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성경바로읽기 26
창세기 6:4의 하나님의 아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있다고 해서 역사서가 아니다. 문학이 있다고 해서 문학작품이 아니다. 철학적 사고가 있다고 해서 인생철학을 다루는 책이 아니다. 창조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진화론과 논쟁하고자 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구원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창조 이야기에서부터 구원과 연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구원의 설명으로서 다루고 있다. 창세기 6:4의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 그리고 네피림도 구원이라는 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은 인간 구원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창세기 6:4의 하나님의 아들을 욥기 1장에서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했다해서 천사로 이야기하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는 네피림이라는 단어를 타락한 자들로 해석해서 유다서 1장과 요한계시록 12장에서 하늘로부터 내어 쫓긴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는 사건에서 나타난 천사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당연히 천사도 육체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천사가 실제로 인간과 성적 관계를 가졌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예수님은 천사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마태 22:30). 결혼은 하지 않아도 육체적인 관계는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고 말하기도 하지만 창세기 6:2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고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이야기가 나온다. 이로 보건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가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는 유추는 할 수 없게 된다.
네피림이라는 말에는 거인. 폭군. 장부라는 의미로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자라는 의미도 있는데 본문이 네피림을 용사라는 의미로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용사란 힘있는 자를 의미한다. 이 용사라는 단어는 창세기 10:9에 니므롯이라는 사람에게 붙여진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니므롯은 하나님 앞에[하나님에 대항하여] 용감한 사냥꾼이라고 했다. 결국 네피림은 아주 장대한 사람으로 힘이 있기에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네피림이라는 말은 민수기 13:33에 두 번 나오는데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네피림]’이라는 말에 네피림은 장대한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 이 아낙 자손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일을 한다.
실제로 성경은 악한 천사들의 구원을 다루고 있지 않다.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다루고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천사일 것이라는 유추는 처음부터 들어갈 여지가 없다. 창세기 6장에서는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악한가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경건해야할 자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함으로 경건한 자들조차 세상과 타협해버린, 그래서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가져오고,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방주 안에서 구원받는 노아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 인간구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성경의 구원 이야기다.
창세기를 듣고 있는 당시 대상은 가나안 땅을 향해가는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성경을 이해할 때 그 성경이 처음 선포되었을 때 그 말씀을 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들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창세기 6-9장은 노아 홍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사건을 당시 듣고 있는 대상은 애굽에서 나와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가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반복해서 선포된 말씀 중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인과의 결혼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혼문제에 있어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스라엘 남자가 이방 여인을 취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물론 이방 여인 중에도 라합이나 룻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이 되어 이스라엘 사람이 된 사람도 있었다. 그럼으로 여기에서 이방 여인이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환경에서 자라서 여전히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이방 여인을 말한다. 이삭의 큰 아들 에서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한 문제로 부모의 근심이 되었다.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을 아내들로 맞아 그들이 궁내에서 우상을 섬기도록 허락함으로 솔로몬이 이후 나라가 두 동강이 난다. 모세가 기록했다는 다섯 권의 책(모세 오경)에서 이스라엘 남자(아들)이 이방 여인(딸)을 아내로 맞이하지 말라고 자주 언급하고 있다. 물론 남자가 되었든지 여자가 되었든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결혼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표현은 이스라엘 남자가 이방 여인을 취하지 말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왜 이스라엘 남자와 이방 여인인가? 이스라엘은 교육을 중요시한다. 자녀들의 교육은 여인의 손에 달려있다. 그것은 어느 민족이든 마찬가지이다. 잠언은 현숙한 여인으로 끝을 맺는다. 어떤 남자가 복된 자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현숙한 여인과 결혼한 자이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런 면에서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겠는가? 창세기 6장 이야기를 듣기 전에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손 이야기와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했던 아담의 아들 셋 후손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이야기를 듣는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이 앞으로 들어 갈 가나안 사람들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하지 말 것을 듣는다. 당연히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셋 후손으로 대표되는 하나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경건한 자들이 가인의 후손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을 떠난 불경건한 세상문명을 쫓아가는 자들과 결혼함으로 경건하다는 자들조차도 세상과 타협함으로 모든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해져 홍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맞이하게 되었다로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
창세기 6장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이제는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의 구별이 없어진 시대가 노아의 시대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말을 쓰고 있을까? 이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와 창세기 3장의 인간 타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창세기 1장에서 핵심적인 문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이다. 창세기 3장에서는 “여자가 본즉”이다. 하나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자들은 자신(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문명을 만들어낸다. 노아이전에 경건한 자들의 대표격인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불경건한 자들의 대표격인 라멕은 자신의 감정을 따라 움직이는 문명과 일부다처의 결혼제도,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무기를 만드는 등 인간을 위한 문명을 만들어낸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따라가는 경건한 자들이 사람보기에 좋은 문명과 타협을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시대가 노아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의 아들이며(셋의 후손으로 대표되는), 사람 보기에 좋은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의 딸들(가인의 후손으로 대표되는)이다. 타협의 결론은 이렇게 나타난다. “자기들이 좋은대로(6:2)” 결국 하나님이 보시기에를 포기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포기한다. 사람의 자식이 되기를 원한다. 스스로 하나님의 사람이다고 하는 자들조차도 자신들이 보기 좋은대로....... 지금 우리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지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