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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산상수훈 첫 번째(1)

(마태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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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나라 임금들이나 왕들이나 정치인들이 자기 나라 국민들이 다 복을 받고 살기를 위해서 정책을 세우고 발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 나라에 속해있으면서 영원한 나라의 백성들이 함께 살고 있는 지구촌에서 2중 구조에서 복을 받아 삶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그 방법 중에 하나는 왕의 다스림을 잘 받아야 하고 순종하면서 따라야 한다.

 

예수는 공생애 시작해서 얼마 되지 않아서 몇 사람 선택하시고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신약 백성들이 지켜야 할 새로운 법을 선포했다. 그것이 소위 말한 산상수훈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5장으로부터 7장까지의 기록이다. 대한민국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대한민국의 기본법을 따라 살아야 하듯, 하나님의 백성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법이 있다. 구약백성들에게 율법이 있었던 것처럼 신약백성들이 땅에서 사는 동안 삶의 기본법으로 지켜야할 시민법(市民法)이 산상수훈에 담고 있다.

 

예수께서 제시한 신약백성이 지켜야 할 시민법(市民法)이라 할 수 있는 산상수훈은 신약백성들의 삶속에서 지켜지지 않는 법이 되어왔다. 그래서 일부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실상 사 문법(死文法)이 되어 있다. 이것은 법을 지키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포기한 것을 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지상 나라에서도 나라의 법을 지키지 않을 때는 법으로 그 책임을 묻는 것이며, 그도 듣지 않을 때는 백성에게 부여했던 시민(국민)의 권리를 박탈하는 경우도 있다.

 

백성의 권리는 백성에게 부여된 법을 지켰을 때 보호와 백성의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백성에게는 율법이란 것이 있어서 그 백성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선민(選民)의 자격이 박탈되기도 했다. 그와 같이 법은 백성이 보호받는 장치가 됨과 동시에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도 동시에 갖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 신약시대 백성들의 현실이다.

우리는 성경, 혹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고 교회에서 가르치고,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분명히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반포하신 신약백성의 법인데, 현실에서는 전혀 무시되어있고, 관심조차 없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 문법(死文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지상에 오심과 신약백성을 위한 신약백성의 법을 반포하신 것은 아이들의 말로 작난 삼아 반포한 법이 아니다. 절대로 지켜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왜 현실에서는 지켜지지 않는 걸까? 왜 그럴까? 이 문제는 예수가 오신 목적에서부터 검토되어야 이해될 수 있는 문제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가 지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그것을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구원)이라고만 배워왔다.

 

지금 말하고 있는 시민법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의 세계에 들어갈 자들에게 주어진 법이라는 것은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현실세계에서는 지키지 못할 법을 예수님은 왜 선포하셨을까?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단순히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 다는 교리신앙에서만 머물러 있어 우리의 관심 밖의 문제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는 신중하게 검토하고 챙겨야 한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법이 중요한 것인가? 예수가 지상에 오신 것은 죄 사함, 구원, 이런 문제보다 훨씬 더 심오한 목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것은 인간들의 제한된 지식이 예수오심에 대한 목적이 제한받아 왔기 때문에 무려 2천년 동안이나 외면된 법이 되어 왔다는 것이다.

 

사실 죄 문제, 구원 문제 등은 영적문제에 관한 것으로 현실세계와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산상수훈의 신약백성의 법은 현실세계 속에서 적용되는 법이란 점에서 단순한 종교영역만의 Paradigm이 아니다. 예수가 인간세계에 제시한 제3의 질서는 창조주로서의 제안이고, 세속정부나 종교집단이 할 수없는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하는 새 질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현존하는 조직에 대한 문제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구상에서 인간의 존재가 시작 되면서 인간들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 두 조직이 있는데 그 하나가 정부(국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政,宗관계를 통해서 행복의 방향과 백성들의 안위를 보장하려고 외적면과 내적면을 위해서 서로가 노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정부는 인간의 외적 세계를 법이란 걸 통해서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함으로 질서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이고, 종교란 인간의 내면세계를 도덕을 기본으로 사람의 마음에 호소함으로 인간 스스로 선을 행하게 해서 인간다운 삶으로 유도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두 조직이 본래의 목적대로 그 역할을 다 못하고 있으면서 도리어 악한 군주가 나오면 백성들은 속수무책 억압과 희생을 강요당해야만 했고, 종교가 부패하면 민중은 신(神)의 이름으로 터 문이 없이 착취를 당해왔다. 이것이 인류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반복 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러한 현장(現場)에 예수가 오신 것이다.

 

예수가 오셔서 제3의 질서를 제시하고, 제3의 질서실현을 위해서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부터 제시하게 된 것이다.

그 첫째가 종교형태를 두고는 ‘성전을 헐라’ 해서 지금까지의 종교형식은 헐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상대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형식을 제시했다. 이 말을 이해를 하지 못 한다면? 더 쉽게 설명 할 수 있다면, 종교형식은 없애고, 종교형식 대신에 나라형식으로 바꾸라고 하신 말씀이라고 깨달아야만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나라형식을 말하니까, 세속나라로 오해를 해서 로마 가이사(황제)를 반역했다고 고발해서 예수를 죽인 것이다. 그런데 그때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예수는 나라형식을 주장했는데, 그 형식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요18:36)라고 빌라도와의 대화에서 언급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죽으면서도, 부활해서 승천하시기 직전에서도(행1:3) 변함없이 강조하고 가르치시고 요구하신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공생애 동안 주장하신 말씀이다.

 

‘그 나라를 먼저 구하라’(마 6:33) ‘나라가 임하기 위해 기도하라’(마 6:10)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복음서에서만 무려 100번이 넘게 나라에 대한 내용을 강조하신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단 한번이라도 ‘교회를 설립 하라.’ ‘내 교회를 세워라’ 하신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다는 걸 주목해야 한다. 교회란 말이 보편화 된 것은 사도들에게 와서였다. 왜 이 말이 보편화 되었을까?

 

이것은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하고 다닌 지역들이 모두가 로마 식민지 지대들이었다. 그 지대들을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자’ ‘그 나라를 건설하자’ 할 수 있었겠는가? 불과 얼마 전 자기들의 선생이 ‘나라’란 말을 섰다가 십자가 처형을 당해서 아직 피비린내도 채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나라란 말을 쓰지 못하니까 할 수 없이 쓴 명칭이 교회란 말을 쓴 것뿐이다.

 

이것을 로마카톨릭 교회로 불리어지면서 사원을 짓고 종교의식을 갖추면서 기독교란 종교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십자가로 헐어버린 종교형식을 다시 복원시켜놓고 거기서 주여, 주여를 찾게 되었는데 속된 말로 예수는 개죽음 당하신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사실 산상수훈은 종교시스템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 법이 되어 2천년동안 외면되어 온 것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요 18:36)는 세속 나라도 아니고, 종교시스템도 아니기 때문에 제3의 질서란 말을 한 것이고, 제3의형식이 되어야 ‘산상수훈’이 비로소 신약백성들의 법으로 효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예수가 제시한 제3의 질서는 실종이 되고, 새 질서의 법으로 제시된 산상수훈은 사실상 사문법(死文法)이 되어버린 것은 종교시스템이 지배해 온 탓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왕의 자리에서 축출되어 종교의 신(神)으로 격하되어 당신 앞에 나아와 복을 비는 자들의 기도나 들어주는 그런 하나님이 되었다고 하면, 이해를 할 수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지금의 교회시스템은 ‘헐어버려라’ 했던 구약종교시스템에 겉옷만 바꾸어 입히고 있으면서 실상은 예수를 믿는 것은 알맹이라는 것을 빼버리고 예수를 신(神)으로 섬기는 종교형태를 다시 만들어 2천년의 기독교전통을 유지시켜 온 것이라고 지적한다면 틀린 말이라고 생각되어지는지?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기독교라는 종교형태 속에서만 신앙지식을 배워 왔기 때문에 예수가 제시한 제3의 질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관심을 갖지 못했고, 어쩌다 언급이 되어도 이해를 하려는 노력보다는 무조건 이단이론(異端理論)으로 규정해서, 처음부터 봉쇄를 해 버린 탓에 예수가 제시한 제3의 질서이론은 지금껏 빛을 보지 못한 주제가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대로의 기독교는 미래가 없고, 21세기 지구촌의 모습역시 방관 할 수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의 실현은 그 법이 실현 될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가능해진다. 산상수훈의 법은 그동안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삶의 문화란 점에서 복음이 비로소 인류를 품을 수 있는 기회를 가져올 수 있다. 이 법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에게서만 실현해 갈 수 있는 법으로 신약백성들에게 주어진 값진 유산이다.

 

그동안 유기해 온 것은 이때를 기다려온 하나님의 섭리 일 수도 있고, 이렇게 만들어 온 것은 악마들의 계략으로 사탄에 의해서 지금까지 속아 유기(遺棄) 시켜온 것일 수도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 소중한 것이라면 산상수훈의 말씀은 더 소중한 것이다. 산상수훈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실현이 될 때 인류는 진정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볼 수 있는 희망의 지표가 될 것이다. 제3의 질서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연구해서 발전시켜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산상 수훈의 첫 단락이 8복으로 시작하고 있다.

 

마태복음 5:1-12의 내용은 예수께서 여덟 가지의 복된 자들을 언급하셨다고 하여 흔히 ‘팔복(八福)’이라고 부른다. 처음 네 가지는 구원을 위한 준비이고, 나머지 네 가지는 구원받은 자의 덕목이라고 요약해 볼 수도 있다.

 

1) 심령이 가난 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요.(3-)

심령이란 말을 헬라말로는 프뉴마티(πγευματι)라 하고, 영어로는 spirit라 하는데, 이것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성경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 하고 있다. 심령, 영, 마음, 등 이렇게 다른 표현을 하지만 기본 의미는 동일하다.

 

가난(Poor)이란 돈, 재산, 재물을 충분히 소유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가난이란 개념은 늘 상대적인 의미로 쓰인다. 히브리어 ‘아나임’(‘anaim)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시 37:14; 40:17; 69:29; 잠 16:19)로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다.(출 22:25-27; 23:11; 레 19:9-15).

 

가난한 자란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와 관련되어 쓰여지기도 하였다(사 57:15; 66:2). 대선지서인 이사야 61:1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속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넘어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눅 4:18).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마태복음 5:3에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용기가 없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파탄을 솔직히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시 69:29; 70:5; 74:21; 사 61:1; 습 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으며(시 37:14; 86:14)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시 34:6-18; 51:17; 사 66:2).

 

심령이 부유한 자는 자기 자신이 지식과 지혜와 의와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 자신이 지식과 지혜와 의와 힘이 없음을 깨달아 하나님을 찾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는 겸손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천국’(Heaven)이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로, 복음서중 마태복음에만 언급되었다(마 3:2; 5:3; 8:11; 13:11; 25:1 등). 일반적으로 천국, 즉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같은 말로 보며, 다만 마태복음은 하나님이란 말을 함부로 쓰기를 주저하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대부분 천국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천국’은 메시아의 초림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으며 재림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의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전자는 서서히 성장하는 천국이며 후자는 돌연히 임재 할 천국이고, 전자는 윤리적이고 정신적이라면 후자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전자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에서, 후자는 22장과 25장의 천국 비유에서 그 형태를 찾을 수 있다. 결국 전자가 현세의 교회라면 후자는 미래의 영원한 구원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천국은 별개가 아니다. 현재의 천국 없이는 미래에 실현될 천국도 없기 때문이다.

 

왜 심령이 가난해야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인가? 천국 백성이 되는 기본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요 1:12)이 첫 조건이다. 그가 세상의 것 다 갖추었다고 해도 그리스도가 없이는 아무것도 성립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본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는 것인데, 사람은 참묘한 성품과 성질을 가지고 있다, 재산, 지식, 명예, 권세, 영화, 쾌락 이런 것들이 마음에 담겨 있으면 예수를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자 청년이 예수 영접했는가?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 바리새 사람들이 예수 영접했는가? 땅 사고, 장가가야 하고, 소 길들여야 하고 이런 분들이 예수초대에 응했는가? 그래서 마음이 다른 것들로 꽉 차 있으면 예수를 영접할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베들레헴 여관방을 생각해 보자, 방마다 사람들로 꽉 차 있어, 예수는 빈방 하나 구하지 못해서 마구간으로 가셨다. 이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고 하신 것이다.(마 11:5)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강원도 예수원을 창건했던 대천덕 신부님은 ‘로마교회가 되면서 부자들이 가난한자의 하나님을 빼앗아 가버렸다’고 설파하신 적이 있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예수를 만난 사람은 자신의 내적, 외적인 면을 보게 되면서 애통하고, 슬프고, 후회가 되고, 원통하고, 가슴이 아파서 통곡이 된다. 그래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깊은 회개를 하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두 번째 단계이다.

 

애통(Mourning)은 몹시 애달프고 슬퍼하는 것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거나 다른 비극적인 상황과 연관된 감정과 행동을 말한다. 사람에게 의미 있는 애통은 회개의 애통뿐이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죄의 심각함, 즉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노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많은 부족과 죄를 인해 애통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애통하는 자란 자기들의 부족함과 죄 성을 인정하고 능히 도와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심령으로 애통하는 자는 위로 자 이신 예수님(눅 2:25)과 성령님(요 14:16; 행 9:31)의 위로를 받게 되므로, 예수님은 이것이 바로 ‘복 있는 것’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심령이 가난해야 예수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예수를 영접하려하니 지나온 날의 자기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말을 자연스럽게 토해 내면서, 회개의 통곡이 터져 나오는 것이고, 깊은 회개의 통곡에서 비로소 성령이 임하게 된다(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요 3:3-5). 이미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영접할 때 이런 경험을 했으리라고 생각되어 진다.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란 말은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임이요, 라는 말로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라고 고백했다(시 51:17). 요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라고 말하였다(욜 2:12-13). 혹은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호세아 6:1- 14:1). 예수께서 한 동네에 들어가셨을 때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그의 뒤로 와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그것은 회개의 눈물이었다고 본다(눅 7:37-38).

 

3)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온유한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첫 번째 복을 말했을 때는 천국이라 했는데, 왜 여기 와서는 땅의 복을 말할까?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는 말은 재산이라 할 수도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도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큰 부자란 의미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하나님으로부터 기업으로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온유(Gentle)란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러움을 말한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와’(anawah)는 자기를 낮춤, 괴롭힘을 당함, 겸손함이란 뜻을 지닌다(민 12:3). 온유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이다(갈 5:23). 온유한 자는 타인에 대하여 관대하며(마 18:21-22), 죄인에 대해서 회개할 때까지 인내하는 자이다(벧전 2:19-25). 즉 주님의 마음을 본받은 자를 가리킨다(마 11:29).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온유란 단순히 외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가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 받고 그 고통을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이다(마 11:29; 약 3:13). 또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이 기업으로 받게 될 땅의 의미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아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다(사 66:22; 계 21:1). 세상에서는 강하고 공격적인 자, 무질서한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지만 천국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온유한 자에게 주어진다(시 37:1- 2, 11, 22, 34).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이다(롬 8:17).

 

모세의 온유함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서 하나님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가장 많았던 사람을 모세라’고 말씀하고 있다(민 12:3). 여기서 모세가 온유했다는 말은 자신을 비방하는 소리에 대항하지 않고 감정을 억제하며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고 묵묵히 참아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다는 의미이다. 이는 지도자 위치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역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것과 모세 자신이 비난받는 상황에서 참아내는 것이 매우 곤혹스러웠음을 시사하는 말이라 하겠다. 그는 어느 순간에라도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출 32:32) 인간적인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온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다. 모세의 온유한 성품은 생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얻어진 후천적 기질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내게 배우라(마 11:29)”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할 때 비로소 온유한 성품을 소유할 수 있다(마 5:5). 이것은 인간의 본성적 기질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갈 5:22-23).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나 평소 물질관에 비추어볼 때, 왠지 어색함이 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난 신약시대의 백성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는 의미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심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되어 진다.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곳은 하나님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지혜나 지식이나 물리적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에서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온유함이란 사람의 성품에서 표현되는 것인데, 온유함에는 겸손함, 스스로를 낮춤, 섬김, 부드러움, 관용, 이런 것이 포함된 성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온유는 성령의 열매라고 했다.(갈 5:22-26) 하나님의 자녀 된 신약시대의 백성에게서 온유한 품성이 향기(고후 2:15)가 되고 편지(고후 3:2)가 될 때 온 지구촌은 복음으로 정복된 땅이 될 것이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의(義)는 옳은 것(right) 공정한 것(justice) 정당한 것(just) 이런 뜻인데, 이것은 사회와 관계된 언어에서 1차 생각을 해야 한다. 권력 있는 자들이, 배우고, 가진 자들이 상류그룹이 되어 그 힘이나 기반을 자랑하는 자들이 때로는 가난하고, 못 배우고,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유린하고, 핍박하는 세상에서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이것은 개인에게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국가 간에도 그렇다. 지구촌에 강대국들은 소수민족들을 너무나 억울하고 슬프게 압박하는 경우가 있었다.

 

공직자들의 부정한 뒷거래, 비리를 신발로 삼고 사는 사람들, 절도, 강도, 살인, 사기꾼, 성폭행, 불량식품거래, 세금포탈 행위, 하나님의 교회마저도 옳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도, 무관심하고 자기에게 불이익이라도 올까, 모른 채, 눈을 감고 사는 사람들의 세상, 이런 세상을 보면서 옳은 세상, 바른 교회되기를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이 있어야, ‘배부를 것임이요’ 의로움으로 풍성하고, 만족하고 행복한 사회가 구현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신약시대의 백성은 의로운 세상 만들기 위해 항상 주리고 목마른 심령이 되어야 한다. 그 뜻이 무엇인지? 의(義)를 갈급하게 원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하신 것 아니겠는가? 크리스천에게서 마저 의를 위해 주리고 목마른 심정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우리에게는 미래는 없다.

 

‘의’에 대한 개념이 무엇인가? 인간세계에는 ‘의(義)‘라는 말을 들을 만한 사람들이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보내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라고 인침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의‘의 개념은 바울이 로마서 3:19-22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한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 얻어진 ‘하나님의 의’는 차별( Difference)없다. 세상에는 등급을 나누고 그에 따라서 다르게 대우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으며(롬 3:2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도 차별이 없다고 했다(롬 10:12).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

여기서 긍휼이란 상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내가 상대하는 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긍휼이란 가엽게 여긴다, 불쌍하게 여겨서 도와준다. 보살펴 준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슬픔이 있는 자에겐 함께 나누고, 돌보고, 함께 슬퍼해 주고(롬12:15) 외로운 자에겐 친구가 되어 주는 그런 마음, 이러한 마음가짐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어느 날 예수님께 베드로가 질문하게 된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주면 됩니까? 일곱 번까지 할까요?’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여주어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예를 들어 설명하신 것이다.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는 임금과 같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갚을 수 없는 걸, 아시고 불쌍하게 생각해서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 종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당장 빚을 갚으라고 한다. 빚진 자는 조금만 참아 달라고 엎드려 간청을 하지만 그는 용서하지 아니하고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 광경을 다른 동료가 보고 주인에게 알리니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는 그렇게 할 수 없었더냐? 그리고 그를 다시 빚을 갚을 때까지 옥졸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21-35 참고)

 

자기는 큰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티끌 같은 죄는 용서 못하는 인간들, 오히려 죄 지은 자가 있으면 그 손을 잡고 함께 슬퍼하고, 위로하고, 함께 기도해 줄 수는 없는가? 자기가 죄지은 형제를 긍휼히 여겨야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도 긍휼히 여김을 받는 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

마음이 청결한자가 하나님을 본다? 본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볼 수 없는 분 아닌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 1:19)라고 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일 4:12)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딤전 6:16)라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靈)이시기 때문이다.(요4:24) 영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사람의 눈을 가지고는 볼 수가 없다. 구약에서 몇 차례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는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시거나(창 18:1-이하) 혹은 꿈에 나타나시거나(창 28:13-), 다른 형체(혹은 음성/ 출3:4, 참고: 마 3:17)로 나타나셨다.

 

사람의 몸을 입거나 꿈에 형체를 입고 나나타실 때는 ‘여호와’란 말과 ‘천사’ ‘하나님의 사자’ 이렇게 병행해서 쓰기도 했다. 그런 하나님인데, 마음이 청결한자는 본다? 본래 마음이 청결하다란 말은 깨끗하다, 순수하다 이런 뜻일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했을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하신 적이 있다. 그래서 이 말은 ‘마음이 깨끗해지면 나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이것은 이미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자, 또는 애통하는 자, 온유한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이런 과정을 얘기 해오시면서 ‘마음이 청결한자’ 이야기를 하신 것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앞의 단계를 거친 사람들은 이미 마음이 청결한 자에 속한 자들이다.

 

처음 ‘심령이 가난 한자는 천국이 저의 것’이란 말씀에서부터 당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 ‘하나님’이런 말씀들은 예수님이 없이는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는 콘텐츠(contents)이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하지 말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져야 나를 볼 수 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참고: 마11:25-26)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5)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예수)는 우리의 화평이신자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라고 했다. 화평이 무엇인지를 말씀한 것이다. 즉 원수를 맺지 않고 화목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격 요건에 해당된 말씀이다.

(1)‘가난한 심령’ ‘애통하는 자’ ‘청결한자’ 이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2)‘온유’, ‘긍휼’은 대인 관계에서,

(3)‘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대 사회 관계에서 그리고 지금

(4)‘화평’에 관해서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필요한 주제들이다.

사람이란 묘한 동물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기도 하면서 여러 사람이 모이면, 반드시 그 중에는 이간 질하는 사람이 있고, 불평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끼리끼리 당을 짓는 사람들(유 1:19)이 있고,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 발생한다. 주인이 잠든 사이에 악한 자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나무가 커지면 새들이 깃들고, 가루서 말속의 누룩은 전부 부풀게 한다.(마 13:24-33 참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중에 하나는 “원수 되었던 관계를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화목 제물로 오신 분이다(롬 5:10, 엡 2:11-22, 참고) 예수 믿어서 무엇이 달라졌나? 늘 싸움이나 벌리고, 남의 흉보는 짓이나 일삼고, 그래서 이간질이 밥이 되어 사는 사람들, 어느 한구석도 예수 닮은 대가 없는 사람들...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사는 모습에서 증명 되는 것이다.

 

중세 이후 역사를 보면 싸움만 일삼아 온 것이 기독교였고, 근세사에서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가 기독교국가라고 자부심을 가진 미국이다. 성경에 손을 올려놓고 선서해도 아무런 의미라 없다. 악의 축을 상대로 전쟁을 벌려야 하는데, 이것이 기독교요, 우리의 모습 아닌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아? 오히려 전쟁의 화신이 되어 사는데, 그럼 이들을 뭐라 해야 하는지? 천사라고 해야 할까, 악마라고 해야 할까?

 

왜 교회가 이렇게 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복음은 없고, 율법만 있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도 기독교는 ‘눈은 눈, 이는 이’로 되갚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화목제물’(롬 3:25, 요일 2:2)이라, 화목제물이 싸워서 화목제물 되었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라 한다면 지나온 날을 뒤 돌아 보면서 처음으로 돌아가, 애통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화평은 희생과 양보 없이는 넘을 수 없는 에베레스트 산이란 걸 명심해야 한다.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요(10-)

여기의 의(義)와 6절의 의(義)는 영어 성경에는 같은 righteous란 말을 썼다. 그런데 6절의 의는 자아의식(自我意識)에서 발생하는 감정을 말하고, 여기 10절에서의 의는 외부적으로 오는 박해를 말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물론 오른 일을 주장하다보면 결과적으로는 외부적 핍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다음절(11-)을 보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란 말씀이 뒤 따라온 말씀을 보면 여기 10절의 ‘의’(롬 3:21 하나님의 한 의)는 예수님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계속해서 말씀들을 더 읽어 보면,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1-12)

 

팔복의 처음 네 번째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인데, 다음 네 번째는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음이다.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하나님께로 나오고 구원을 받지만, 구원받은 후 남을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까지 받는다.

 

왜 예수님 때문에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거슬러 악한 말을 할까? 여기서 잠시 생각 해 보자.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현상이다, 또는 선지자들도 이 같은 대우를 받았다, 왜 선지자들은 이 같은 대우를 받았을까? 왜 그랬을까?

 

요즈음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고, 욕먹고, 거짓으로 악한 말로 비난하고, 그래도 크리스챤으로 인내하면서 살고 있는가? 억지로 뀌어 맞추고, 이유를 조작하면 예수이름 때문에 핍박 받는다고 한다, 무슬림 권 같은 곳에서는 지금도 예수 말하면 핍박이나 죽음도 당 할 수 있다, 하지만 ‘의’(예수) 때문에 핍박 받는 것은 기존 세력으로부터 받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기존 세력이 쓰는 언어가 아니고 다른 언어를 쓰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선지자들이 받은 핍박이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받은 핍박이었다. 어쩌면 여기의 글을 읽으면서도 껄끄럽게 생각 되는 부분이 있다면 지금까지 들어온 소리와 다른 느낌이 있을 때 그렇게 될 것이다.

 

무슬림 권에서는 무슬림에 관한 애기를 하면 오히려 대단히 환영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당연히 거부하고, 핍박하고 죽이려 한다. 바로 그런 것이다. 예수님당시는 유대교가 기존 종교였다. 그런데 엉뚱하게 나사렛 예수라는 작자가 나타나 유대교의 전통을 부정하고, 비판하고, 흔들어 대니, 기존 조직이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하지만 핍박을 받고 죽음을 당하면서도 사도들은 예수 이야기를 했었다.

 

이것을 명심해야한다. 만약에 ‘지금 기독교는 제2의 종교개혁을 해야 한다’고 한다면 이 말을 환영하는 사람은 분명 있다. 하지만 개혁을 하려면 뭐가 잘못되어서 개혁을 해야 한다는 분명한 이유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 할 때는 조금 전까지 환영했던 사람도 태도가 급변해서 전통교회 입장으로 돌아서서 기존교회 보호에 앞장을 서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개혁을 말하는 사람을 욕하고 핍박을 하게 된다. 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통 기존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은 중세 개혁당시에도 있었던 일이다. 교회개혁이란 다른 언어가 필수적으로 나와야 하지만 다른 언어가 나올 때는 금방 안색이 변하고 이단 삼단 들먹이며 배척을 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른 언어가 없이는 개혁이란 자체가 성립되지 못한다. 21세기 교회는 분명 개혁을 해야 하는데, 과연 누가 장차 받을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지금 욕먹고, 박해받고, 거슬러 악한 말을 들으면서 이 일 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미래교회를 위해서는 이럴 사람이 나와야 할 것이다.

 

왕으로서 자기의 백성들이 받을 복에 대한 내용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복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라도 전통적으로 내려온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버리고 산상수훈에서 가르쳐주신 ‘나의 왕 나의 주‘ 되신 주님의 말씀에 다시 한 번 더 귀를 기울이고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알고 삶의 현장에서 순종의 열매를 맺어 ’모든 영광 주님께 돌리며“(고전 10:31)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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