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각가지 시험이라는 관문을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해 가고 있다. 시험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지만 학생들은 학교에서 치루는 시험이 있고.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서도 시험이 있다. 요즈음 청문회라는 제도가 있어서 국가 장관이나 고위 공직에 추천 받으면 국회청문회를 통과해야 한다. 이렇게 시험의 단계를 거처서 상급학교로 올라가고 승진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영적으로 악한 마귀(사단)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가셨다고 했다.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4:1)라고 했다. 여기서 예수님의 생애를 두고, 사생애(私生涯)와 공생애(共生涯)란 말로 구별해서 생각도 해본다. 3장에서 예수님은 사생활을 벗으시고 공생에 들어가셨다. 지금까지는 보편적인 사람들처럼, 가족들을 위해 살아오셨지만 세례를 받고 난 이후에는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가 살 수는 없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인으로서의 취임식을 갖고 난 후에도 사생활에 억매여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생애 시작을 위해 이제는 공인으로서의 연수가 필요했다.
마귀(Devil)란 사탄의 또 다른 이름으로(계 12:9), 성경에는 처음부터 범죄한 자로 나타난다(요일 3:8). 마귀의 성격에 대해서 예수님은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고 말씀하셨다. 마귀가 하와를 범죄케 하려고 사용한 최초의 전략도 거짓말이었다(창 3:1-5).
마귀는 40일 간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하여 그의 사역을 좌절시키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마 4:1-11; 막 1:13 ; 눅 4:2-13). 하지만 얼마 동안 떠나 있었던 마귀는(눅 4:13)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를 통해 기회를 잡았으며(요 6:70; 13:2) 마귀의 궤계는 또다시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말았다(히 2:14). 지금도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다(벧전 5:8).
마귀에 대항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마귀의 ‘거짓말’과 ‘속임수’ 전략에 맞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함으로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엡 4:25-27)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엡 6:11). 또한 바울의 기독교를 대적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 것을 소망 가운데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딤후 2:25-26).
마귀(사단)는 오늘도 교회를 부패시키고 속화시키고 택한 백성들을 미혹케 하려 한다.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현재 마귀와의 영적 전쟁 중에 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0-11),
1.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만왕의 왕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후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시험을 받으셔야 했다. 이 시험은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그곳에서 받는 시험이었다. 그리고 시험하는 자는 마귀였다. 예수님이 이 시험을 받으신 것은 앞으로 사역을 해 가실 때 닥치는 각종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는 연단의 기회였다. 동시에 이 시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한 시험이기도 했다.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 중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낙심하고, 시험에 빠져버릴 수도 있을 것이기에, 당신이 먼저 시험을 겪는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성도들의 삶의 지표가 되게 하신 뜻도 담겨있었을 것이다.
1) 그 첫 번째 시험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3가지였다. 그 첫째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다. 40일나 금식하고 주리신 예수에게 마귀가 제시한 시험이다. 이것은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있는 시험일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어떠한 경우(굶주린)가 닥친다 해도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본래 떡은 곡물로 만드는 것이지 돌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40일(Days)이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40이란 숫자는 의미는 중요한 일을 위한 "준비기간"을 의미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1)모세는 40일간 호렙산에서 금식하면서 율법을 전수 받았고,
(2)엘리야도 40일간 사막을 횡단하여 호렙산에 이르러 다음 일을 할 지시를 받았으며,
(3)이스라엘 정탐꾼들은 40일간 가나안 땅을 정탐했고,
(4)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을 받은 후에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있었다.
(5)그리고 예수님도 40일 동안 금식 하신 후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으며, (6)부활 후에도 40일간 세상에 계시다가 승천을 하셨다.
그리고 성경에서 40이란 숫자는
(1)"시험"(예수님의 시험),
(2)"연단"(40년 광야 생활), 때로는
(3)"심판"(노아 홍수)과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4)40이란 숫자는 완전수의 의미도 있지만, 주로 위와 같은 일과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돌로 떡을 만든다는 말은, 해서는 안 될 것일지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불법을 행해서라도) 떡(돈)을 만들려는 짓들이다. 우리는 부동산투기를 해서라도, 짝퉁제품을 만들어서라도 돈만 벌면 되고, 자녀들에게 불법 과외를 시켜서라도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 그래서 부자 되고 출세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해 왔다. 사실 이런 것은 돌로 떡을 만드는 행위 들이라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침례나 세례를 받은 자, 혹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 삶의 목표가 달라져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속사람들의 행위와 목표가 같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마 6:33)이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의 첫 째 되는 의무이다. 우리가 의무를 다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책임 질 의무를 갖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또 다른 이유는 그분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시는 본(本)이었다. 그래서 히브리서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흘(體恤/몸으로 근심을 겪은)하사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히4:15) 이리고 했다.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공인(하나님의 제사장/벧전2:9)이 되겠다는 고백의 표로 세례를 받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도리어 황당한 얘기가 되어버렸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로마교회가 시작되면서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2중구조가 도입되었다. 평신도는 하나님의 공인이란 의식이 상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제도를 ‘기독교대백과사전’에서는 사탄이 만든 제도란 말을 하고 있다.(참고: 제6권 275쪽)
첫 번째 시험이 받는 의미는 무엇인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란 것’이었다. 떡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초적인 양식이다. 이것이 없이는 사람이 존재할 수가 없다, 나도, 내 가족도, 내 부모도 생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무엇을 하더라도, 먹을 것부터 최소한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해도, 가족이 딸린 사람은 가족이 먹고 가족이 생존 할 수 있는 기초적 조건은 만들어 주고 난 후에 주의 일을 해야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다. 먹는 문제는 생명을 가지 모든 동식물을 비롯해서 중요한 삶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첫 번째 발목을 잡는 것이 바로 이런 문제(생활 문제)이다. 이것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업을 경영하는 계획을 세우면서 ‘이번 일만 잘 되면, 가족 먹을 것 챙겨주고 그때는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일도 돈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돈부터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될 세상일들에 붙잡혀 허송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 이러한 분들의 생각은 돌로 떵 덩이를 만든 다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돌로 떵 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은 불로소득과 같은 로또 복권 당첨금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 된다. 사탄은 40일 동 안 금식하신 예수에게 빵문제로 시험하였다. 누구든지 생명을 유지하기위한 기초적인 빵 문제는 중요한 것이다. 특히 배고픈 상태에 있을 때 유혹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위협받고 있을 때 사탄은 그 약점을 이용해서 시험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의 말대로 하지 않으신 큰 이유
육신의 양식 문제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떡이 없으면 죽지만 그것은 육신의 죽음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몸만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 모든 가치를 두고 사는 것 같다. 그들은 영적 생활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셨고(마 19:23-24), 또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하였다(딤전 6:10). 돈이 전부인 줄 아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없고 구원문제까지 의심받을 수 있다.
떡이 없으면 육신의 생명을 해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보다 중요한 요소는 그의 영혼이다. 영혼은 범죄 함으로 죽었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는다. 영혼의 새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는 영혼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그들의 영혼의 가치를 똑같이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영혼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육신의 양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2) 두 번째 시험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 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5-7)
‘성전 꼭대기’란 어떤 곳인가?
이것은 유대교일 수 있고, 지금은 교회당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시험은 종교적인 시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도 사탄의 무리는 똑같은 말을 했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개역한글 마 27:40),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개역한글 눅 23:37)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개역한글 막 15:30)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마 27:42)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 하실지라”(마 27:43)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된다. 교회를 부흥시키고, 교회당을 잘 짓고, 선교사도 많이 보내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아닌 짓을 해도 좋다는 것인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라’(6-) 이 말이 무슨 뜻인가? 당시 성전이란 거룩한 곳이다. ‘거룩한 곳에서 뛰어 내려라’ 이 말은 거룩의 본질을 버려라 하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가시적 성과만을 위해서 교회건, 혹은 선교이건, 거룩이 상실된 사역들을 얼마나 많이 해 왔는가?
거룩을 훼손시킨 사역은 사탄이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주여, 주여를 찾는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마 7:21)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동안 하나님의 거룩이야 어떠하든 목적만 성취하면 된다. 신학교의 난립은 교회의 난립이 되었고, 대형교회 만들기에 온갖 수단이 동원 된 결과는 비리를 만드는 공작소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마귀가 성경을 잘못 인용하고 잘못 적용할 때 성경의 다른 말씀에 의해 반박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또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경을 전체의 빛 아래서 읽어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딤후 3:16). 성경의 참 저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성경에는 통일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전체적 빛 아래서 부분들을 이해해야 하고 명확한 교훈의 빛 아래서 불명확한 문제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성경을 전체적으로 많이 읽어야 한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성경말씀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7-)는 말씀이다.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같이 주를 시험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고전 10:9).
또 기적을 추구하는 태도도 경계해야 한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성실히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배고플 때에 먹고 피곤할 때에 쉬고 돈이 필요할 때에 일해야 한다. 신앙생활은 신비적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고전 1:22-23),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이다. 기적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에 떨어지기 쉽다.
더욱이, 기적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적 교만과 자랑과 명예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매우 경계해야 할 악한 일이다. 기적을 행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하며 허풍과 과장이 심한 것 같다(벧후 2:18; 유 16).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교훈하신 성도의 바른 모습과 다르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적주의에 떨어져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며 자신을 감추고 은밀히 선한 일을 힘써야 한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만에 일으키리라’(요 2:19)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이 말씀을 이해 못한 교회 만들기에만 몰입한 결과는 교회 본질을 상실한 결과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험하는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똑같이 시험 했었다. ‘먹으면 네 눈이 밝아 질 것이요,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여기서
(1)사탄의 요구대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셨다면 어찌 되었을까?
(2)예수께서 만약 사탄의 무리들의 요구대로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셨다면 어찌되었을까?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은 기적을 베풀어 영광을 취하려고 오시지 안 했다. 그분은 수치와, 절망과, 헐벗음과, 목마르고 배고픔을 짊어지고 조롱을 당하시면서 죽기위해 오신분이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여러분들이 기막힌 능력을 통해서 영광을 누리고 있을 때 다른 한쪽에서는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 슬픈 눈물을 뿌리면서 죽어 가고 있다. 웅장한 예배당(성전?)을 짓고, 수많은 사람을 모으고, 권능을 행사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구조에서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소위 목회 성공이라 생각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으로 생각 할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복음의 본질을 떠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면 그것은 사탄이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일이라고 했다면 예수는 사탄의 요구대로 응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는 ‘영적 가치(價値)’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에 지금의 오염된 가치를 가지고는 왜 예수가 사탄의 요구를 거절했는가를 이해를 못할 것이다. 2천년 기독교역사가 잘못된 가치(價値)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면 이것을 당신은 믿겠는가? 하지만 많은 부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시인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탄에게 지지 말고 사탄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화려한 영광은 잠깐이요, 그 후엔 영원한 고통이 있는 것이다.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롬8:17)
3) 세 번째 시험,
‘이에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9-10)
경배(Worship)란 특정한 대상을 공경하여 예배하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어로는 ‘샤하’(shachah), 헬라어로는 ‘프로스퀴네오’(proskyneo)로 ‘머리를 숙이다’, ‘경외함으로 절하다’, ‘손에 입 맞추다’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나 거짓 신에 대한 숭배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창 24:26; 출 24:1; 신 4:19; 삼하 12:20; 마 4:9; 눅 24:52).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경배받으실 분(마 4:10)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자신도 친히 경배받으셨다(요 9:38). 반면 베드로는 자신에게 경배하는 고넬료를 말렸다(행 10:25 이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생의 목표를 땅에서 출세도 하고, 명예도 얻고, 부를 누리고자 하는 것에 둔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은 명예와 영광을 이 땅의 목표로 삼으라고 말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땅의 것을 포기하고 영원한 영광을 위해 살라고 하셨다. 바울은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살자고 권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들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 나사 자기를 나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이 밖에 어쩌면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땅의 영화나 명예를 위해 살라고 하신 말씀은 없다.
오히려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 땅에서는 양보하고, 희생하고, 베풀고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나눠 짊어지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예수의 사람들로서 땅에서의 삶의 가치라고 가르치신다.(산상수훈) 그런데 사탄의 유혹은 그 반대를 말한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너에게 주리니 너는 내게 경배하라’고 한다. ‘천하만국의 영광’이 무엇일까?
우리는 세상의 부귀 영광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교훈하였다(요일 2:15-17).
앞의 두 번째 시험은 교회를 통한 영광이 시험의 주제였다면 이번 세 번째 시험은 세상의 영광이다. 이것은 너무나 쉽고 간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탄에게 엎드리기만 하면(경배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만 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예수는 유대교 사람들에게 엎드리기만 했으면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시지 안 했다. 개혁 전 개혁자들이 당시기존 교회세력에 엎드리기만 했으면 화형을 당하지는 안 했다.
지금의 교회기반에 엎드리기만 했으면 망하지 안 했고, 외면이나 무시를 당하지도 안 했다. 예수가 기득권 세력에 머리만 숙였으면 호산나 찬송을 부르던 무리들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하고 돌변하지는 안 했다. 기존교회에 엎드리기만 했다면 제자라 했던 형제들이 선생을 버리지는 안 했다. 지금도 마귀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줄 터이니 엎드려 저에게 경배만 하라고 한다.
예수님 때 사탄은 유대교였고,(계2:9) 중세개혁의 때는 중세 가톨릭이었고, 지금은 하나님의 계시진행을 거부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 집단은 무엇이라 규정해야 할까?
사탄의 요구를 거절한 대가(代價)는 이 땅에서는 참혹한 것이지만, 이것이 예수가 가신길이기에 진리와 함께 기뻐하면서 이 길을 간다. 그때가 언제 일지 주의 권한에 있는 일이지만 시험이 끝나는 날 ‘마귀는 떠나고 천사가 나아와서 수종들’(11-)더라. 성도들은 그 날의 환상을 그리면서 오늘을 살아야 한다.
인생의 참 본분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마 22:37) 섬기고 그 계명과 교훈을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조건 아래서도 마귀와 세상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만 높이고 섬기고 영화롭게 하며 그의 명령을 힘써 따르자.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도우시고 지키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2 사역을 시작하신 만왕의 왕
‘예수께서 요한의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12-17)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역의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 동네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사셨다. 스블론과 납달리는 족속의 이름이고 이들이 배정받은 땅은 갈릴리 지역이다. 이 지역에 속한 가버나움은 요단강 건너 서쪽 약 8km 쯤 떨어진 곳이며 갈릴리호수 북쪽에 있는 성읍이다. 여기에 세관이 있고,(마9:13) 로마의 백부장이 주둔 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예수님은 여기서 첫 사역을 시작 했다.
(1)예수님은 이곳을 ‘당신의 마을’(본 동네로 번역)이라고 부르기도 했고,(마9:1)
(2)회당 부근엔 베드로의 집이 있었고,(마8:14,막1:29,눅4:38)
(3)중풍병자가 지붕을 뚫고 침상 채 내려와 고침 받은 집이 있는 곳,
(막2:1-3 이 집은 베드로나 안드레의 집이라는 설도 있다.)
(4)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쳐 주던 곳(마8:5-13, 눅7:1-10)
(5)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 주신 곳,(요4:46-54)
(6)회당장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렸던 곳(막5:41-42)
(7)세리 레위(마태)가 회개하고 예수의 제자가 된 곳(마9:9, 막2:14)
(8)마태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던 곳(마9:10)
(9)바닷가에 모인 군중들을 상대로 예수님은 배에 오르셔서 말씀을 가르치시던 곳(마13:2)
이렇게 많은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베풀고 했어도 회개하지 않는 이들을 두고, 심판이 소돔 고모라보다 견디기 어려울 거라고 하셨던 곳이 되기도 했다.(마11:20-24)
3 요한의 이야기
왜 예수는 요한이 잡히신 후에야 활동을 하시기 시작하셨을까? 이 부분을 쉽게 이해가 될까? 요한의 역할과 예수님의 역할은 다른 것이다. 연극무대를 두고 말하면 요한은 막이 오르기 전 관중에게, 인사를 하고, 막이 오르면 본 연극이 시작 될 것이라고 소개를 하고 무대 뒤로 살아진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요한의 소개가 끝나고 무대 뒤로 살아지면 본 연극의 막은 오르고 그때부터 주인공의 역할이 시작되는 것이다.
만약에 요한이 잡히지 않고, 마침내 순교의 제물이 되지 않고, 그가 여전히 사역하고 있을 때 예수님도 등장해서 사역을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사실 요한이 잡히기 전 잠간 동안이지만, 요한의 제자와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었다.(요3:26-27) 요한의 순교를 두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불신앙으로 변해서(우리가 기다리는 이가 당신입니까? 하는 질문을 두고), 하나님은 요한을 버리신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더러 있다.
과연 그런 것인가? 이런 해석은 전혀 잘못된 해서이라고 판단된다. 요한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면 예수님의 사역에 엄청난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역할이 끝났을 때 인간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의 상을 그에게 주고, 하나님은 그를 데려 가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가장 큰 상이 무엇일까? 순교의 상 보다 더 큰 상이 또 있을까? 그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짧게 하고 가셨다는 것처럼 하나님의 큰 축복은 없다.
오히려 사람이 오래 살다 보면 흠이 생길 수도 있는 법, 흠 없이 사역을 남기고 가셨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삶이었는가? 수명이 길고 짧은 것이 하나님의 저주요, 혹은 축복이란 판단은 세속적 사고에 불과 한 것이다. 속된 인간의 생각이 이리저리 지저분한 판단을 하는 것뿐이지, 어쩌면 오래 살면서 자기 생애에 때를 묻힌 것보다 더 저주는 없는 법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향기로 남아있을 때 퇴장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삶은 없다.
4. 스블론과 납달리를 먼저 선택한 이유
예수님은 왜 스블론 땅과 납달리 지역 가버나움에서부터 복음 활동을 시작했을까?
예수님의 동생들의 의견처럼, ‘당신이 행하는 일을 다른 사람(제자들) 들이 보게 유대로 가십시오, 스스로 나타내기를 바라면서 어찌 촌구석에서 숨어서 합니까, 당당히 자신을 세상에 들어내면서 하시지 그래요? (요7:3-6)
스블론과 납달리 지역은 최 북방, 산악지대이고, 서쪽으로는 지중해를 끼고 있는 지역으로 남쪽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의 땅이라 여기며 늘 소외시킨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곳을 두고 예언하기를 ‘스블론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15-16) 하고 예언 했던 곳이다.
흑암(Darkness)이란 빛이 결여되어 있거나 빛과 대립되는 것을 말한다. 흑암은 태초부터 있었던 것으로(창 1:2)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욥 23:17)이나 악의 세력(골 1:13) 등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같은 원어가 성경의 많은 곳에서 ‘어두움’으로도 번역되었다(욥 12:22; 잠 2:13).
사망(死亡, Death)이란 죽음을 말한다(출 12:30). 성경은 사망이 죄에 대한 대가라고 말하고 있다(롬 6:23상; 참고, 창 2:17). 바울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롬 5:12). 그러나 이처럼 사망이 죄인 된 사람들에게 왕노릇하였지만(롬 5:14)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왕노릇한다고 말하였다(롬 5:17-21).
복음의 생리는 낮은 곳, 흑암과 죽음의 그늘이 뒤 덮인 곳, 사람들에게 외면된 소외된 곳, 거기서부터 싹이 나는 법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은 갈릴리 지대에서 사마리아를 거치고, 마침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거기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 안드레, 마태 등이 가버나움에서 선택되었고, 대부분 갈릴리 해변의 사람들이 제자들이 되었다. 혹 설에 가룟 유다가 유일하게 유대 출신이란 말이 있다.
갈릴리 해변의 고기 잡는 어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셨다. 그들은 아버지와 배를 버려두고 예수의 부르심을 따랐다.(17-22) 늙은 아버지를 뒤로하고 예수를 따라 나선 이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 시대는 예수를 위해 이렇게 결단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1)나만 바라보고 있는 자식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2)내 아내가 나만 바라보고 사는데’
(3)아직 늙은 부모님이 있는데’ 그래도 이건 좀 이유가 타당한편,
(4)내가 이번 사업만 잘되면’
(5)내가 정년퇴직한 후에’
(6)이번에 마지막 딸만 시집보내고 나면’ 별아 별 이유가 예수의 부르심을 뒤로해 버리는 세상, 이게 21세기의 현실이다.
5.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3:2절 참고)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를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더라(마4:23-25)
천국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다. 왕이신 메시아께서 오셨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천국은 씨와 같이 뿌려지고 있고 누룩처럼 퍼지고 있다(마 13장). 예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28). 이 천국은 전도와 영혼 구원을 통해 계속 확장되고 성장된다. 그러나 영광의 천국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미래에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교회는 주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린다(계 22:20).
회개의 절박성은 특히 천국이 가까웠다는 데 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모든 죄인들은 회개하고 그를 영접하느냐, 아니면 회개치 않고 그를 거절하느냐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사람이 죄 가운데 살면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다. 죄를 회개해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다.
회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던 사람들, 곧 불경건하고 부도덕하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죽음이요 불행이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생명이요 행복이다. 회개는 죄인이 그 불경건과 부도덕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미워하고 그 죄로부터 돌이키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회개해야만 한다.
회당(Synagogue)이란 유대인들의 모임 장소를 말한다. 회당 제도는 포로 생활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없게 되면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유대인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회당이 세워졌다(행 13:5). 유대인들은 안식일 외에도 회당에 자주 모였는데 남녀가 따로 떨어져 앉았다.
회당의 주된 용도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예배는 남자 10명이 모여야 이루어졌다. 찬양으로 시작하여 기도를 드린 후 쉐마를 읽었다(신 6:4-9). 쉐마를 교독한 후 다시 기도문을 암송하며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하며 축도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절기 때에는 제사장들이 손을 들고 민수기 6:24-26로 축도함으로써 예배를 폐했다.
예수님은 여러 회당에 들어가셔서 예배도 드리시고 말씀을 전하셨으며(눅 4:15) 병도 고치시고 귀신도 쫓아내셨다(막 1:39). 특히 나사렛 회당에서는 이사야서를 통해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가르치셨지만 배척받으셨다(눅 4:16-30). 바울도 회당 예배에 참석하며 그곳에서 전도하였다(행 19:8). 회당은 율법 교육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눅 13:10) 법정의 용도로도 쓰였다(마 10:17; 23:34; 막 13:9).
귀신(Demon)은 악신, 악령, 사신, 사귀와 동일한 말로, 구약성경에는 ‘귀신’에 해당하는 특별한 용어가 없다. 그러나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귀신의 존재를 믿고, 귀신이 사람들에게 재난을 가져온다고 알고 있었기에,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악한 신(demon)에게 제물을 드렸으며(신 32:17; 삿 9:23; 삼상 19:9 참고) 때로 인신제사를 드리기도 했다(시 106:37). 하지만 이런 일들은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것들이었다(신 18:9-14). 신약에서 귀신(헬라어로 ‘daimonion’,‘daimon’)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여러 번 언급되었다. 귀신은 사람에게 들어가 정신을 이상하게 하거나(막 5:15) 심한 경련(눅 9:37-42)을 일으키고 벙어리(마 9:32)나 눈먼 벙어리(마 12:22)로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성경은 귀신을 사탄(바알세불)의 대리자, 앞잡이(마 12:24-30)라고 말한다. 귀신은 더러웠고(마 10:1) 사람으로 하여금 괴력을 발휘하게 만들었으며(눅 8:29), 많은 수의 귀신이 함께 거하기도 했다(막 5:8-9). 또한 사람을 지배하고(마 8:29) 사람을 초월하는 능력(행 19:13-16)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았고(막 1:24) 자신이 어떤 운명인지 알고 있었다(마 8:29). 때로 경배를 받기도 했고(고전 10:20)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다(딤전 4:1).
간질(Seizure)이란 중추 신경계의 이상으로 인해 생기며 갑자기 몸을 뒤틀거나 까무러치는 등의 증상을 보이는 병으로 이 질병에 대한 헬라어의 본래 의미는 ‘졸도 증세’란 뜻이다. 헬라인들은 이 병이 달의 형세에 영향받아 생긴다고 믿었는데, 성경에서는 이 병의 원인 중의 하나로 귀신을 들고 있다(마 17:15, 18). 예수님은 이런 간질병 환자들을 고쳐 주셨다(마 4:24; 17:14-20; 막 9:14-29; 눅 9:37- 43).
바울은 자신의 몸에 육체의 가시를 지녔다고 했다(고후 12:7). 그리고 육체의 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성경 여러 곳을 통해 알 수 있다(고전 2:3; 고후 12:7; 갈 4:13).
바울이 지녔던 ‘육체의 가시’에 대해 학자들은 간질, 두통, 안질, 말라리아 등 여러 가지로 추측한다. 간질이었다는 것은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갈 4:14),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고후 10:10)에 의거한 견해이다.
중풍병자(Paralytic)는 뇌일혈로 인해 발병한 중풍병을 앓는 사람을 말한다. 중풍병은 고혈압이나 동맥경화로 뇌동맥이 파손되어 일어난 출혈이 원인이 되어 발병하고 전신이나 반신, 또는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는 병이다.
성경에는 중풍병자들이 거동이 어려워 누워지낸 것이 기록되어 있다(마 8:6; 9:2; 막 2:4; 눅 5:18; 행 9:33). 또 누워지내던 중풍병자들이 예수님의 권세있는 말이 선포되자 즉각적으로 나은 것(마 8:13; 막 2:11-12; 눅 5:25)과 일어나 자신이 누웠던 침상을 들고 갈 정도로 회복된 것(마 9:6; 막 2:12; 눅 5:25)도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친 기적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 즉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마 9:6; 막 2:10; 눅 5:24).
지붕 뚫은 중풍병자 이야기
지붕에서 내려진 중풍병자를 보신 예수님은, 옆에서 고통 받는 한 사람의 치유를 위해 찾아온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고 선언하셨다. 이 죄 용서의 선언은 한 인간의 육체적 고통과 죄악을 향한 자유와 해방의 선포였다. 한편 죄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던 서기관들은, 죄사함 선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처사(레 24:11)라며 분노했다(막 2:6-7).
그 당시 죄 용서를 선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았거나 불경죄를 짓는 것 중의 하나였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을 가지셨음을 명백하게 드러내셨고(막 2:10), 치유의 능력도 가지신 분임을 확실하게 증명하셨다(막 2:11).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병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은, 파레스타인 전 지역에서 심지어 수리아(아람)까지 들려, 병든 자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와 고침을 받았다. 각종 병을 고쳤다는 의미를 꼭 육체의 병만 고쳤다고만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까지는 병들고, 귀신들리고, 보지 못하고, 걷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사람들이 항상 예수님 곁에는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1)복음의 근원이 되신 예수님이 나사렛 예수요,
(2)사역의 출발지가 가버나움이요,
(3)그분 곁에 있는 친구들이 각종 병에 걸린 자들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교회 안의 병자와 가난한 자와 어려운 일 당한 자를 돌아보는 일을 해야 한다. 비록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병 고치는 능력은 없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가지셨던 사랑과 긍휼의 심정으로 병자나 가난한 자나 어려운 일 당한 자를 돌아보아야 한다. 오늘날도 교회는 이 세 가지 기능을 잘 수행해야 하고 우리는 이 일들을 위해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