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왕의 왕의 산상수훈 네 번째
(마태 7장)
다섯째, 비판하지 말라 (7:1-6)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1-5)
비판(Judge)이란 사람, 행동, 작품 등을 평가, 비평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같은 단어가 판결, 정죄, 판단 등으로 번역되었다.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눅 6:37)라고 하셨다. 선악에 대해 분별할 줄은 알아야 하겠지만, 재판석에서 재판하듯 다른 이를 심판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사람을 정죄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바울도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했다(롬 14:1).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마 7:1)고 하셨다. 비판, 즉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은 사람의 권한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권한이기 때문이다(롬 14:10). 또한 예수님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결국 자신이 비판받게 된다고 하셨으며(마 7:2), 비판하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고 하셨다(마 7:3-5).
여기서 비판하는 문제, 헤아리는 문제, 형제의 눈 속의 티 문세를 몰아서 언급 하신 말씀이다. 하지만 근본 뜻은 동일한 맥을 가지고 있는 말씀이다. 한마디로 네가 재판장이 되지 말라는 말씀이다. 성경의 근본 메시지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인이 없는가?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 그러한 인간들인데, 마치 자기는 죄인이 아닌 거처럼 형제를 비판하고, 따지고(헤아림),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려고 하는 행동이 더 큰 죄(들보)를 가진 자들이란 것이다.
‘판단’(한글개역에는 43번)하시는 재판장은 오직 한분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면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가령 형제가 간음죄를 범했다 하자. 현장에 끌려나온 여인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했을 때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손에 들었던 돌을 버리고 하나 둘 그 자리를 떠났다. 율법아래 살던 사람들도 그랬다. 그런데 복음아래 산다는 사람들은 율법아래 산 사람들보다 더 악행을 범한다.
앞의 말씀을 생각하면 마음으로 음욕을 품고 여인을 본 자는 간음한자라고 하신 말씀이 진리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행위로는 간음하지 안 했어도 예수님 앞에서는 모두가 간음한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누가 누구를 비판하고, 따지고, 티를 뽑겠다고 큰 소리를 치는가? 혹 형제가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자기를 돌아보고, 형제를 위해 기도해주고, 상처가 깊어질까 감싸 주고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의 인격이 아니겠는가?
여섯째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지 말라’(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7:6-)
진주(Pearl)는 연체동물 중 조개류의 체내에 비정상적으로 생성된 구슬 모양의 석회석 응고물로 매끈하고 광택이 난다. 값비싸고 귀한 보석으로 상류사회 여인들의 장식품이나 무역상의 주요 거래 품으로 취급되었다(딤전 2:9; 계 18:12).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가 진주 모양이었으며(민 11:7) 잠언은 특히 고귀하고 품위 있는 것, 꼭 소유해야 할 것을 진주로 상징하여 표현했다(잠 3:15; 8:11). 신약에서도 흠이 없는 진주는 완전함을 상징했으며 격언이나 잠언에서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마 7:6; 13:45-46).
진주의 값에 대해서 성경은 현숙한 여인의 가치와 아름다운 성품, 지혜의 값어치를 설명할 때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고 했다(잠 20:15; 31:10).
돼지(pig)에 대해서 성경에는 멧돼지과에 속하는 가축으로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은유적인 용법으로 쓰였다. 히브리어로는 ‘하지르’(chazir)로 가축용 돼지와 야생용 멧돼지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돼지가 부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정(淨)한 동물과 부정(不淨)한 동물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구약성경 특히 레위기와 신명기에서는 돼지를 대표적인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먹지 말 것을 명하고 있다(레 11:7;신 14:8). 이사야 선지자도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는 다 함께 망하리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사 66:17). 그 이유를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라고 설명한다(신 14:8). 레위기에서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의 기준이 되었던 것은 되새김질의 유무, 굽이 갈라졌느냐의 유무에 있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경우에만 정한 동물로 인정되었으며 또 먹을 수 있었다(레 11:4-8).
돼지가 이처럼 부정한 짐승의 대명사가 된 것은 무엇보다 더러운 그 습성으로 인한 것이다. 물론 돼지는 고대 가나안의 황량한 기후에서 사육하기에 비효율적이었으며, 또한 젖도 공급하지 못하고 농사일에도 쓸 수 없는 가축이다. 그러면서도 소나 양, 염소가 풀이나 나뭇잎을 먹는 것과는 달리 돼지는 사람이 먹는 곡식(옥수수, 감자, 콩 등)을 먹고 자라는 동물이다. 또한 멧돼지는 성수기에 농작물을 망쳐 놓는 대표적인 동물이어서 시편에서는 ‘수풀의 돼지’(멧돼지-표준새번역)가 이스라엘을 유린했던 원수에 비유되어 ‘더러운 파괴자’를 상징하기도 했다(시 80:13).
이처럼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기피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주로 이방인 지역에서 이방인들에 의해 사육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마가복음 5:1-20에 나오는 거라사에 돼지를 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방인 지역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으며,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돼지치기로 있었다는 것은 집에서 멀리 떠나 이방인 지역에서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경은 개와 돼지의 불결성을 인간의 배신에 대한 불감증에 비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고 하셨다. 여기서의 돼지란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모략하는 자들을 말하며, 어떤 방법으로도 구제할 수 없는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상태에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베드로후서 2:22의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은 배교자들이 그 본래 믿지 않았던 때에 하던 행위로 환원한다는 뜻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잠언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의 분별없음과 도덕적 방종은 ‘돼지 코에 금고리’와 같다고 했다(잠 11:22).
이것은 복음(진리)를 선포하는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일이다. 복음은 듣던지 안 듣던지 전파하라 했으니까, 기회가 되는 대로 전해야 한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다보면 정말로 마음 아픈 사건들을 겪는다. 오랜 세월 말씀 안에서 교제했던 사람도, 때론 제자라 했던 사람들에게서도 고통스럽게 당하는 경우가 허다히 발생한다.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나타내 보이심)를 통해서 알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신학에서는 ‘점진적 계시’라 말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한번 비춰주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전 해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보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새로 보이신 계시를 전달 받았을 때, 사람들은 선입된 지식이 새로 임한 계시의 말씀을 거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들을 두고, 거룩한 것을 개(犬)에게,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또는 선지자들에게서 끊임없이 나타난 현상들이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듣고 배웠던 지식(언어)이 아니기 때문에 거부를 하고, 돌이여 돌을 던진 사람들이 되었다. 들을 귀가 없고, 분별할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계시의 빛은 개에게 주는 거룩함 이요, 돼지에게 던지는 진주가 된다.
실제로 예수님 앞의 바리새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고, 현제도 유전적 전통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증거자에게 주의를 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 듣는 사람에게 전하고자하신 의도가 있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들을 귀가 없는 자는 개요, 돼지와 같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응주 목사(재일한국선교사협의회(CCKJ) 회장 역임, TOGANE HOME CHUR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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