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대량살상의 도구?
함돈균 고려대학교 HK연구교수
오늘날 냉장고는 SF영화의 첨단 기술력 뺨치는 섬세함을 유지하며, 크기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다양한 생물에 부합하는 적절한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개의 문으로 분화되어, 얼마든지 담을 수 있으니 얼마든지 제 안으로 가득 넣어 달라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커다란 냉장고는 이곳을 가득 채우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예비한다.
냉장고 안에서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동명 소설을 각색하여 영화화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 공원>이 개봉했던 때가 1993년이었으니까, 지난 6월 개봉한 <쥬라기 월드>(콜린 트레보로우 감독)는 22년 만에 나온 4탄이다. 이 영화가 처음에 준 신선한 충격은 쥐라기 시대를 실제처럼 눈앞에 실감 나게 불러온 컴퓨터그래픽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게놈 연구 등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멸종 동물의 유전자 복제가 정말 가능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던 시대 분위기와도 연관이 있다. 최근에 본 한 외신의 과학 기사는 공룡의 피를 빨아 먹다가 호박 속 화석이 된 모기의 피에서 멸종 공룡의 유전자를 추출하여 공룡을 복제한다는 영화 이야기가 순전히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니라고 전하고 있다.
이 기사를 보자마자 엉뚱하게도 점심 식탁에 올라온 생선을 보관하던 냉장고가 떠올랐다. 왜였을까. 알다시피 영화에서 공룡 부활의 단초가 되는 모기의 피는 모기의 신체를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는 호박을 통해 추출된다. 그런데 원형대로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1억 년 이상 된 모기가 부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부패는 모든 생물이 죽고 나면 피할 수 없는 자연 과정으로서, 살아 있을 때 질서 있게 조직되었던 유기체가 무질서하게 흩어짐으로써 엔트로피(무질서)가 증가하게 되는 우주 법칙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원형대로 보존된 모기의 신체는 물리적 차원에서는 엔트로피 법칙이 유예됨으로써 아직 완전한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다. 원리상으로 볼 때 죽음을 통해 모든 생물이 귀속되는 우주적 엔트로피 법칙의 이러한 유예는 냉장고의 냉장·냉동 기술이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다른 게 아니다.
슈퍼마켓의 냉장 진열장에서 식품을 고를 때 중요한 기준이 되는 '신선도'란 무슨 뜻인가? 사람의 관점에서 안전하고 먹기 좋은 상태를 뜻하는 신선도란 적정 수준의 냉기를 통해 생물의 물리적 부패를 저지한 결과다.
간단히 말해, 물리적으로 유기체 내부의 조직(질서) 상태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죽었으나 죽지 않은' 모순적이고 불가능한 신체 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다. 냉장고의 신선도는 보존한다기보다는 실은 '유예'하는 것이며, 핵심은 완전한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을 유기체의 물리적 신체로부터 저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식품 저장고라 할 수 있는 냉장고를 좀 더 긴 주기로 사용하게 되면, 공상과학영화의 도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컨대 <에이리언> 같은 SF영화를 보면 엄청난 속도로도 몇십 년, 몇백 년 거리가 떨어진 까마득한 외계로 향하는 우주비행사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길어야 고작 100년 정도의 자연수명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겠는가? 이때 그들이 취하는 방법은 수십 년간 아주 '긴 잠'을 자는 것이다. 이 긴 잠은 죽음 상태와 비슷하지만, 생물학적 부패와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음은 아니다.
어떻게 이런 기술이 가능할까? 그들의 잠은 적정한 냉장·냉동 상태를 유지하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냉장고가 생물학적 노화, 즉 죽음을 향한 유기체의 시간을 저지하거나 유예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수십만 년 전 외계에서 지구에 왔다가 남극에 잠들어 있던 외계인이 깨어난다는 극장판 영화
이런 점에서 냉장고를 완전한 생물학적 죽음을 저지하고 유예하는 사물이자 우주적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반물질이며, 먼 곳으로의 외계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SF적 사물인 동시에 까마득한 과거 속 유기체를 오늘의 시간에 부활시키는 타임머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천국, 다른 동물의 지옥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눈감고 있지만, 현대 문명사회에서 냉장고의 역설은 바로 그 기능으로 인해 생물 전반에 대해 인간의 끔찍한 대량살상을 뒷받침해 주는 든든한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에 있다.
오늘날 냉장고는 신선도에 관한 한 가정용조차도 SF영화의 첨단 기술력 뺨치는 섬세함을 유지하며, 크기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다양한 생물에 부합하는 적절한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냉장고의 칸은 여러 개의 문으로 분화된다. 김치냉장고의 독립에서 보듯이, 한 집에서 두 대 이상의 냉장고를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가 어릴 때 쓰던 냉장고보다 훨씬 더 커지고 문이 늘어난 이 사물은, 얼마든지 담을 수 있으니 얼마든지 제 안으로 가득 넣어 달라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형마트에 익숙해지면서 필요 이상의 큰 묶음으로 된 대용량 상품을 쉽게 사게 된 것처럼, 커다란 냉장고는 이곳을 가득 채우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예비한다. 그러나 물리학적 죽음(부패)을 저지하는 이 사물을 채우는 내용물은, 인간의 생활 천국을 위해 당장의 필요 이상으로 대량 '학살'되고 착취되는 지구 생물들이다.
46억 년이라는 지구 시간을 열두 달 인간 달력으로 환산하면,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지구에 출현한 것은 12월 31일 자정 몇 시간 전 즈음이라고 한다. 364일 동안 지구에 흔적조차 없던 인간이 달력 마지막 날에 태어나 지구 전체를 '인간의 천국'으로 선포하며 살고 있다. 그중에서도 '현대'라는 유례없는 기술사회는 인간의 천국을 위해 가차 없는 자기중심주의를 구축하면서, 인간의 천국이 지구에 인간보다 훨씬 더 먼저 출현한 거의 모든 생물들의 지옥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마법학교의 교장도 갖지 못한 해리포터만의 특출한 능력 중에는 동물의 소리를 듣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사람이 해리포터처럼 동물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인간 문명에 대한 그들의 증오를 듣는다면 인간은 아마 무서워 지금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다른 생물들과 살 수 없을 것이다.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라는 소설에는 사육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개가 난데없이 어디선가 출몰해 아기에게 덤벼들어 물어뜯는 이야기가 나온다. 개가 미친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개의 광기는 개의 입장에서 보면 광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정당한 증오일 것이다.
'가축'이라는 이름으로 사육되고 대량 도축되는 지구상의 동물들, 나아가 땅에서 자라나는 식물들까지 포함하여 그들이 가장 끔찍하게 증오하고 공포를 느끼는 사물이 있다면 무엇일까. 내 대답은 냉장고다. 점점 더 커지는 냉장고는 인간의 천국, 여타 생물의 지옥을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사물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