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지금도 개그맨들이 곧잘 흉내내는 이 느끼한 대사의 오리지널 저작권(?)은 배우 허장강에게 있다.
걸쭉한 톤에 스타카토로 끊으면서 콧소리를 약간 섞어 내는 독특한 목소리, 그 주인공인 허장강은 개성파 배우 허준호의 부친이다.
최근에는 김지운 감독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만들면서 특히 극중 송강호 연기는 이만희 감독의 1971년작 <쇠사슬을 끊어라>에 출연한 허장강 연기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밝혀 화제가 됐다. <쇠사슬을 끊어라>에서 허장강이 오토바이를 타고 뚝섬 한가운데를 질주하는 장면이 그대로 사막을 가로질러 도망가는 송강호의 오토바이 액션으로 바뀐 것이다.
배우 허장강은 한국영화계가 자랑해도 좋을, 빛나는 보석이다.
허장강은 극단 활동을 하고 있던 도중 이강천 감독의 데뷔작 <아리랑>에서 원하던 배우가 캐스팅이 되지 않자 ‘꿩 대신 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 데뷔를 했다.
1923년 서울 뚝섬에서 태어난 허장강(본명 허장현)은 교육자가 되거나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며 자라난 개구쟁이였다. 집안사정으로 대학을 포기해야 했던 그는 대신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향해 나아갔다.
자신이 극단을 조직, 여관집 창고를 임시 무대로 첫 작품을 올렸으나 별 성과없이 끝났고 태평양악극단에 가입해 비로소 본격적인 무대활동을 할 수 있었다. 무대극 <계월향>에서 명기 계월향은 괴롭히는 일본 대장 소서행장 역을 맡아 인정을 받았는데, ‘긴 강’이라는 뜻의 장강이라는 예명도 <계월향>의 연출가 서항석이 ‘성수동 뚝섬의 물이 마를소냐, 기나긴 강물처럼 부디 오래오래 살아 대성하라‘는 뜻을 담아 지어준 것이다.
영화 데뷔작 <아리랑>으로 호평을 받은 후 허장강은 무조건 이강천 감독의 다음 작품 <피아골>에 출연 의사를 밝혔다. 이감독은 그에게 영화에 등장하는 빨치산 가운데 가장 욕을 많이 먹은 만수역을 맡겼다. 같은 여성빨치산을 겁탈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짐승만도 못한 놈’이었다. 영화가 성공하자 허장강은 일약 대중들의 카타르시스 대상이 됐다. 대놓고 욕할 상대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욕을 해도 허장강은 싱글벙글했다. 비로소 자신의 연기에 사람들이 반응을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허장강의 악역 행진은 이후 거침없이 이어졌다. 여자를 협박해 돈을 갈취하는 건달, 피도 눈물도 없는 노랭이, 사기꾼, 잔인무도한 일본군 등등.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나쁜 일본인’ 역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같은 시기에 악역 전담배우로 활동한 이예춘과 허장강의 다른 점이 있다면 이예춘은 오로지 악역만 한 것에 비해 허장강은 다양한 연기를 했다는 것이다. 허장강은 초기 악한의 대명사에서 코미디로 그리고 토속적이거나 서민적인 연기로 21년간 거의 1천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했다.
이예춘이 외모에서부터 도저히 접근이 불가한 섬뜩하고 강한 기운이 흘러넘치는 데 비해 허장강은 긴장된 근육을 풀고 웃음을 머금으면 곧 친근한 서민으로 돌변하는 매력이 있었다.
유난히 코가 길어 ‘코장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던 허장강은 영화 속 이미지와는 달리 자기관리가 철저한 ‘프로페셔널’이었다.
한국영화의 황금시절이라 일컬어지던 60년대에는 수십편의 영화가 동시에 촬영돼서 인기배우들은 5~6편에 겹치기 출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다보니 인기 배우들이 촬영 펑크를 내는 일이 잦아 제작부장들은 배우를 모시러 다니는 것이 중요 임무가 됐다. 하지만 허장강은 그렇지 않았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앞의 영화 촬영이 늦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시간에 맞춰 촬영장에 나와있곤 했다.
일단 촬영을 시작하면 허장강은 군말없이 연기에 몰두했고 자신이 출연한 영화는 성우 녹음을 시키지 않고 반드시 자신이 녹음을 했다. 당시는 후시녹음이던 시절이어서 배우는 촬영 때 옆에서 불러주는 대사를 그대로 따라하며 연기를 한 후, 촬영된 필름을 보고 성우들이 나중에 녹음을 했다. 허장강은 성우들이 하는 후시녹음을 자기가 직접 한 것이다. 그러자니 다른 배우보다 두 배로 바빴지만 결코 스케줄 펑크를 내지 않았다. 참의미에서 프로였던 것이다. 당시 후시녹음을 반드시 자기 목소리로 했던 배우는 허장강과 김승호 두 사람뿐이었다.
그런가하면 자기가 욕심내던 배역을 맡게 되면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여사장 과 노신사> 촬영 때는 선배연기자 김승호와 의견이 맞지 않자 세 시간 동안의 격론 벌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당대의 으뜸인 연기자 김승호는 평소 “내가 무서워하는 녀석은 딱 하나, 허장강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연기 면에서 허장강을 맞수로 여겼다.
촬영현장의 휴식시간에도 허장강의 인기는 으뜸이었다. 괴상한 곱사춤을 춰 동료들을 웃겨 놓고는 “이봐 웃긴 값 500원 내놔”라고 해서 한동안 별명이 500원이기도 했다.
당시 그와 함께 영화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허장강을 ‘연기자 이전에 의리와 정의를 중하게 여기는 사나이 중 사나이’라고 기억했다. 그의 생활철학은 ‘마누라 다음은 친구’였다.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도 집에 홈바를 만들어 영화 동료들을 초대해 흥을 돋워주는가 하면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반드시 분장용 화장품을 사다가 동료나 선배에게 선물을 했다. 당시만 해도 국산 분장용품이 나오지 않을 때였다.
영화 속에서 거친 모습과는 달리 남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고 큰소리도 내지 않았다. 영화계에서는 허장강에 대해 초창기 배우 이금룡에 버금가는 인격을 갖춘 배우라고 표현했다.
허장강은 당대의 베스트드레서이기도 했다. 176센티미터의 훤칠한 키, 길쭉한 얼굴에 긴 코, 누에고치를 검게 물들여 붙여놓은 듯한 눈썹 등 한눈에 확 띄는 외모에 머리는 포마드를 발라 올백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다. 옷에서부터 구두까지 색깔을 맞춰 입고 다녔고 특히 빨간 넥타이를 즐겨 맸다.
허장강은 늘 “내 팔자에 딴다라 해서 이만하면 됐지 또 뭘 바라겠어“라고 자신의 삶에 대해 자족하며 별다른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가 욕심을 낸 것이 있다면 딱 한 가지, 연기 욕심뿐이었다. 허장강은 ”연기는 오십부터“라며 평생을 연기할 각오로 충만해 있었다.
하지만 하늘도 그를 욕심냈다.
허장강은 나이 오십을 겨우 두 해 넘기고 저세상으로 갔다. 허장강은 1975년 10월 16일 연례행사로 벌어진 새마을돕기 연예인축구대회 OB팀으로 참가했다가 후반전 시작 십분 만에 쓰러졌다. 심장마비였다.
그날 아침 축구시합을 한다며 들떠 있는 허장강은 부인 김옥심 여사와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1967년 결혼한 부인 김옥심 여사와는 유난히 금슬이 좋았다. 집을 나서기 전 허장강은 축구 하면 발이 아플 것이라며 부인의 양말을 달래서 신고 나갔다. 알 수 없는 ‘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쓰러진 이틀 후 허장강은 아까운 삶을 마감했고 동료들의 오열 속에 떠나갔다.
슬하의 3남2녀 가운데 허기호 허준호 형제가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는데 특히 허준호는 나이가 들수록 부친의 모습을 꼭 닮아가고 있다.
연전에 한 인터뷰에서 허준호는 “워낙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버지로서 좋은 분이셨고 배우로서도 준비된 분이셨다”며 “꼬마인 절 서재로 데리고 가 대본 연습을 시키셨다”고 말했다.
허준호는 작년에 TV 드라마 <주몽>에서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최근 김유진 감독의 사극영화 <신기전>에 출연하는 등 연기자로서 선친의 뒤를 잇고 있다. 허준호는 또 작년에 선친의 예명을 딴 장강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 주로 뮤지컬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는 허준호가 한국영화사에 굵은 획을 그은 배우 허장강의 ‘출어람’이 되기를 기대한다.
“평생 연기밖에 모르는 분이었지. 돌아가신 날도 그랬어. 축구대회에 나오셨는데, 아침을 안 드셨다기에, 내가 우유랑 카스테라를 사드렸어. 전날엔가 밤샘 촬영을 하셨다고 해서 뛰다가 몸이 조금이라도 안 좋으시면 손을 드십시오, 했지. 교체해드리겠다고. 그때 연예인들이 축구를 한다니까 서울운동장에 관중이 한 2만명 모였어. 그런데 형님이 경기장에 들어가시더니 계속 헛발질을 하시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그때부터 이미 심장이 멈추기 시작한 거지. 그런데도 그 많은 관중은 그게 허장강의 코미디 연기라고 생각하고 폭소를 터트렸다고. 박수까지 쳐가면서 말이야. 몸이 식어가는 순간에도 대중의 환호를 받은 분은 형님밖에 없을 거라고. 그게 마지막 연기였던 셈인데, 그래서 슬퍼.”“숨을 거둘 때까지 여전히 배우였다”는 동료배우 이해룡씨의 회고는 “천의 얼굴이라 불렸던” 허장강에 대한 당시 대중의 아이러니한 애정을 생생히 일러준다. 1975년 9월21일, 축구대회 도중 호흡장애를 일으켜 52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허장강은 주연보다는 조연으로, 선인보다는 악인으로 더 빈번하게 스크린에 등장했다. 그러나 ‘코주부 허장강’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언제나 남달랐고 특별했다. 혹시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한번 할까”를 아시는지. 그가 스크린에 던진 대사는 언제나 회자되는 유행어가 됐다. 악역을 도맡았던 그가 스크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을 때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극장에 모여든 관객이 일제히 기립해 환호했다는 기억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다.
악극에서 10년, <아리랑>으로 영화계 입문
중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틈만 나면 아이들을 불러모아 신파극 놀음을 하곤 했던” 허장강은 처음부터 배우로서의 끼를 발휘하진 못했다고 한다. 8·15 해방과 함께 성년이 된 그는 국도극장의 성보가극단에 입단 시험을 치렀으나 떨어졌고, 하나(化)가극단에 연구생으로 들어갔으나 도중하차했다. 이후 증권회사의 외무사원으로 생계를 잇던 그는 극단 백마산을 조직해서 <황토를 찾는 사나이>를 무대에 올렸지만, 흥행에서 다시 쓴맛을 봤다. 악극인 박구를 따라 반도가극단에 연습생으로 입단하면서 “본격적으로 연예 생활을 시작한” 그는 “노숙과 기식을 하면서도” 악극을 놓지 않았고, 악극 <계월향>에서 소서행장 역을 맡아 첫 무대에 선다.
10년 가깝게 악극배우였던 허장강을 은막으로 끌어들인 이는 이강천 감독이다. 정극 출신이 아니더라도 구분하지 않고 “악극 계통의 연기자들을 적극적으로 데뷔시킨” 이강천 감독의 <아리랑>(1954)에서 영진 역할로 나왔던 허장강은 이듬해 <피아골>(1955)에서 성적 욕망과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동지를 능욕하고 급기야 살인을 저지르는 빨치산 역을 맡아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포연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한국전쟁 직후. 갈기머리를 한 채 개머리판을 들어 동료를 내리치고, 눈을 헤뒤집고선 실실 흘리는 그의 광기의 웃음을 카메라는 오래 비추지 않지만 섬뜩하다. 이후 <눈 내리는 밤>(1958)의 아편쟁이를 비롯해 <죄없는 청춘>(1960) 등에서 악역을 도맡은 그는 1960년대 들어서기 전까지 ‘악의 상징’으로 남는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된 이미지를 벗겨내기란, 또 그것이 선연하고 또렷할수록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양주남 감독의 <종각>(1958)에서 허장강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려는 전설적인 장인 석숭으로 나오지만, 관객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런 그가 “특유의 애교를 발휘하며” 대중에게 한 걸음 다가서기 시작한 건 1961년, 이형표 감독의 <서울의 지붕밑>과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등에서 코믹한 역할을 맡게 되면서부터다. <서울의 지붕밑>에서 젊은 여인네의 속살을 훔쳐보거나 꼼수로 친구를 골탕먹이는 데 재미들린 인도철학 관상쟁이 박 주사로 나오는 그는 간살맞은 표정과 묘한 콧소리가 일품이다. 신상옥 감독 또한 “방자와 향단으로 나온 허장강, 도금봉이 춘향과 이 도령 역할을 맡았던 김진규, 최은희와 앙상블을 이뤘기 때문에 흥행에 성공했다는 훗날의 평가는 헛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그의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들은 이번 회고전의 상영작 중 한편인 김승옥 감독의 <감자>(1968)에서도 엿볼 수 있다. 복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뒤 생계는 뒷전이고 잠만 자는 베짱이 남편으로 나오는 그는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한심한 인물이지만, “젠장”을 반복 후렴구 삼아 태평가를 부르는 그의 표정은 여간 매력있는 게 아니다.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1971)의 허달간 또한 마찬가지다. 일제시대 밀정 노릇을 하며 조선 사람을 괴롭히고 미색에 빠져 있는 인물이지만, 그에게 쉽사리 돌을 던지기란 쉽지 않다. 호피옷 입고 빨간 스카프 날리며 만주 벌판을 헤집는 허달간에게선 반영웅의 향취까지는 아니라도 좀처럼 거부할 수 없는 자력이 있다.
“커다란 키에 길쭉한 얼굴, 그 긴 얼굴에 어울리게 길고 큰 코, 짙고 두꺼운 눈썹, 봉싯한 입술 모습, 조금씩 비정상인 것 같은 이목구비가 묘한 균형을 이루며 특이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영화> 1975년 10월호) 한 부음 기사의 첫머리에 그의 외모에 대한 평가가 등장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영화평론가 김종원은 “그에게 주어진 캐릭터들은 철저하게 비주류였다. 하지만 독특한 외모를 더해 그는 항상 기대 이상의 인물을 만들어냈다. 다른 악극단 출신 배우들과 달리 그는 오버 연기를 하더라도 진짜처럼 보였다. 그게 그의 힘이었다. 한국 영화계의 한계 때문에 다양한 역할을 맡진 못했지만, 깊이만큼은 누구한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정진우 감독도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다른 배우들과 달리 그는 감독이 잡아주지 않아도 제 캐릭터를 찾아가는 몇 안 되는 배우였다”고 덧붙인다.
이같은 후한 평가가 가능했던 건 아마도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수염 붙이는 스프리껌이라는 게 있는데 아버지는 좋은 제품 구하러 일본에 직접 다녀오시기도 했고, 내가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면 아버지는 어린 저를 데리고 대본 연습을 했어요.” 아들 허준호의 유년 시절 기억을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그의 열정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고응호 감독은 “하루에도 몇번씩 촬영장을 오가던 가께모찌가 성행했지만, 그는 촬영시간에 늦지도 않았고, 부족한 잠을 때우는 게 보통이었는데도 언제나 스탠바이해야 한다며 촬영 1시간 전 대기 원칙을 스스로 만들어 지켰다”고 말한다. 당시에는 후시녹음 때 성우가 출연배우의 대사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어디 가십니까”라는 간단한 대사조차 허장강은 본인이 직접 해야 직성이 풀렸다고 한다.
허장강의 출연작들을 보면, 직접 설정한 듯한 디테일한 연기들이 눈에 띄는데, 숨은 그림 찾기 하는 재미가 있다. 손님들 눈치를 슬쩍 보고서는 금세 맥주병 받쳐 들고 꼿꼿하게 걸어가는 바텐더(<명동잔혹사>(1975)나 미리 준비해둔 손수건으로 과부의 눈물을 슬쩍 훔쳐주는 박 주사(<서울의 지붕밑)는 배우 스스로 계산하고 연습한 설정이 아니었다면 자연스러운 전달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분례기> 때 허장강 선생님이 연기를 그렇게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자갈치시장을 간다고 그러면, 거기서 한 사람 한 사람 인물을 놓치지 말라고 그러셨어요. 네가 당장 그 역할을 안 하더라도 항상 머리에 담아두라고, 항상 신경 쓰라고 했어요”라는 윤정희의 회고는 그의 열정을 증명하는 증언이다.
굳이 거칠게 분류하면, 허장강은 <메밀꽃 필 무렵>(1967)을 기점으로 “본격 연기에 뛰어든다”. 이번 상영작 중 몰랐던 허장강의 새로운 면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이성구 감독의 <지하실의 7인>(1969)이나 이만희 감독의 <영시>(1971)일 것이다. 이들 작품에서 허장강의 주특기인 너스레를 찾아볼 순 없다. 대신 그는 극한 상황에서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인물로 나온다. <만선>(1963)에서 허장강에게 진지한 역할을 맡긴 적 있던 김수용 감독은 “자신에게 씌어진 고정 이미지 때문에 몹시 힘들어했다. 개런티를 싸게 받더라도 어떻게든 다른 걸 해보려고 했다”면서 “<굴비>(1967) 촬영 때 김승호와 함께 출연했는데 어떻게든 차별점을 내보이려고 애쓰더라니까”라고 전한다.
“내 팔자에 딴따라해서 이만하면 됐지 뭘 또 바라겠어.” 허장강은 어쩌면 한국영화의 틈에서 피어난 생명력 강한 잡초인지도 모른다. 김수용 감독은 “정확하게 말하면 허장강은 자신의 노선을 선택할 기회가 없었지. 그 얼굴로 멜로배우를 할 수 있었겠어? 장동휘, 황해처럼 본격 액션배우로 남지도 못했고. 또 김승호나 김진규처럼 정통파 배우로서 자신을 드러내지도 못했다고. 하지만 그 틈에서 허장강은 누구 것도 아닌 제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싶어.” 14편의 영화만으로 배우 허장강에 대한 허기가 달래지지 않는다면, 아들인 허기호씨를 비롯해 이형표, 구봉서, 이석기, 김종원, 조영정 등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과 후학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심포지엄까지 챙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