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왕의 욍의 산상수훈 두 번째(2)

by wgma posted Jul 12, 2015 Views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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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왕의 욍의 산상수훈 두 번째(2)

(마태 5: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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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말씀들은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내용들 가운데 알기 쉽게 설명하시고 계시는데 오늘은 몸에 꼭 필요한 식품인 소금과 또한 생활하는데 어떤 환경에서 활동해야 하는 구체적인 것으로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 예로서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계신다. 크리스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이다.

 

1) 세상의 소금과 빛(5:13-16)

팔복에 관한 말씀이 끝나고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한다. 크리스챤은 세상에 있어서는 소금과 빛이라 한다. 이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보통으로 생각하게 된다. 입으로는 말하지만 현실 삶에서는 전혀 역할이 안 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소금과 빛은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고백하고 성령으로 거듭 났을 때 이미 소금과 빛이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로 소금이 되어야 하고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벌써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금과 빛이 안 되는 이유는 우리의 신앙행위의 구조적 모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분명하게 ‘너희는 세상의 것’이라고 말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교회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구조는 교회의 것으로만 생각하고 살고 있다. 이 말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소금’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소금은 무슨 역할을 하는 물질인가? 소금의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짠맛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 방지이다.

소금(Salt)은 짠 맛을 내는 무색의 천연 광물성 식품으로, 음식물의 양념(욥 6:6), 방부제로 쓰인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 드릴 때 소금을 사용했다(레 2:13; 겔 43:24). 소금은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데서 언약을 상징했다. 그래서 소금 언약(민 18:19: 대하 13:5)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성경에 소금 언약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은,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며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상징했다. 어떤 학자는 언약을 맺으면서 함께 식사를 하고 그때 먹는 식물에 소금을 친 데에서 생긴 말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과 그 후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제로 드리는 성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이를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라고 하셨다(민 18:19).

 

또한 소금은 성별, 정결을 상징하며 신생아의 소독제(겔 16:4)로도 사용되었다. 엘리사는 토산이 익지 못하는 땅을 고치기 위해 물의 근원 지점에 소금을 던졌다(왕하 2:21). 바위에서 나오는 팔레스타인의 소금은 풍화되기도 하고 습기를 빨아들이면 짠맛이 없어져 비료에도 못 쓰는 맛 잃은 소금이 되어 길에 버려졌다(마 5:13). 그래서 소금은 폐허, 멸망(삿 9:45; 신 29:23), 무익함, 불모, 죽음을 상징하기도 했다(습 2:9; 겔 47:11).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의 부패를 막아야 할 중요한 직분이 있으며 세상을 살기 좋게 만들 의무가 있음을 비유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마 5:13).

 

(1)소금의 첫 번째 역할은 짠맛이다.

소금은 모든 음식에 필수적이다. 만일 소금이 없다면, 맛있는 음식을 하나도 만들지 못할지 모른다. 소금은 맛있는 음식에 필수적이다. 젓갈, 찌개, 김치를 너무 짜게 먹는 것은 건강에 안 좋다고 하지만, 너무 짜지 않고 너무 싱겁지도 않은 적당한 소금간은 최고의 음식 맛을 낸다.

 

여기서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인생의 최고의 맛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에 맞는 삶을 가리킬 것이다. 삶의 의미가 없고 목적이 없고 허무하고 또 도덕적으로도 추하고 더러운 것은 인생의 맛이 없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과 아름다움은 바로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그것이 인생의 참된 맛이다.

 

(2)소금의 두 번째 역할은 부패의 방지이다.

이것은 짠맛의 부수적 역할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상하기 쉬운 식품들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은 햇볕에 말리거나 소금을 뿌려 절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중요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소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다시설명을 하면 우리(크리스천)가 세상의 것이 되어 있지 않고, 교회 조직의 것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교회에서 맛을 내고 분명한 크리스챤의 삶으로 죄악의 사상과 부패한 마음을 소금과 같이 역할을 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이라고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인 크리스챤들이 말씀대로, 만일 짠맛 곧 경건성과 도덕성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일 것이고 조롱과 비난의 내상이 된다는 것이다. 경건과 도덕성을 상실한 교인들은 세상에 아무 유익이 없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짓밟을 것이다.

 

2) 두 번째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등경(燈, stand)이란 등대와 같은 말이다. 유대의 가난한 서민 가정에는 벽에 돌출된 등경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등을 등경 아래가 아니라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마 5:15; 막 4:21; 눅 8:16; 11:33), 이는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나타내려는 것이지 숨기려 함이 아니며, 그가 가져오신 왕국은 현재는 숨겨져 있어도 끝내는 드러나고야 말 것이라는 의미이다. 개역성경은 ‘촛대’라고도 번역했다(계 2:5; 공동번역은 ‘등경’이라고 옮겼다). 구약에서는 등경은 성소 안의 금 촛대를 표시하기도 했다(출 25:31, 39). 등경은 교회의 상징(계 1:20)이며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선’(사 2:2) 교회를 통해 전해진다.

 

‘빛’은 지식, 의와 진실, 기쁨과 행복, 그리고 생명을 상징한다. 그러나 반대로, 어두움은 무지, 불의와 거짓, 슬픔과 불행, 그리고 죽음을 상징한다.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다. 세상에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고 의와 진실이 없고 기쁨과 행복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교회(엡 1:22, 그리스도의 몸)는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가 있다. 기독교는 감추어진 교가 아니다. 기독교회의 모임은 공개된 모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교회로 모이며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다 공개되어 있다.

 

크리스챤의 삶은 세상 앞에 모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좋은 모델 혹은 나쁜 모델이 된다. 그것은 주로 인간관계, 대인관계에서 나타난다. 물론, 사상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인 자들도 있다. 또 기독교를 오해해서 기독교를 비방하는 자들도 있다. 또 진리의 지식의 차이 때문에, 기본적인 혹은 중요한 생각의 차이 때문에 부득이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범사에 정당하게,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사랑이 없다든지 악하다든지 거짓말쟁이(요 8:44)라든지 하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등경위에 둔 빛이라면 교회에서 빛을 비추도록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 ‘말’(斗)이 뭔가? 말이란 곡물의 분량을 셈하는 그릇이다. 다른 말로하면 Box다. 지금은 우리가 교회라는 Box에 담겨 있기 때문에 세상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현재 인식하고 있는 교회당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위의 내용이 분명히 이해를 해야 한다. 지금은 개인적으로 나(私)와 교회라는 조직이 따로 있어서 나와 교회는 객관적 관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라는 조직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 있다. 그래서 소금과 빛의 역할이 교회라는 조직 안에서만 되어 있다. 교회의 본질은 우리자신이다. 그래서 객관적 관계가 아니라 내 몸이 교회이고 교회와 나는 한 몸(one body)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이 들어오면서 교회라는 개념이 따로 생겨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히 교회조직을 우선적으로 섬기게 된 것이고, 이것을 종교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종교가 되면 안 된다고 말하게 되었다. 지금은 교회조직을 섬기기도 바쁜데 어떻게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없고, 빛이 되어 줄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회당교회구조가 오랜 세월 지나오면서 전통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어떻게 뜯어 고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세상은 지금도 소금의 맛을 찾고, 빛을 보기를 원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해 줄 수 없기 때문에 교회(그리스도의 몸)는 세상에서 밟히고, 세상은 빛이 없음으로 영적으로 어둡게 되어 버린 것이다. TV뉴스를 보면 지금 세계는 악한 영들의 활동무대로 인한 각가지 범죄로 불안과 공포를 일으키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 이유는 빛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2) 왕과 율법(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17-)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18-)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며 누구든지 이를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19-)

 

일점일획(The smallest letter, The least stroke of a pen)이란 히브리어 ‘요드’(y)와 헬라어 ‘이오타’(i)를 가리키며, 매우 작은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 진다”(마 5:18)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토라(율법)의 세세한 항목들까지도 중요하게 여겨 지켜야 하며, 구약의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강조하신 말이었다(마 5:17-19).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천지의 없어짐과 율법의 한 획을 대조하여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눅 16:17).

 

계명(Commandment)이란 종교적, 도덕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정을 말한다. 구약에서는 율법과 십계명(창 26:5; 출 15:26; 레 22:31; 27:34)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신약에서는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마 22:36-40; 막 12:28-34, 요 13:34-35)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었는데 복음서에서는 십계명뿐 아니라 율법의 다른 규정들도 가리키고 있다(마 5:19).

예수님은 모든 계명의 핵심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새 계명으로 말씀하셨고(마 22:36-40; 요 13:34) 바울은 계명을 율법과 결부시켜서 해석하였다(롬 7장).

이 말씀을 놓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다. 율법과 복음(예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본문에서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빠뜨리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께서 지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바로 이 말씀 때문이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남기지 않고 다 완성 하신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그런데, 여전히 율법의 이것저것, 때로는 이름을 바꿔서 혹은 율법에다가 복음이란 옷만 입혀서 율법을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게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한다. 우리에게서 ‘거룩’(벧전 1:15-16)이 상실되면 불신자들보다도 훨씬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거룩이란 구별에 있는 것인데, 지금은 복음에다가 율법을 혼합시켜 물 타기를 해 버렸기 때문에 거룩이 상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훼손 혹은 부정하는 결과를 만들어 버리고, 그 자리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현실이라 할 수 있다.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사1:22) 왜 이런 결과가 되었을까? 어느 때든지 유전적 전통이 이런 결과들을 만들어 왔다.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지키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구조는 율법을 도입하지 아니하면 유지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도입이 되어야 하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복음의 거룩이 유지 될 수 없게 되었다. 작은 것을 챙기려다 큰 것을 잃어버린 결과가 된 것이 아닌가?

 

성경책에 율법(구약)을 포함해서 편집한 것은 예수를 똑바로 알리기 위해서이고,(죄를 깨닫게) 복음의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서 편집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대비(對比)라 한다. 검은 것이 검다고 인식 하기위해서는 흰 것을 대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구약성경은 교육교재로서는 필요한 것이지만 지키는 소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예수께서 다 이루신(완성하신 요 19:30에는 '다 이루었다') 것이기 때문이다.

 

3). 금지하는 법들(5:21-7:6)

산상수훈 중에 8복을 기본으로 제시하고, 예수님은 자신과 율법과의 관계를 설명한 후에는 하지 말라는 법과 하라는 법으로 나뉘어서 말씀하고 있다. 5장21절부터 7장까지에서 하지 말라는 법이 6가지, 하라는 법이 6가지다. 그리고 그 결과의 2가지를 말씀하고 마친다.

 

(1)첫째가 화내지(노하지) 말라 (5:21-26)

예수님의 법은 구약의 율법 그게 문제가 아니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 했으나. 예수님의 법은 형제를 보고, 화(라가)를 내고, 욕하고, 미련하다고 폄하하는 행위는 살인하는 자와 똑같다는 것이다. 사실 살인은 그 기초가 형제의 인격을 무시한데서부터 시작 된다.

 

살인(Murder)이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살인을 금하셨다(창 9:6). 십계명 중 제6계명이 살인 금지 조항이다(출 20:13).

 

라가(raca)란 ‘속이 빈’, ‘쓸모없는’이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 욕이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시면서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셨다(마 5:22).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를 표준새번역에는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모욕하는 사람’이라고 번역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은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분노하거나 비난하는 일이 하늘나라 시민으로서 얼마나 합당치 않은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2)둘째가 간음하지 말라 (5:27-32)

 

율법은 간음하지 말라하지만, 예수님의 법은 음욕을 품고 여인을 보는 자는 이미 마음에 간음한자라고 규정한다. 타락한 문화는 온통 눈에 보이는 것이 음욕을 품게 만들어져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느 누가 단 하번이라도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지 않는 자가 있으랴, 그래서 탄식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가 정말로 필요한 것이다.

 

간음(Adultery)에 대해서 십계명에서는 금지하는 일곱 번째 계명으로(출 20:14)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간음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레 18:20; 20:10 등)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다(신 22:22-24; 요 8:5 ). 또한 성경에서 ‘간음’이란 표현은 종종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하는 우상숭배와 영적인 불신앙을 말하였다(겔 23장; 호 4장).

 

음욕(Desire)이란 음탕한 욕심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나쁜 의미로 사용된다. 로마서 1:24에서는 성적인 욕망과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다. 예수님은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 7계명(마 5:27)을 다른 차원에서 해석해 주셨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음욕조차 용납되지 않는 완전한 순결을 명령하셨다(마 5:28).

 

(3)셋째가 맹세하지 말라 (5:33-37)

율법은 헛맹세하지 말라 했으나, 예수님의 법은 아예 처음부터 도무지맹세하지 말라 하신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무리 맹세를 해도 그것은 지킬 수 없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다만 맹세하는 것은 외식을 만드는 근본이 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옳다, 아니다. 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신앙인은 맹세를 해서 위장하는 것은 더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다.

맹세(Oath)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약속을 보증하는 방법이었다. 맹세, 서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쉐부아’(shebu?h)는 ‘일곱’이란 뜻을 가진 ‘세바’(sheba?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7이란 숫자를 천지창조를 나타내는 거룩한 수요 완전수로 여겼다는 사실로 보아 세바에서 파생된 맹세란 말의 엄중성과 신성성을 짐작케 한다. 고대 근동에서 맹세하는 당사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을 증인으로 하거나 특별한 상벌 조항, 특히 맹세를 어기는 경우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조항을 규정하여 맹세를 지키도록 하였다(삼상 14:44; 삼하 3:35).

 

이스라엘 사람들은 맹세가 하나님 앞(신 6:13; 삼상 14:45; 19:6; 사 48:1; 렘 12:16)에서 약속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맹세의 엄중함과 신성함을 강조하였다(창 21:23; 31:53; 갈 1:20; 히 6:16). 그러므로 맹세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되며(출 20:16; 신 5:11) 지키지 않거나 위반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레 19:12)으로 마땅히 벌을 받아야만 했다(겔 17:13, 16, 18-19). 이 때문에 맹세를 한 경우 그것이 비록 손해가 되더라도 지켜야 했다(레 5:1-4). 그래서 어떤 맹세는 그 후손에게도 구속력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창 50:25-26; 수 9장).

 

맹세의 형식은 다양했다. 일반적으로 맹세자들은 오른손을 하늘로 들어 올렸는데(창 14:22; 신 32:40; 단 12:7; 계 10:5-6) 손을 드는 것은 서약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위로 하나님도 오른팔로 맹세하신다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다(사 62:8). 또 맹세자는 맹세를 제출한 사람의 생식기(환도뼈)에 손을 넣어 맹세하거나(창 24:2; 47:29) 제물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쪼갠 사이를 지나가는 복잡한 의식도 거행하였다(창 15:10, 17; 렘 34:18). 때로는 ‘아멘’으로 답하여 맹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신 27:15).

 

후대로 오면서 맹세는 하나님 대신 예배에 관련된 물체, 즉 하늘, 예루살렘, 태양, 대지, 성전, 제단, 예물 등을 가리켜 맹세가 이루어지곤 하였다(마 23:16-22). 그리고 맹세가 종종 다른 사람을 속이는데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맹세의 오용을 막기 위해 맹세를 함부로 하는 것을 반대하셨다(마 5:34-37). 그러나 예수님이 진실한 맹세 자체를 거부하신 것은 아니었다(마 26:63). 바울도 맹세의 성격을 띤 말을 하기도 하였다(고후 1:23 갈 1:20; 빌 1:8).

 

(4)넷째가 악한 자를 대적(보복)하지 날라 (5:38-42)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지만 예수님의 법은, 악을 섬김으로 다스리도록 하라는 것이다. 악을 선으로 이겨야 한다. 양보하고 희생하면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악을 이기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예수님의 법을 따르는 경우는 개인에게서 지극히 작은 부분에서는 있었을 지라도, 교회 모임(집단)에서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중세 십자군 전쟁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무슬림을 악으로 규정하고 2백년이 넘도록 전쟁을 했지만 당시 무슬림의 살라딘은 악을 선으로 갚는 일을 했었다. 그 결과 교회는 참패를 당했고, 무슬림은 터키, 중앙아시아 일부, 북 아프리카까지 그 세력을 넓히는 결과를 그들은 얻어 냈던 것이다. 예수가 사탄의 세력과의 투쟁에서 물리적 힘으로 이겼는가? 아니면 져서 이겼는가? 어느 편이었나?

 

(5)원수를 사랑하라(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전통사본에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라는 말씀 다음에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라는 말씀이 있다.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이 원본의 본문이라고 본다. 누가복음 6:27-28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이것은 “원수를 갚지 말라”는 레위기 19:18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고 더 강화하신 것이다. 우리는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축복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5:45-47)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태양)를 惡人과 善人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불의(不義, Evil)란 의롭지 못함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죄와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 오직 하나님만이 불의치 않는 분이시며(롬 9:14; 히 6:10)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시다(요일 1:9). 하나님은 불의한 자를 심판하신다(롬 1:18).

 

세리(Tax collector)는 성경 시대에 나라의 세금을 거두던 사람을 말한다. 헬라어로는 ‘텔로네스’(telones)이며 ‘세’와 ‘산다’는 뜻의 합성어로 세금 징수의 청부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들은 로마 정부의 세금 징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예수님 당시 세리는 ‘갑바이’(gabbai)로 불리는 수입세 등 일반세를 수금하는 세리와, 세관에서 관세를 받는 ‘목케스’(mokhes)라고 불리는 세리가 있었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악질적으로 과다한 세금을 거둬들였고 이로 인해 그들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마태가 이 ‘목케스’에 해당하는 세리였다.

 

세리들은 원래 세금 이상의 액수를 거두어 그 차액을 자신이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리들을 죄인(마 9:10; 11:19), 창기(마 21:31), 이방인(마 18:17)과 같이 취급하여 배척하고 비난하였다(마 9:10-13). 이 때문에 이런 세리들을 친구로 삼으신 예수님도 비난받으셨다(마 9:11). 그렇지만 세리 중에는 삭개오(눅 19:1-10)나 마태(마 9:9)같이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있다.

 

주께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원수 사랑의 행위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행위구원론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원수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답고 하나님의 자녀의 표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뿐이다. 원수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까닭은 하나님께서 먼저 악인들에게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이었을 때(롬 5:10),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것은 원수 사랑의 행위이셨다(롬 5:8).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의 사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악인들에 대해서는 차후에 생각하더라도, 우선 성도들 가운데 낯선 형제들에게 친절히 인사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습관이 되어 한다. 신입교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기존 교인들의 온화한 태도로 말미암아 편안함을 느끼게 해야 할 것이다. 텃세로 끼리끼리만 인사하지 말고 특히 낯이 익지 않은 분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가 아닌가?.

 

친한 사람과만 인사하고 대화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태도이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도둑들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친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교회를 나온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지 않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주께서는 성도 상호간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 친절과 선을 베풀라고 가르치신다. 그 자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시간에 자기를 못 박은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또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돌로 치는 무리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다. 우리도 주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행할 수 있다.

 

(7) 너희도 온전하라.(5:48)

주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이라는 말씀은 존재적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한자, 완전자시요 피조물인 우리는 유한자, 불완전자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는 혼동될 수 없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피조물은 아무리 영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해져도 신이 될 수 없다.

 

여기에 ‘온전하심’이라는 말은 문맥적으로는 친한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원수들에게까지도 선을 베푸는 온전, 즉 도덕적 온전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속성, 특히 그의 도덕적 속성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하나님께서 해와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주시는 것과 같은 온전함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여러 해동안 사귄 교우들에게뿐 아니라,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에게도, 또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원수들에게까지도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주께서 가르치신 온전함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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