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벌과 영생의 갈림길
인생길에는 항상 갈림길이 있다. 선택에 따라서 가는 길과 삶의 모습이 달라진다. 복된 길이라고 해서 평탄 하냐? 결코 그렇지는 않다. 반대로 저주의 길이라고 해서 걸림돌이 많은가? 그것도 아니다. 어떤 면으로 저주의 길에도 유혹하는 각가지 미끼로 일시적으로 형통한 것 같이 생각되어 질 때도 있다. 그래서 시작은 순탄하지만 중도에 도사리고 있는 각가지 걸림돌(사단의 올무)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느 종교에서는 고행의 길을 말한다. 참된 진리에 가르침을 받고 따라가는 것은 복된 길이며 기쁘게 순종하면서 따라가는 것이기에 결코 어떤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이 고행이 아니고 기쁨이 넘치고 소망의 길이다.
어떤 종교에서는 고행을 강조한다. 생명의 종교는 결코 고행이 아니다. Daum 백과사전에서 (1)고행(苦行)이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또는 원망(願望)을 달성하기 위해 괴로운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육체적 욕망을 없애고, 최고의 정신생활을 실현하기 위한 준열한 육체적 가책을 말한다고 했다.
(2)고행이란 자기의 몸을 괴롭게 하고,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며 견디기 어려운 여러 가지 수행을 하는 것이며 이는 주로 외도들이 천상에 나기 위하여, 혹은 깨닫기 위하여, 또는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행하는 정인(淨人)을 말한다고 했다.
구약성경 시편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시 23:4)라고 한 표현에서 그리스도인들도 어둡고 힘든 골짜기와 같은 길로 가기도 한다. 신불신간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이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들은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는 배후에는 임마누엘의 신앙심 때문에 인내로 모든 문제를 극복하면서 살아간다.
‘영벌’과 ‘영생’이란 단어를 생각해 본다. 법정 용어로 쓰지 않는 두 단어다. 두 단어는 종교적으로 특별하게 쓰는 단어들이다. 성경에서 두 단어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성구사전을 살펴본다.
신약성경에 한번만 기록된 용어가 ‘영벌’(마 25:46절 ‘永罰’ Eternal punishment)이란 단어다. 국어사전에서 영벌이란 뜻은 지옥에서 받는 영원한 벌이라고 했다. 일본어로 ‘地獄に落ちる永久の罰’로 영벌을 설명하기를 죄인들이 지옥에서 받게 되는 영원한 형벌을 말한다고 했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영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자 하였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지옥의 영벌은 세상에서 지은 죄에 상응해야 하는데, 죄란 인생의 최후 목적이신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 외의 다른 것들을 마치 최후 목적인 양 추구하는 것이므로, 그 벌 또한 하나님을 잃어버린 형벌뿐 아니라 다른 것들로부터도 해(害)를 받는 형벌을 당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는 ‘영벌’에, 양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마 25:46). 그리고 요한일서에서는 두려움에 형벌이 있으며, 사랑은 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다(요일 4:18). 영벌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영원한 불’(마 18:8; 25:41; 유 1:7), ‘영원한 죄’(막 3:29), ‘영원한 결박’(유 1:6), ‘영원한 멸망’(살후 1:9) 등은 모두 비슷한 개념들로 표현되어 지고 있다.
영벌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는 정신적 혹은 신앙적으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간접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윤리도덕과 관계되는 삶의 모습을 조심하라는 경고라고 생각되어 진다. 모든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고 종교들이 가르치는 삶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언행을 비롯해서 마음관리와 신앙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종교행위를 바르게 가져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무리 종교심을 발휘해서 노력해도 분명한 것은 영벌(지옥)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도 있다. 그 형벌을 피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분만이 생명의 길이 되어 주시며 그 분 안에 복음을 통해 연합될 때 영생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영생(Eternal life)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에 47번 기록되어 있다. 영생에 대해서는 마음에 평안을 주는 용어로 들려진다. 그리고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의 축약형이라는 것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zoe)와 ‘영원한’의 뜻을 가진 ‘아이오니오스’(aionios)를 번역한 것으로,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영생은 살아있는 것이 끝난 후의 단순한 시간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그 시작을 갖기 때문에(엡 1:4) 끝이 없는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생명과 질적으로 같다(요일 5:11-12)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영생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예정하심과 선택하심에 있다 해도, 영생에 관한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참된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을 때에(요 17:2-3; 갈 2:20) 얻는 거듭남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인들이 두 단어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새기고 언행심사에 적용해보려고 힘쓰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가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짐승의 세계는 종교성이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들에게 주신 것 중에 종교성에 대한 내용가운데 ‘나’(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계명까지 주셨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주는 내용은 어디까지나 복이고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전재로 하고 있다. 저주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해서 짐승 같다고 했다(시 49:20). 심지어 복을 받지 못하도록 담을 쌓고 방해하는 방법으로 사단의 무기인 죄라는 것으로 유혹하고 있다. 죄 가운데서 불신앙 혹은 우상숭배로 피조물이 피조물을(롬 1:25) 하나의 신으로 생각하고 경배하도록 유혹해서 결국은 영벌에 처하게 되고 마는 슬픔 현장이 세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길을 가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목적지를 향하여 가느냐? 영벌의 세계인 지옥인가? 아니면 영생의 세계인 천국인가? 살아있는 동안 종교라는 태두리 안에서 ‘신앙’과 ‘행위’라는 선택을 통해서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영벌, 왼쪽 편에 서지 않는 참된 신앙자로 모두 영생의 길로 함께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응주 목사(재일한국선교사협의회(CCKJ) 회장 역임, TOGANE HOME CHURC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