로운 왕조는 150년간 계속되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이 시기가 사데의 가장 번성기였으며, BC 546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서 끝나게 된다. 역시 헤로도투스의 글을 보면 페르시아가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를 2주간의 전쟁 끝에 정복한 기록이 있다.
칸다우레스 왕을 죽이고 리디아의 왕이 된 기게스가 죽고, 정말 그 신탁처럼 기게스 왕조의 5대 왕인 크로이소스(Croesos)가 왕이 되어 편안히 지내고 있을 때 멸망을 하고 만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리디아를 침공하여 왔던 것이다.
사데는 해발 250미터 높은 산으로 깎아 놓은 듯한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난공불락의 도시였다. 그리고 이 도시로 들어갈 때는 좁은 입구를 통과하면 큰 분지와 넓은 평원으로 이루어지는 곳에 도시가 건설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인 조건 때문에 사데는 군사적으로 상당히 유리한 도시였다.
이러한 곳에 페르시아(바사)군이 14일간 포위하고 있어도 좁은 입구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런 조건 때문에 사데의 왕과 백성들은 사데는 철벽과도 같은 지형에 안심하며 싸우지 않았다. 입구에만 군인들을 매복시켜두고 별로 신경 쓰지 아니하고 있는 안도감이 그들을 해이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사데 지역의 언덕에서 무엇이 떨어졌다. 페르시아 병사가 그것을 살펴보니 성벽에서 경계 근무를 서던 사데 병사 한 명이 졸다가 쓰고 있던 투구가 절벽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사데 병사는 적을 의식하지 못하고 성벽 아래로 뚫어진 구멍으로 내려와서 투구를 가지고 올라갔는데, 그 모습을 고레스 왕은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리로 들어가면 사데를 점령할 수 있다고 판단한 고레스 왕은 그날 밤에 정예 병사들을 모아 취약점인 그 구멍으로 올려보내 성문을 열게한 후 난공불락의 성 사데를 점령했다.
너무 쉽게 리디아를 점령한 고레스 왕은 내친 김에 바벨론 성도 공격해 공성전을 벌일 준비를 하는데 바벨론 성의 내부 분열로 말미암아 사데 성과 마찬가지로 너무 손쉽게 점령을 하는데, 리디아와 바벨론을 어부지리로 얻으며 대제국을 건설하는데 기틀을 놓은 고레스 왕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바벨론 시절에 포로로 끌려와 있는 유다 백성을 본토로 돌려 보내는 고레스 칙령을 내린다.(스1:1~3)
그 이후로 사데는 페르시아 제국의 소아시아 지역 수도로 더욱 번성하게 되어지는데,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서 사데까지 2,703km 길이의 페르시아 ‘왕의 대로’(King’s Way)가 만들어 지면서, 이 도로를 이용해서 동서 무역과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후 BC 334년에는 그리스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에 이어 버가모(Pergamon) 왕국, 그리고 로마에 의해 차례대로 점령되었다. BC 17년에는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인해 도시가 파괴되었으나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의 원조로 재건되었지만 옛 영광의 모습과 도시의 중요성은 되찾지 못했다.
아르테미스신전터 |
특징
리디아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금화를 만들어 이웃 도시국가들에게로 보급했던 나라이다. 당시 리디아보다 문명이 앞서 있던 히타이트나 이집트에서도 동전을 만들어 사용하지는 않았는데, 리디아 왕국이 금과 은으로 만든 동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 동전에는 사데의 왕실 휘장이었던 사자 머리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에 리디아 마지막 왕이었던 크로에수스는 순수한 금과 은으로 동전 화폐를 만들어 전 세계에 보급하였고, 최소한 10톤의 황금을 쏟아부어 에베소에 호화로운 아르테미스(아데미) 신전을 건설하고 치장했는데 서양에서 '크로이소스만한 부자'라는 표현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사람에게 자주 비유되고 있다.
금화 주조에 사용되었던 금은 근처의 미다스 왕이 목욕했다는 팍톨루스(Pactolos) 강에서 사금을 채취하여 만든 것이다.
거기에 흐르는 팍톨루스 강에는 예로부터 사금이 많아 ‘미다스’(Midas, 영어로 마이다스) 신화의 배경이 되었던 곳인데, 실제로 가보면 거기에 미다스의 거대한 능(陵)이 있어 ‘트로이 전쟁 이야기’처럼 실제 역사와 신화와 역사가 겹치는 곳이 되었다. 또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던 곳도 바로 리디아 왕국이다.
리디아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주사위와 공기놀이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디아와 페르시아 제국의 소아시아 지역의 수도였던 사데도 ‘황금의 도시’라고 일컬어질만큼 상당히 부유했고, 항상 연회를 즐기며 미녀들과 오락, 그리고 쾌락이 지배했던 나라였다.
산업
사데는 과일과 양모 생산으로 유명하였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양모를 염색하여 옷을 만드는 일은 사데의 중요 산업이었다.
비잔틴 시대에 지어진 교회터 |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터에 남아있는 거대한 기둥 뒤로 비잔틴 시대에 지어진 자그마한 교회 건물이 보인다. 이 교회 건물은 원래는 유대인 회당으로 이용되었는데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교회로 사용했다. 사데 교회 교인들의 신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듯 하다.
사데 교회의 기원
사데 교회는 AD 1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다고 보는데, 그리스어로 된 메노로지온(Menologion)에 의하면, 바울의 제자이며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클레멘트(Clement)가 처음 사데 교회의 감독이었다고 한다. 초대 교회 박해시에 사데에서 순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 테라폰(Therapon)과 아폴로니우스(Apollonius)가 있다.
2세기경 사데 교회의 감독은 멜리톤(Meliton)인데, 그는 기독교 신앙을 대변하기 위해서 로마의 마라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많은 편지들을 써서 보낸 사람이며, 예루살렘을 처음으로 순례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멜리톤이 사데 교회의 감독이었을 때 교회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로 말미암아 내적인 타락과 세속화로 인해 형식주의와 나태함이 교회 깊숙이 침투하였다. 이로인해 사데 교회는 이 도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했다가 나중에는 점차 세속화되면서 쇠퇴했다고 한다.
325년에 니케아라는 도시에서 개최된 제1차 종교회의 때에는 사데 교회에서 아르테미도루스(Artemidorus) 감독이 참석하였다. 그후 게르만 계열인 고트(Goth)족이 침입하여 교회를 파괴하였다.
사데 유적지 입구의 석관 |
사데 유적지 입구 쪽 진입로에 방치되어 있는 석관이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석관이 입구에서 외로이 자리를 지키며 수백년의 세월동안 사데 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들을 상기시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고 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사데는 라오디게아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들은 헤로도토스의 증언대로 사데는 ‘황금의 도시’라는 별명처럼 부유했고, 사치스러웠고, 쾌락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들은 돈과 쾌락을 쫓는 일에 분주해서 내면 세계라든가 신앙을 돌아볼만한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러한 세상의 화려함과 부요함 가운데서 사데교회 성도들은 나태해져서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신앙은 서서히 그 자리를 잃어가게 되었다.
사데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은 바로 죽은 신앙에 대한 것이었다. 사데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죽게 한 근본적 원인은 돈을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에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늘 분주하고 화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자와 마찬가지라는 말씀이다.
많은 교회들이 세속화된 성도들과 성직자들 때문에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처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 생명의 길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 교회에 몇이나 있는지, 목회자부터 예수님처럼 성육신(Incarnation)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목회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 궁금하다.
성육신의 신앙이 없이 교회 건물은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고, 그 교회 내에서 화려한 프로그램과 복지 시설을 운영하며, ‘성도’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교제를 분주하게 하며 살고 있지만, 실상은 잘 꾸며진 추모공원 처럼 아무런 의미 없는 생명 없는 자들의 모임일 뿐이다. 이러한 교회와 성도는 절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다.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계3:3)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사데 성를 지키던 병사들이 성을 과신한 나머지 방비를 게을리하며 졸고 있다가 한 순간의 실수로 페르시아 병사들에게 점령 당한 것처럼, 한 순간의 나태함과 방심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진정한 일원인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가 속한 국가를 방비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자기가 속한 나라를 위해 중보하며, 애정 어린 관심을 가지고 그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필요하면 목숨걸고 싸워야 한다. 그래야 그 나라를 지킬수 있다.
한 나라의 운명은 그 나라에 속한 그리스도인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위해 중보하지 않고, 나태해져 졸고 있다면 그 나라의 운명은 경각에 달릴 수 밖에 없다.
요즘 대한민국의 상황은 실제로 좋지 않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많은 문제가 표출되고 있어 마치 살얼음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이다.
특히 작년에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전국민을 슬픔에 빠트렸다면, 올해는 ‘메르스’라는 신종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강타하며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는데 외국(터키)에서 한국 뉴스를 접할 때에는 국가비상사태에 준하는 상황으로 여겨질 정도다.
또한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면서 농심이 타 들어가고 있는 실정인데, 일각에서는 124년 만에 찾아오는 대 가뭄기에 접어들었다는 조심스런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교회와 성도들이 돈과 향략, 쾌락에 빠져 하나님의 눈으로 국가와 위정자들를 감시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중보하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보호하시는 손길을 거두시면 바로 대한민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많이 참으시지만 교회와 성도들이 그 삶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황금의 도시’ 사데와 같은 운명에 처해질 수도 있다.
성서의 땅 터키에서 온 편지
[성지선교회] 이스탄불에서 원제연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