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5장에서 7장까지 내용은 산상수훈으로 신약백성의 시민법(市民法)을 중심한 말씀을 하시고 본장에서는 산에서 내려 오셔서 백성들이 사는 삶의 현장에서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시청각적으로 문제의 병자들을 고쳐 주심과 자연을 명령하심으로 왕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죄를 사하심에서 자신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 절대 주권적 권능을 가지신 메시아이심을 보여 주신 사건들을 시간이나 순서와는 상관없이 모아 기록해 놓은 것이 8장과 9장의 내용이다.
첫째 나병환자를 고치심 (1-4)
산상보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실 때,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이 나병환자(문둥병)였다. 나환자를 헬라말로 레프로스(λεπρσς) 라는 말로 비늘이란 말에서 온 것이라 하는데, 나병에 걸리면 몰골이 뒤틀리고 피부가 하얗게 변하면서 생선비늘처럼 이러난다고 해서 부처 진 병명이라 한다.
문둥병(Leprosy)이란 나균의 침입으로 생기는 만성 전염병을 말한다. 이 병을 한센이 발견했다고 해서 한센씨 병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증상은 다음과 같다. 눈썹, 뺨, 코, 귀에 도토리만한 크기로 도드라지는 결절이 생긴다. 손, 발의 경우는 관절이 녹아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또 피부에 탈색된 반점이 나타나며 바늘에 찔려도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구약에서는 가죽, 옷이나 집에 생긴 곰팡이까지도 문둥병으로 보았으므로(레 13:47-59; 14:33-57) 오늘날의 한센씨 병과 동일하게 보기보다는 광범위한 피부병으로 보는 편이 좋다.
성경에서 문둥병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생기는 병으로 여겨졌으며 제사장만이 문둥병을 진단할 수 있었다(레 13:8). 문둥병으로 진단받으면 그는 자신이 문둥병자임을 알려야 했고 사람들과 격리되어 진 밖에서 살아야 했다(레 13:45-46). 문둥병이 나은 후에는 제사장에게 보이고 정결례를 행한 뒤에 다시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레 14:1-32).
문둥병에 결렸던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들이 여러 명의 예를 들어 기록되어 나온다. 구약에서 구스 여자를 취한 모세를 비방했던 미리암(민 12:10, 15), 그리고 문둥병이 치료된 나아만에게 거짓말하여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얻었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왕하 5:27), 제사장만 할 수 있던 분향을 하려고 했던 웃시야 왕(왕하 15:5) 등이다. 특수한 예로서 모세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고쳐주신 경우도 있다(출 4:6-7).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은 문둥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주셨으며(마 8:1-2; 눅 17:11-18) 제자들에게도 문둥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마 10:8).
최근에는 인식이 많이 좋아져 있지만 옛날엔 문둥병(나병=한센씨)하면 천벌을 받아서 걸린 병이라 해서 난치병자로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안 했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 해도 함께 집에서 살지 못했다. 그래서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살지 못하고 쫓겨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따로 살아야 했다. 여기에 등장된 나환자, 이때 사람들의 인식은 저주받은 사람, 흉악한 죄인, 가까이 할 수 없는 무서운 전염병자, 옷깃만 스쳐도 부정하다고, 여겼던 환자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우리인간의 죄악 덩어리로, 전혀 소망이 없는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의 상징으로 처음 등장된 것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런 그가 당시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면 대게는 ‘랍비’(선생)라 부른 것이 통례인데, 이 환자는 예수님을 ‘주여!’란 호칭을 사용하면서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 이런 말과 모습은 ‘나는 당신의 것’ 혹은 ‘나는 당신의 종’이란 고백이 담긴 간구였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 순간 환자는 즉시 그 흉악한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았다. 이것은 예수님의 주권적 권능을 보이심이요, 동시에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고백의 순간에 죄 사함을 받는다는 상징성이 있는 첫 번째 사건이었다.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입증을 삼으라.’ 이것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폐함이 아니라 완성 하러 오신 분의 모습을 보이신 것으로, 지금 나병에서 고침 받은 자의 정상적인 사회 복귀를 위한 절차를 밟으란 것이었다.
제사장(Priest)은 제사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했다. 히브리어로는 ‘코헨’(kohen)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이외에 애굽의 제사장(창 41:45; 47:26), 블레셋의 제사장(삼상 6:2), 다곤의 제사장(삼상 5:5), 바알의 제사장(왕하 10:19), 그모스의 제사장(렘 48:7), 아세라와 바알의 제사장(대하 34:5)에게도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제사장의 모습은 성경 시대 초기에 자신을 위해 제사 드렸던 아담, 가인, 아벨, 노아, 아브람 등으로부터 찾을 수 있는데, 이 외에도 가족을 위한 제사장으로 일했던 가장들(출 12:3), 국가를 위해 제사장으로 뽑혔던 아론 자손 제사장,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제사장이셨던 예수님(히 3:1) 등이 있다. 오늘날에는 믿는 모든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본다(벧전 2:9).
제사장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고 하셨다. 이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장은 백성의 대표가 되어 제사를 집례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본을 보였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는 제사장 직분을 존속시킴을 통해 이어졌다.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봉사하는 일을 맡았던 레위인(출 34:19-20; 민 18:15; 신 15:19), 제단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들을 주관했던 아론 자손 제사장,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출 28:29)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모세(Moses)의 생애에 대해서 살펴보면,
1) 모세가 태어난 때
성경학자들은 그의 출생연대에 대해 출애굽의 시점을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조금씩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출애굽 초기 연대를 BC 1446년으로 보면 모세는 BC 1526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산출된다. 모세의 출생연대를 이때로 본다면 모세가 때어났을 때는 아하모세(Ahmose, 1584-1560 BC) 왕의 손자인 투트모세(Thutmose, 1539-1524 BC) 1세 때가 된다.
투트모세 1세는 애굽의 왕 중에서도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한 왕이었고 그는 태어난 남아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출 1:16). 그렇지만 출애굽 연대를 BC 1225년으로 보는 학자들에 견해에 따르면 모세의 출생은 BC 1305년경이 된다.
(1)태어나서 미디안으로 도망가기까지(1세-40세까지)
‘건져내다’, ‘들어 올리다’는 뜻을 가진 모세는 레위의 후손으로 아버지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 사이에서 아론과 미리암의 동생으로 태어났다(출 2:1; 6:20; 민 26:59). 그가 태어날 때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며 태어나는 사내아이들은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였다(출 1:16). 이 때문에 그는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경건한 믿음의 부모가 석 달 동안 그를 숨겨 키웠다(출 2:2). 그렇지만 그가 점점 자라서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띄워 보냈다(출 2:3).
이때 바로의 공주에게 갈대상자가 발견되어 아기 모세는 바로 공주의 양자가 되었다(출 2:3-10). 하나님의 섭리로 어머니 요게벳이 그의 유모가 되어 어머니 품에서 젖을 먹고 자랄 수 있었다(출 2:7-9).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난 모세는 바로 공주에게 보내져 애굽 테베스의 왕궁에서 자라게 되었다.
테베스는 그 당시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며 교육적인 시설이 잘 갖추어졌던 곳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모세는 애굽의 훌륭한 문물을 익히며 왕자의 신분으로 자라났다(행 7:22). 40세가 되었을 때 그의 동족의 고역과 박해 당함을 보고 애굽 사람을 죽이는 일을 저질렀다(출 2:11-14). 이 때문에 그를 죽이려는 바로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게 되었다(출 2:15).
(2)미디안에서 이스라엘 지도자로 부름받기까지(40세-80세)
애굽에서 도망간 모세는 미디안에서 제사장 이드로(르우엘)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였다(출 2:16-21). 여기서 양을 치며 살았고 십보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게르솜’을 낳았다(출 2:22). 양을 치던 중 모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부름 받게 되었다(출 3:1-4:19).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애굽으로 돌아가던 중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아 하나님에게 죽임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아내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여 죽음을 모면하였다(출 4:24-26).
(3)이스라엘 지도자에서 죽기까지(80세-120세):
애굽으로 돌아온 모세는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애굽 왕에게 찾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을 요구하였다(출 5:1-3). 그러나 바로는 더욱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였고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출 5:4-23). 이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10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셨고 장자가 죽는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게 되었다(출 6:1-12:36).
출애굽한 후 모세는 만나와 메추라기 기적을 보았으며(출 16장) 르비딤의 호렙 산 반석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기적을 경험하였다(출 17:1-7).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며(출 17:8-16). 이드로의 방문을 받고 사법제도에 대한 조언을 얻게 되었다(출 18:1-27). 출애굽 후 3개월이 지난 때에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출 19:3-20:17; 31:18-34:35).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로 백성들과 함께 성막을 지었으며 제사장에 대한 규례를 정하였다(출 24:12-40:38).
나환자를 통해서 생각해야 할 깊은 뜻은 유대인들이 율법이라는 사상에서 깨끗하게 은혜로 치유하실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요 진정한 의사이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만병의 의사가 되신 예수는 말씀으로 신유의 역사를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시청각적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산상보훈의 말씀이 거짓이 아님을 확증하는 현장교육이 된 것이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은혜가 충만하신 자신을 통해서 율법에서 해방 받는 깊은 의미가 있는 교육의 현장이라고 생각해 본다.
둘째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심 (5-13)
두 번째 시청각 교육으로 예수께서 머물고 계시던 가버나움에 들어가자마자, 백부장이 찾아와 그도 예수님을 ‘주여!’ 라 부르며, ‘하인이 중풍 병에 걸려 괴로워’ 한다고 예수께 아뢰었다. 백부장은 이방인으로 백 명의 로마 병사를 이끄는 가버나움의 주둔군 책임자이다.
가버나움(Capernaum)이란 ‘나훔의 마을’이란 뜻의 이름을 지닌 이곳은 갈릴리 서북안에 위치한 곳이었다(마 4:13-16; 눅 4:31; 요 6:17-24).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이곳을 근거지로 전도를 했다. 그래서 가버나움은 ‘본 동네’라고 불리기도 했다(마 9:1; 막 2:1). 이곳에는 세관이 있었는데(막 2:14)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곳도 이곳이었다(마 9:9).
이곳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근무하던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쳐 주셨다(마 8:5-13; 눅 7:1-10). 또한 이곳에서 예수님은 열병으로 앓아 누워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셨고(마 8:14-17; 막 1:29-31)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으며(막 1:21-28; 눅 4:31-37) 중풍병자를 고치셨으며(마 9:1-8; 막 2:1-13) 또 많은 귀신들린 사람들과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 8:16-17; 막 1:32-34; 눅 4:23, 40-41). 그리고 예수님은 이곳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어 생명의 떡에 관해 가르치셨다(요 6:1-59).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과 가르치심을 베푸셨지만 이곳 가버나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아 심판에 관한 경고를 들었다(마 11:23).
가버나움은 현재의 ‘텔 훔’(Tel Hum)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 4세기의 석회암 회당이 발견되었다. 현무암으로 된 1세기의 회당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백부장이 세웠던 것으로(눅 7:5) 예수님이 설교하셨던 곳으로 생각된다. 이곳에서 베드로의 집으로 추정되는 1세기의 집들과 4세기의 가정교회도 발견되었다.
백부장(Centurion)은 100명의 군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로마의 지휘관을 말한다. 로마 군대는 군단들로 조직되었는데, 각 군단은 6,000명 정원의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또한 각 군단은 100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60명의 백부장들과 더불어 6개의 보병대를 가지고 있었다.
백부장들은 높은 보수를 받았으며 로마 사회에서 좋은 직업으로 인정되었다. 정상적인 근무연한은 20년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군대에 더 머무를 수도 있었다. 이들은 또한 은퇴할 때 큰 보너스를 받았고 그 후에도 영향력이 있는 시민들이 되었다.
신약에 나오는 백부장들을 살펴보면
(1)가버나움에서 근무했던 백부장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의 믿음에 깊이 감동을 받으셨다(눅 7:10).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라고 얘기하면서 그를 도와주실 것을 간청했던 것(눅 7:1-10)을 볼 때 그 당시 그가 얼마나 인정받는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2)예수님의 처형을 맡았던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모욕하였던 대제사장들과 구경꾼들(막 15:29- 32)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예수님의 운명을 지켜 본 그는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막 15:39)라고 말했다.
(3)베드로가 만난 백부장 고넬료는 복음을 듣고 반응을 보였던 첫 이방인도 고넬료라는 백부장이다(행 10장). 사도행전은 그를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그의 가정에 대해서는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집’으로 묘사했다(행 10:2).
(4)바울이 만난 백부장, 율리오(행 27:3)는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호송하였던 사람이다. 배가 거의 파선 지경에 있을 때, 율리오는 그의 군인들이 죄수들을 죽이는 것을 막아서 바울의 생명을 보존하도록 했다(행 27:43).
(5)그 밖의 다른 백부장들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천부장에게 전한 백부장(행 22:25), 바울의 살해음모를 알고 있는 바울의 생질을 천부장에게 인도한 백부장(행 23:17) 등이 언급되어 있다.
‘그래? 내가 가서 고처 주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 할 수 없으니 말씀으로만 해 주셔도 내 하인이 났겠습니다,’ 그리고 군대 조직이야기를 하면서 수하사람에게 명령한마디면 다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기이하게 여기시면서 이스라엘 사람(하나님의 백성) 중에서도 이방 사람인 이 사람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높이 칭찬을 하면서 진짜 한마디 말로 하인을 났게 하셨다.
말씀(Word)에 대해서 신약에서 말씀과 관련된 헬라어는 ‘로고스’(logos), ‘레마’(rhema), ‘글롯사’(glossa) 등이 있다. 로고스는 진술(마 5:37), 말이나 언사(마 12:32; 눅 20:20), 질문(마 21:24), 명령(눅 4:36), 보고나 소문(행 11:22; 눅 5:15), 강화(마 15:12), 기록된 말(행 1:1), 성경의 말씀(고전 15:54), 선포나 가르침(눅 4:32; 요 4:41), 말씀이신 예수(요 1:1, 14)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에 대한 선포와 이미 예수님의 인격과 말씀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계시에 대한 예고였다. 예수님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는 사자(messenger)의 공식 문구를 사용하지 않으셨으며 ‘내가 진실로(amen) 너희에게 이르노니’(막 3:28; 9:41)와 같은 아멘(amen) 공식어를 사용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지는 신적 확신과 권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은 행하심과 일치를 이루고 있다. 즉 치유기사들에서 병고침은 예수님의 말씀(막 2:11)과 명령의 말씀(막 9:25)에 뒤이어 이루어져 이적이 말씀의 외적인 표현임을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이 회중에게 선포한 메시지를 하나님의 말씀(고전 14:36; 고후 2:17), 도(살전 1:6), 주의 말씀(살전 1:8),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살전 2:13)이라 했고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다(고전 15:3-5).
히브리서에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말한다(히 1:1-4).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올리워지시고(히 1:5 이하) 종말론적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셨다는 사실(히 1:7 이하)에 기초한 약속의 말씀이다(히 7:28).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실행된다고 했다(요 3:34; 14:24). 더 나아가 예수님 자신이 말씀으로 칭해졌는데(요 1:1, 14) 이는 예수님 자신이 로고스, 즉 신적 계시자이자 구속자이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로고스 개념이 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요한일서 1장 1절과 요한계시록 19장 13절에서도 발견된다.
로고스(logos)가 기독교의 선포 전체를 지향하는 말인 반면, 레마(rhema)는 개별적인 말 혹은 발언과 결부되어(마 12:36) 케리그마적인 특징을 띠며 말씀에 대한 성취가 뒤따른다(눅 1:37; 5:5-8).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많이 사용되었다.
글롯사(glossa)는 일반적으로 몸의 지체인 혀(눅 16:24; 계 16:10)를 가리키는데, 신약에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고 구원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표적으로 간주되었다(행 2:16-21과 욜 2:28-32, 고전 14:21과 사 28:11 이하 등). 또한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권능을 알리고 제자들에게 임한 불의 혀(행 2-3장)로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나타내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빌 2:11) 일도 혀를 통해 이루어졌다.
신약에서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에 기초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말씀의 권위를 넘어서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 자신이 곧 말씀이 되셨다. 따라서 말씀은 사도들의 선포의 핵심이며 기독교의 선포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 되고 있다.
이방사람인 백부장에게, ‘이스라엘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 런 말씀의 핵심이 뭔가? 제도권의 틀과 조직 속에 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란 메시지를 증거 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인정하는 믿음!!!!’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1-12) 여기의 본 자손이란 말은 유대인들을 두고 한 말이다. 문제는 지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라 말한다.(히4:12) 살아있다는 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살아서 그 효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지금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적용되는 말씀이란 것이다. 명심해야 한다.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롬9:27-28)
여기서 중풍 병은 몸의 50%는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병자인 것이다. 이것은 율법으로는 살아있지만 은혜 면으로 죽은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래서 두 번째는 중풍병자를 고처주신 것이다. 지금도 율법으로는 살았다고 하지만 은혜 면으로 죽은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은혜를 받아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아직도 율법으로 강조하고 율법은 지켜야만 천국 간다고 믿고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셋째 베드로의 장모이야기(14-17)
베드로의 집이 가버나움에 있었고, 그의 장모가 사위집에서 산 것 같다. 어쩌면 베드로가 예수를 만난 후 밤낮없이 예수와 함께 다니느라고 집을 비우니, 베드로의 아내가 친정어머니를 오라 해서 함께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째 튼 그 장모가 열병(말라리아?)에 걸려 고생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방문, 그의 손을 잡으니 열병이 곧 떠나고, 여인은 일어나 예수님을 수 종 들었다.
열병(Fever)은 높은 열이 따르는 병으로 히브리어 용어는 불타는 것과 관계를 가지며, 열병을 하나님의 심판의 위협으로 여긴다(신 28:22). 헬라 의학은 열병의 유형들을 구별하고 그것들을 자연발생적인 원인들로 돌린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에 의해 치료받은 것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막 1:30-31; 요 4:52; 행 28:8 등). 마가복음 1:30-31에 대한 누가복음의 병행 구절은 이 열병을 심각한 병으로 묘사한다. 귀신의 영향의 형태이든 하나님의 형벌의 형태이든 모두 종교적인 세력이 열병과 관련되어 있다.
성경에서 열병은 하나님께 호소함으로 치유되거나 또는 죄의 형벌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낼 때 치유된다(눅 11:20).
열병의 치유는 그리스도의 죄와 마귀에 대한 지배권을 입증하며,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메시아적 구원(막 1:30-31)에서 믿음을 일깨우는(요 4:53-54) 표시이며,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의 시작의 표시이다.
수많은 병자들,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병을 고치고 귀신에게서 해방을 받고 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수 종 들었다는 얘기는 별로 없다. 한데,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을 고침 받고 즉시 수 종 들었다는 얘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무엇일까? 어쩌면 가족도 돌보지 않고 예수에게 미쳐, 예수를 쫓아다니는 사위에 대해서, 또는 사위를 그렇게 꼬셔서 데리고 다닌 예수에 대해서도 엄청 불만을 갖고 원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와서 순식간에 자기의 열병을 고쳐 준 체험을 하고, 비로소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서 예수님을 수 종 드는 사람이 되었기에 그 기사를 명시해 넣은 듯하다. 이런 경우는 지금도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있을 수 있는 일들이다. 예수운동에는 가족이 원수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게 원수 시 한 이유는 가족의 현실 생활에 충실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경우도 있고, 또는 가족들의 신앙(전통유대교의 신앙)과 다르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그랬었으니까,(요7:1-4)
넷째 나를 따르라 (18-22)
(1)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는 무리에게 가치를 두려 하지 아니했다.
사람들이 예수를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셨다. 건너편은 갈리리 바다의 동쪽 가다라 지방(28)을 두고 하신 말씀인데, 예수님은 자기의 능력으로 기적을 체험하거나 이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에워쌈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셨다. 한때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을 삼으려 했을 때도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신일도 있었다.(요6:15)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2:23-24)
(2)서기관의 요청을 거절하신 예수(19-20)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임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서기관(Secretary)은 문서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직무를 담당한 사람을 말한다(왕하 12:10; 대하 34:13). ‘비서’와 같은 뜻으로도 쓰였다(왕하 12:10-NIV). 히브리어로는 ‘소페르’(sopher)로 직업적인 필사자를 이르는 말이었다. 이들은 계약서를 베껴 쓰거나 문서나 편지를 작성하고 구술(口述) 등을 받아 적는 일을 하였다(렘 32:10-12; 36:4, 18). 바룩은 예레미야가 구술한 예언을 받아 적는 일을 한 서기관이었다(렘 36:18).
그리고 후대에 가서 이들은 율법을 필사하고 보존하며 해석하고 가르치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스 7:6; 렘 8:8). 서기관들의 이런 역할 때문에 서기관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사, 학자로도 불렸다(스 7:6; 사 50:4). 에스라가 이러한 역할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스 7:10).
왕의 서기관(대하 24:11)들은 왕의 비서 역할을 감당하며(왕하 22:3; 대상 27:32) 왕실 내의 모든 사건을 기록하며 보관하는 일을 하였다(왕상 4:3). 히스기야 때의 서기관 셉나는 히스기야의 명을 받고 앗수르 사람들과 협상하기 위해 파송되는 중요한 일을 맡았다(사 36:3). 요시아 왕 때의 서기관 사반은 일종의 회계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였고(왕하 22:3-7), 왕 앞에서 발견된 율법 책을 낭송하였다(대하 34:15).
포로기 이후에 이들은 한 계급을 이루었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서기관(마 5:20), 율법사(마 22:35), 랍비(마 23:8), 교법사(딛 3:13), 선비(고전 1:20) 등으로 불렸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보존하는 일에 주력하였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승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도록 다시 세칙을 만들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장로의 전승, 유전 준수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율법의 근본정신보다는 형식주의와 외식에 빠지게 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마 15:2-9).
이들은 공회에서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권력층에 속하였고(마 16:21; 26:3, 57)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는 자리에 있었다(눅 20:46).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외식과 형식주의를 책망하셨다(마 23:2-36). 이들은 이러한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세력이었다(마 21:15; 눅 22:2). 결국 이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율법 지식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치명적인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눅 22:66; 23:10).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핍박하는 무리들 가운데 한 세력이었으며(행 4:5),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였다(행 6;12).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부활 문제에 대하여 바울의 편을 든 사람도 있었고(행 23:9) 예수님을 믿은 사람도 있었다(마 8:19).
(3)너는 나를 따르라.(21-22)
‘제자 중에 또 한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앞에서는 서기관이 따르겠다고 하는 자는 거절하시고, 이번에는 아버지 장사를 치루고 오겠다는 것을 왜 거절하실까?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있는 것이지, 누가 따르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가 되는 것은 제자가 선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선생이 제자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권은 항상 선생의 고유한 주권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기관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그의 중심이 예수의 뜻을 따르기 위한 제자로서의 길을 가려는 것 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을 예수님은 미리알고 계신 듯하다. 왜냐하면 앞에서 인용한 말씀들을 보면 사람의 중심을 다 아신 분이란 걸 말씀했는데, 서기관에게 이유 없이 거절한 것이 아니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은 것을 보면 서기관의 속내가 무엇인지를 알고 하신 말씀이란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 중에 서기관 출신이 없다는 것을 봐서 증명이 된다.
하지만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오겠다고 한 사람은 이미 제자로 선택된 자이다. 제자의 신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본문은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누가복음 9장 62절에서는 이 말씀들을 하시는 중에 한사람은 ‘가족을 작별하고 오겠다.’는 자를 향해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까지 하셨다.
이런 예수님의 태도를 보이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이요, 그분의 제자로 부름 받은 자들에 대한 엄격하심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는 기본진리가 더 우선이 된 자들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대가 아무리 바뀔 찌라도 진리는 바뀔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은 제자의 길을 가겠다고, 헌신 서약을 했던 형제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돈을 벌지 못했다고 불평하고 떠난 자들이 있고, 어떤 형제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돈을 따라, 제자의 길을 버리고 떠난 형제들도 있다. 이런 모습에서 상처가 되었었다.
예수님처럼 처음부터 그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제자로서의 헌신 서약 따위는 하지 않게 했어야, 그들로 하나님 앞에 거짓말 신앙이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어 이것이 내게 상처로 남게 되었다.
아쉬움이 있고, 외롭고 힘든 일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 중에서 이루어 진 일이라고 스스로 위로를 삼고, 새로운 사람을 찾아 남은 사역을 하기로 한 것은 지난날의 사역들이 모래위에서 하는(제자 양육?) 일이었다는 것을 긴 세월과 아픔을 겪으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진리의 사역이란 처음부터 세상(세속)으로부터는 버림받아야, 예수의 길을 갈 수 있고, 예수께서 요구하신 일이 무엇이라는 것도 빈들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예수의 길,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길, 왜 예수께서 이렇게도 엄격 하셨는가를 경험하기 전에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하게 생각하고 감사히 여긴다.
다섯째 바다도 순종케 하시다.(23-27)
예수님은 당신의 거처가 있는 가버나움에서 제자들과 함께 건너편, 갈릴리바다 동편 거다라 지방을 가시기 위해 배를 타셨다. 얼마를 지났을까,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파도가 배를 금방이라도 덮칠 듯, 위태한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태평하게 잠만 주무셨다. 제자들은 당황하고 두려워 떨면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다.
‘주여! 구원 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가하더라.’
구원(salvation)이란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 또는 위험에 빠진 사람이나 나라를 대신해서 구해주는 행위이다. 구약성경에서 구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예슈아’(yeshu?h)로 자연재해나 적의 침입과 같은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상황과 관련되어 쓰였다. 신약성경에서 구원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소테리아’(soteria)로 주로 죄, 죽음 그리고 사탄의 권세로부터 믿는 이들을 구해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되어 쓰였다.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인간이 할 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믿음으로 받는 것뿐이다. 그리고 구원의 대상은 이스라엘 자손(사 45:17)뿐 아니라 이방인(롬 11:11-12; 갈 3:8), 즉 모든 사람(마 18:14; 롬 1:16)이다.
구약에서 구원은 추상적인 의미로, 즉 죄로부터의 영적인 구원(시 51:14; 겔 37:23)을 뜻하는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실제적인 의미, 즉 애굽(시 106:7-10)이나 환난(렘 30:7), 원수(삼하 3:18; 시 44:7), 병(사 38:20) 등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였으며 그 주체는 대부분 하나님이셨다. 구원은 적으로부터 놓임받아 하나님께로 해방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었다(사 43:11). 여기서 인간을 사로잡고 있던 적들은 죽음이나 두려움(시 6:4-5), 대적(신 20:4), 사악한 자(시 59:2), 질병(사 38:21), 환난(렘 30:7), 죄(시 51:14; 겔 36:29) 등이었다.
신약에서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놀라운 은혜였다. 죄의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인간을 대신해서 피 흘리게 하시므로 하나님과 인간이 온전한 화목을 이루도록 하셨다(롬 5:9).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새로운 상태(갈 4:6; 롬 8:14)에 놓이게 되었고 유업을 받게 되었다(갈 4:7; 엡 1:11). 이러한 구원은 신약성경에서 헬라어‘소조’(sozo), ‘소테리아’(soteria) 등으로 기록되었는데(마 8:25; 요 11:12; 행 27:31, 34; 히 5:7) 질병을 고치는 이적과 함께 사용되거나(마 14:36; 눅 7:3) 죄 사함으로 인한 구원(눅 1:77), 영생을 상속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표현되었다(막 10:17-26).
바울은 구원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하여(요 17:2; 딤전 2:5; 딤후 1:9), 날마다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야 할 것이며(빌 2:12) 미래에 완성될 것(롬 13:11; 벧전 1:5)이라고 보았다.
이 장면에서 만물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는 장면이다. 자연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순간을 눈으로 보고 명령의 내용을 들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깨닫지 못하는 영적 귀먹어리와 영적 소경들이 아닌가? 지금도 주님은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우리는 환경에 얽매여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좌우로 치우치고 갈 길을 찾지 못 찾고 헤메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예수의 사람들로 예수와 함께 동행 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세성적인 풍랑을 만날 때가 종종 있다. 질병과 가난과 여러 가지 환경에서 각가지 세상적인 풍랑을 만날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자기의 백성들을 지켜보시고 창조의 능력으로 보살펴주시고 계심을 믿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주무시는 지 우리의 위태한 상황도 모른 채, 전혀 응답이 없을 때도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때론 낙심도 되고, 깊은 좌절감에 흠뻑 빠질 때도 있다. 어쩌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심정이 이런 지경은 되지 아니 했을까?
잠에서 깨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하신 첫마디가 뭔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님과 함께 탄 배가 거센 파도가 덮쳐 배가 침몰이라도 될까? 그래서 그리도 당황하면서 모처럼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워야 하나? 그러니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지 않겠는가?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해진 바람과 바다라 한다면 예수님이 타고 계신 그 배를 세상 풍랑이 어떻게 뒤 엎겠는가?
어쩌면 제자들의 믿음을 보시기 위해 주무시는 척하시고, 동시에 바람과 바다를 동원,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듯 위태한 상황을 만드셨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당신의 백성들에게 위태한 사건을 만들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상황이 되게 하신 것은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시기 위한 주님의 양육방식의 하나일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여섯째 귀신들린 사람(28-34)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서에는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막 5:1-20, 눅8:26-39). 여기서는 비교적 간단히 기록 되어 있다. 예수님이 배에서 내려 처음만난 사람은 무덤 사이에 있었던 귀신들린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은 옷도 입지 않고, 힘이 세서 쇠고랑으로 묶어도 그것을 끊고,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며, 고함을 지르고, 몹시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는 길이었다. 그곳을 예수님이 지나가신 것이다. 그런데, 이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귀신(Demon)은 악신, 악령, 사신, 사귀와 동일한 말로, 구약성경에는 ‘귀신’에 해당하는 특별한 용어가 없다. 그러나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귀신의 존재를 믿고, 귀신이 사람들에게 재난을 가져온다고 알고 있었기에,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악한 신(demon)에게 제물을 드렸으며(신 32:17; 삿 9:23; 삼상 19:9 참고) 때로 인신제사를 드리기도 했다(시 106:37). 하지만 이런 일들은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것들이었다(신 18:9-14). 신약에서 귀신(헬라어로 ‘daimonion’,‘daimon’)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여러 번 언급되었다. 귀신은 사람에게 들어가 정신을 이상하게 하거나(막 5:15) 심한 경련(눅 9:37-42)을 일으키고 벙어리(마 9:32)나 눈먼 벙어리(마 12:22)로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성경은 귀신을 사탄(바알세불)의 대리자, 앞잡이(마 12:24-30)라고 말한다. 귀신은 더럽고(마 10:1) 악취를 일이키기도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괴력을 발휘하게 만들었으며(눅 8:29), 많은 수의 귀신이 함께 거하기도 했다(막 5:8-9). 또한 사람을 지배하고(마 8:29) 사람을 초월하는 능력(행 19:13-16)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았고(막 1:24) 자신이 어떤 운명인지 알고 있었다(마 8:29). 때로 경배를 받기도 했고(고전 10:20)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다(딤전 4:1).
저자는 1964년 12월 두 번째 주일 오전 예배 후 곧 바로 도보로 대구 북부경찰서, 대구경찰서, 남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메시지를 전했던 성경말씀의 내용이다(마 8:28-34, 눅 8:26-39). 20대 청년이 유치장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당신들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니이까?” 귀신이 예수님을 만나서 던진 내용을 가지고 형제자매들에게 평생 처음으로 외친 메시지였다. 오늘날도 창살 없는 감옥인 마음의 감옥과 유치장에서 어둡게 살아가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참 빛(요 1:9)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지금도 어둡고 캄캄한 마음의 감옥에서 평안을 잃어버리고 정신적으로 혹은 귀신들린 사람같이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주면에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만나도록 해서 구원의 은혜를 받도록 기회를 만드는 것이 전도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사람이 귀신이 들리면 사람의 본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자기가 누구인지, 또는 무슨 짓을 하는 지, 자기의 거처가 어디인지, 몽땅 잃어버리고 산다. 그러면서도 힘이 강해서 무엇으로도 그를 제어(制御) 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된다. 어쩌면 이 시대는 모두가 귀신들린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이 된 듯한, 느낌이다. 매일 매시간 마다. 메스콤의 보도 내용은 귀신 들린 짓을 하는 자들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진 것처럼 보인다.
귀신 들리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돈, 섹스, 오락, 폭력, 마약, 살인, 강도나 절도, 사기, 부정, 뇌물, 탈세, 거짓과 위선 온갖 비정상적인 삶에 빠져 거기서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그들이 사는 곳이 아무리 화려한 저택이라 해도 그곳은 무덤이다.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를 만나는 길 밖에 없는데, 예수를 담고 있는 교회마저 어느 때는 귀신들린 짓이 노출 될 때가 있다. 그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지 못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무덤처럼 되어 있다.
‘주여! 우리를 저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소서’ ‘그래라’ 마침내 귀신들이 그들에게서 나와 돼지 떼에 들어갔고, 돼지들은 비탈길로 달려가 바다에 들어가 몰살을 한다. 그리고 귀신들린 사람은 옷을 입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고, ‘주여 나도 주님을 따르게 해 주소서’ ‘아니다 집에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행한 이 큰 일을 네 가족들에게 말하라
돼지(pig)는 성경에 나타난 멧돼지 과에 속하는 가축으로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은유적인 용법으로 쓰였다. 히브리어로는 ‘하지르’(chazir)로 가축용 돼지와 야생용 멧돼지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돼지가 부정한 이유로 정(淨)한 동물과 부정(不淨)한 동물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구약성경 특히 레위기와 신명기에서는 돼지를 대표적인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먹지 말 것을 명하고 있다(레 11:7;신 14:8). 이사야 선지자도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는 다 함께 망하리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사 66:17). 그 이유를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라고 설명한다(신 14:8). 레위기에서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의 기준이 되었던 것은 되새김질의 유무와, 굽이 갈라졌느냐의 유무에 있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경우에만 정한 동물로 인정되었으며 또 먹을 수 있었다(레 11:4-8).
돼지가 이처럼 부정한 짐승의 대명사가 된 것은 무엇보다 더러운 그 습성으로 인한 것이다. 물론 돼지는 고대 가나안의 황량한 기후에서 사육하기에 비효율적이었으며, 또한 젖도 공급하지 못하고 농사일에도 쓸 수 없는 가축이다. 그러면서도 소나 양, 염소가 풀이나 나뭇잎을 먹는 것과는 달리 돼지는 사람이 먹는 곡식(옥수수, 감자, 콩 등)을 먹고 자라는 동물이다. 또한 멧돼지는 성수기에 농작물을 망쳐 놓는 대표적인 동물이어서 시편에서는 ‘수풀의 돼지’(멧돼지-표준새번역)가 이스라엘을 유린했던 원수에 비유되어 ‘더러운 파괴자’를 상징하기도 했다(시 80:13).
이처럼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기피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주로 이방인 지역에서 이방인들에 의해 사육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마가복음 5:1-20에 나오는 거라사는 그곳에 돼지를 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방인 지역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으며,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돼지치기로 있었다는 것은 집에서 멀리 떠나 이방인 지역에서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경은 개와 돼지의 불결성을 인간의 배신에 대한 불감증에 비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고 하셨다. 여기서의 돼지란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모략하는 자들을 말하며, 어떤 방법으로도 구제할 수 없는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상태에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베드로후서 2:22의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은 배교자들이 그 본래 믿지 않았던 때에 하던 행위로 환원한다는 뜻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잠언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의 분별없음과 도덕적 방종은 ‘돼지 코에 금 고리’와 같다고 했다(잠 11:22).
돼지 떼의 몰사 사건이 있었다. 예수님은 거라사 지역에서 ‘군대’ 귀신에 사로잡힌 자를 고쳐주셨는데(눅 8:26-39), 이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누가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는 이 이야기를 현대의 의학 용어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능력이 어떠한 것인가를 선포하기 위해 기록하고 있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로마 군대는 정복자의 힘을 상징했다. 그리고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모든 주권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군대’라는 귀신에 사로잡힌 이 사람의 경우 그의 모든 주권이 상실되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으로 인해 ‘군대’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었으며, 그 귀신들은 자청해서 돼지 떼에 들어갔다. 결국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막 5:13). 누가는 돼지를 치던 자가 마을로 가서 무어라고 말했는지, 얼마나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는지, 또 동물을 몰사시키는 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인지 등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귀신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게 되고 구원받은 것(눅 8:35-36)과 사람들이 여기에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참고, 마 8:28-34; 막 5:1-20).
이 놀라운 소식을 들은 성읍사람들이 예수에게 와서 보니 귀신들렸던 자들은 옷을 입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람이 온전하게 된 것을 기뻐하기보다, 돼지 떼의 몰살로 재산상의 손해를 본 것에 대해 훨씬 관심이 컸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곳에서 속히 떠나주시기를 간청한다. 이곳의 이 사람들은 사람의 가치보다 돈에 가치를 둔, 참으로 돈의 귀신들린 사람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진리를 가까이 하려는 사람은 없고, 화려한 가시적 현상과 돈에만 관심이 가득한 세상, 이것은 분명 귀신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진리가 되신 예수가 하루속히 무덤 사이에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귀신들린 세상 사람들을 찾아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요 3:16).